맙소사! 월급 루팡이 과로보다 더 괴로울 줄이야...

몸은 편한데 정신이 썩어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by 멈미

매일이 데칼코마니 같다.

9시 출근, 10시 회의, 12시 점심, 6시 퇴근. 신입 때는 모르는 게 많아서 두려웠지만, 적어도 매일이 새로웠다. 사원증을 목에 거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긴장감이 나를 깨어있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눈을 감고도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익숙함. 그 편안함이 이제는 목을 조여오는 기분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무실의 평온함이 때로는 견딜 수 없이 답답하다. 차라리 미친 듯이 바빠서 정신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마저 든다.


지루함은 번아웃의 다른 얼굴

지난번 글에서 나는 '번아웃'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번아웃은 정말 에너지가 바닥나서 밥 먹을 기력조차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지루함은 번아웃의 감정과는 다르다.

에너지는 멀쩡하다. 퇴근하고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주말에 놀러 갈 수도 있다. 그런데 회사에만 오면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무기력해진다. 일이 너무 하기 싫고, 설레지도 않는다.

이건 번아웃(Burnout)이 아니라 '보어아웃(Bore-out)'에 가깝다. 에너지가 없는 게 아니라, 에너지를 쏟을 곳이 없어서 마음이 썩어가는 상태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의 말이 뼈를 때렸다. "사람들은 몸이 편안해지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행복은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태다."

우리는 흔히 '꿀 빠는 보직'을 원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면 왜 불행할까?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한 상태가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설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처음엔 이직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새 직장에 가면 다시 설레겠지.' 하지만 경험상 그 약발도 길어야 두세 달이다. 새 차, 새 집, 새 직장이 주는 기쁨은 인간의 무서운 적응력 앞에서 금방 힘을 잃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퇴사 대신, 고인 물 같은 일상에 돌을 던져 파동을 만들기도 한다. 거창한 도전 말고, 당장 내일부터 할 수 있는 '작은 딴짓'들로 말이다.


1. 출근길의 배신: 의도된 낯섦

소냐 류보머스키 교수는 행복해지려면 '적응'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줘야 한다고 했다. 나의 지인은 이걸 출근길에 적용해 봤다고 한다. (아래는 지인 관점에서 서술했다)

매일 똑같은 지하철역, 똑같은 출구로 나오던 습관을 버렸다. 어느 날은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봤다. 고작 10분을 더 걸었을 뿐인데, 평소엔 못 보던 예쁜 카페와 골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엔 회사 근처의 안 가본 식당을 '도장 깨기' 하듯 찾아다녔다.

업무 환경도 조금씩 비틀었다. 매일 앉던 자리 대신 회의실 구석이나 로비 라운지로 노트북을 들고 나가 일했다. 사용하는 툴tool도 억지로 바꿔봤다. 엑셀로 하던 걸 파이썬으로 짜보거나, 메모장을 노션 같은 걸로 바꿔보는 식이다. 효율성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새로운 걸 배운다는 그 느낌이 뇌를 다시 간질거리게 했다.

신기하게도, 아주 사소한 환경의 변화가 뇌에게는 "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났네?"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긴장감을 선물했다고 한다.


2. 의미 부여: 이 짓을 내가 왜 하고 있나

지루함의 본질은 '자극 부족'이 아니라 '의미 부족'이라고 한다. 똑같이 종이를 찢는 단순 노동을 시켜도, "이게 손 근육 발달에 도움이 됩니다"라고 의미를 부여받은 사람은 지루함을 덜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루한 업무를 다시 정의해 보기로 했다. "또 엑셀 노가다네..." 라고 생각하던 걸 힘들겠지만 억지로 비틀어보자. "이 데이터를 정리해 두면 팀장님이 삽질할 시간을 30분은 줄여줄 수 있겠지." "이 보고서가 통과되면 우리 팀 예산이 늘어날 거야."

솔직히 이렇게 생각한다고 갑자기 일이 게임처럼 재밌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기계 부품처럼 소모되고 있다'는 허무함은 조금 줄어들 것이다.

여기에 나만의 '의식(Ritual)'을 더해보자. 초콜릿을 그냥 먹는 것보다 쪼개서 음미하며 먹을 때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업무 시작 전에 여러분만의 의식을 치르는 거다. 복잡한 데이터를 만지기 전에는 좋아하는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켜고(이제는 최소한 사무실에서 에어팟 낀다고 뒷통수 맞지는 않으니까), 회의 준비 전에는 책상을 싹 닦고 향초를 켜는 식이다. 별거 아닌 이 행동들이 "자, 이제 선수 입장합니다" 같은 비장함을 줘서 지루함을 덜어줄 것이다.


3. 안전한 사고 치기: 적당한 리스크

이 모든 걸로도 해결이 안 된다면? 그때는 정말 판을 흔들어야 할 때다. 지루하다는 건, 현재의 환경이 나에게 더 이상 줄 수 있는 자극이 없다는 신호니까. (도파민 분비 타임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당장 사표를 던지라는 게 아니다. 대신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을 벌려보는 거다.

지인은 회사에서 모집하는 사내 공모전에 덜컥, 아무런 준비없이 지원했다. 입상할 확률은 희박했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랜만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걸 느꼈다고 한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새로운 역할을 팀장님께 제안해 보기도 했는데, 거절당할까 봐 두렵긴 했지만, 그 두려움 자체가 지루함을 날려버리는 강력한 자극제였다고 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약간의 '불안'과 '불확실성'이 필요한 것이다. 너무 안전한 길은, 너무 지루한 길과 동의어이다.


마치며: 여전히 지루한 당신에게

스타트업에 다니는 사람도,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도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나도 매일이 스펙터클하게 즐겁진 않다. 어떤 날은 시계만 쳐다보며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 (어떤 날이 1주일에 이틀 이상인적도 있다.ㅋㅋㅋ) 하지만 "아, 지루해 죽겠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 지금 번아웃이야? 아니면 그냥 심심한 거야?"

번아웃이 아니라면, 그건 내 마음이 움직이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낯선 짓을 하나 저질러 보는 것.

오늘 퇴근길, 늘 가던 길이 아니라 낯선 골목으로 한번 꺾어보는 건 어떨까? 그 작은 턴(Turn)이, 지루한 일상의 궤도를 아주 조금은 바꿔줄지도 모른다.


다음 13회 예고: "일은 완벽한데, 상사가 지옥이라면?" 업무도 적성에 맞고 워라밸도 찾았다. 그런데 상사의 말 한마디에 출근길이 다시 두려워진다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 상사, 그 불편한 마음을 다루는 현명한 거리두기 방법을 이야기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