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시간에 내가 하고 말지", 당신을 망치는 생각

내 손을 떠나면 불안한 당신에게 필요한 페어링(Pairing)의 기술

by 멈미

혼자 모든 걸 잘하는 사람보다, 팀원을 성장시키는 사람이 더 멀리 간다

금요일 오후 5시 50분. A팀장은 퇴근을 앞두고 습관처럼 메일함 새로고침을 누른다. 직속상사인 임원에게 이메일이 와 있다. "A팀장! 월요일 오전까지 이 자료 정리해서 한번 봅시다."

A팀장은 메신저 창을 띄워 팀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훑어본다. 이미 짐을 챙겨 일어서는 팀원들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갈등한다. '누구한테 맡기지? 아니, 지금 시키면 싫어하겠지?' 결국 창을 닫는다. '에휴, 설득하고 설명할 시간에 그냥 내가 하고 말자.' 그렇게 또 한 번 A팀장의 주말이 삭제되었다.

온보딩 기간인 몇몇 중간관리자나 팀장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내뱉는 말이 있다. "일을 못 맡기겠어요. 설명하는 것도 귀찮고, 그 사람이 제가 생각한대로 제대로 해올지도 의문이고...솔직히 제가 하는 게 제일 빠르고 정확합니다."

어떤 경력직 팀장은 "사실은 제가 전부 컨트롤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제 손을 떠나니까 왠지 불안하거든요." 그의 고백은 사실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구조 신호나 다름 없었다.


"그럼 평생 밤 11시까지 일해야죠"

사실 나도 그랬던 경험이 있다. 경력으로 입사한지 7년 쯤 되었을 때, 과장 3-4년차였고, 핵심인재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모든 기획안과 보고서를 양손에 꽉 움켜쥐고 밤 10-11시까지 야근을 했다. 후배가 "제가 초안이라도 잡아볼까요?"라고 물어도 "아니, 그냥 내가 할께. B대리는 얼른 들어가."라며 밀어냈다. 겉으론 배려하는 척했지만 속마음은 오만했던 것 같다. '네가 쓰면 내가 어차피 다시 고쳐야 하는데, 그럴 바엔 처음부터 내가 쓰는 게 효율적이야.'

어느 날 직속 상무가 나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은 정시 퇴근하는데 왜 A과장만 밤 늦게까지 일 해?" 후배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이 아까워 직접 다 한다고 답하자, 상무님이 툭 던진 한마디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지금은 빠르겠지. 근데 다음 프로젝트 때도 똑같이 너 혼자 할꺼야? 그럼 당신은 평생 밤 11시까지 일해야해.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하면 악담이 아니라 당신은 관리자로 크기 어려울꺼야. 실무자로서 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을 내리는 법을 알아야 해."

그리고 상무님은 몇 가지 더 얘기해줬다. "처음 한 번 가르치는 건 '시간 낭비'이고 '소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건 '투자'야. 지금 시간을 써서 사람을 키워야 나중에 비로소 리더로서의 시간을 벌 수 있어."라고 말해주셨다. 어찌보면 당연한 진리를, 나는 '완벽주의'라는 고집에 눈이 멀어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위임의 기술: 감옥 문을 여는 실전 전략

상무님의 피드백 이후 내 나름대로 깨달은 바도 있어서 업무를 나누기 시작했다.(사실 너무 쥐고 있는 일이 많아서 다 하다가는 제 命에 죽지 못할 것 같아서 업무를 나눈 면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무작정 일을 던져주는 것은 위임이 아니라 '방임'이다.

나름 회사 생활의 짬밥(?)이 쌓이면서 그리고 HR Field에 뒹구르면서 얻은 실전 위임은 아래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 "제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 같아요!" (공정성과 평가의 상관관계)

요즘 특히 MZ 구성원들은 '공정함'에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다. 이때 리더가 쥐어야 할 가장 냉정하고도 명확한 기준은 '연봉'이다. 조금 거칠게 말해 연봉은 그 사람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시장이 매긴 가격표다. 높은 연봉을 받는 시니어에게 더 무겁고 복잡한 업무가 배정되는 것은 조직의 상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꼰대 상사' 소리 듣기 딱 좋다. 연봉을 근거로 업무를 배분했다면, 그에 따르는 '평가의 공정성'이 반드시 담보되어야 한다.

"업무량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당신의 업무는 팀의 핵심적인 기여도를 차지하고 있고, 나는 이 기여도를 연말 평가에 명확히 반영할 것이다."

리더는 이 약속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업무는 에이스에게 몰아주면서 평가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1/N 배분하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엉뚱한 사람에게 좋은 점수를 준다면 위임의 정당성은 그 즉시 파괴된다. 업무 분장이 '투입(Input)'이라면, 평가는 그에 대한 '산출(Output)'이자 보상이다. 이 두 지점의 주파수가 맞을 때, 팀원은 비로소 "많이 하지만 제대로 대우받고 있다"는 효능감을 느낀다. 불편한 대화를 피하려고 원칙을 훼손하는 순간, 팀의 신뢰 자본은 바닥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이거 제 업무 아닌데요?” (R&R의 회색지대와 궂은일의 경제학)

사전에 R&R을 아무리 정교하게 정의해도, 실제 현장에서는 누구의 영역도 아닌 ‘회색지대(Gray Zone)’의 업무가 반드시 발생한다. 대개 티는 안 나는데 손은 많이 가고, 가치는 낮아 보이는 이른바 ‘궂은일’들이다. 새로 부임한 리더가 이런 일을 특정인에게 던지는 순간, 조직엔 “굴러온 돌이 우리를 부려 먹는다”는 저항 기류가 형성된다.

이때 리더는 두 가지를 즉시 실행해야 한다. 첫째, 과거의 처리 방식을 복기하는 것이다. 만약 이전부터 특정 한 명에게 이런 잡무가 쏠려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그 직원의 자존감과 성과를 갉아먹는 독이 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일시적으로 ‘순번제’를 도입하거나 업무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는 등 리더가 직접 시스템을 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회색지대 업무에 대한 ‘보상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건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이지만, 팀 전체의 흐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분기에 이 일을 맡아주는 대신, 다음 프로젝트 배정이나 교육 기회에서 우선권을 주겠다”는 식으로 명확한 메리트를 약속해야 한다. 1번 항목에서 언급했듯, 이 역시 연말 평가에서 ‘조직 기여도’ 항목으로 확실히 보상받아야 한다. 리더가 회색지대의 일을 ‘버려지는 시간’이 아닌 ‘팀을 위한 헌신’으로 공식 인정해 줄 때, 구성원들은 비로소 리더의 진정성을 믿고 기꺼이 손을 보태기 시작한다.


3. “잘하는 사람에게 몰아주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요?” (에이스의 역설과 페어링 전략)

리더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이 바로 ‘에이스 몰아주기’다. 당장의 성과가 급하니 검증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전형적인 ‘에이스의 역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일을 잘할수록 업무가 가중되어 에이스는 번아웃(Burn-out)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해 도태되는 악순환이다. 결국 조직 전체의 역량은 에이스 한 명의 컨디션에 좌우되는 위태로운 상태가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페어링(Pairing) 전략’이다. 업무를 통째로 넘기는 대신 ‘기획-운영’ 혹은 ‘설계-실행’으로 단계를 나누어 에이스와 주니어를 한 팀으로 묶는 방식이다. 에이스에게는 주니어를 가이드하며 업무 부하를 덜 수 있는 ‘러닝 메이트’를 붙여주고, 주니어에게는 실전 업무를 통해 에이스의 노하우를 흡수할 수 있는 OJT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업무 배분을 넘어, 조직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리더의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다. 리더는 에이스의 짐을 덜어줌과 동시에 ‘제2의 에이스’를 길러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상사와 협의하여 ‘업무 자체’를 제대로 받아오기 (리더의 필터링과 방패막이 역할)

금요일 오후 5시 50분, 상사로부터 갑자기 떨어지는 긴급 업무 앞에서 많은 리더들이 무력감을 느낀다. 팀원들에게 업무지시하자니 욕을 먹을 것 같고, 혼자 감당하자니 독박 야근이 뻔하다. 대개 착한 리더들은 후자를 택하며 “팀원들까지 고생할 필요 있나? 나만 고생하고 말지”라고 자위한다. 하지만 이는 리더로서 직무유기다. 회사가 당신에게 관리자라는 직함을 준 목적은 ‘고급 실무 지원’이 아니라, 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조직 관리’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 팀장이 실무를 놓을 순 없지만 그게 독박 실무를 의미하진 않는다.

제대로 위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사로부터 업무를 ‘제대로 받아오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 상사가 일을 던질 때 그 배경과 시급성, 가용 자원을 가능하면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협의하는 ‘필터링’ 과정이 필수적이다. “지금 팀원들이 A 프로젝트에 몰입 중이라 이 건을 수행하려면 마감 기한을 조절하거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가 상사 앞에서 무조건 ‘Yes’를 외치는 순간, 팀의 위임 체계는 붕괴된다. 팀원들에게 일을 나눠주기 전에, 상사로부터 팀의 에너지를 보호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먼저 수행하라. 그것이 리더가 팀원들에게 신뢰를 얻고, 위임의 권위를 세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에필로그: 완벽주의라는 감옥에서 나오기

후배에게 OO에 관련된 기획을 온전히 맡겼을 때, 내 후배는 나의 기대치보다 훨씬 부족한 초안을 들고 왔다. 그는 입사한지 얼마 안되는 사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 후배에게 당장 뺏어서 내가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대신 옆에 앉혀두고 몇 시간 동안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개선된 두 번째 기획안에선 검토 시간이 기존보다 절반으로 줄었고, 세 번째에는 거의 손댈 것이 없었다. 그게 투자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 그 후배는 우리 회사에서 Stand alone하면서 꽤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후배도 가끔 차 한잔을 할 때 그 당시 얘기를 하곤 한다. 이른바 시다바리성 업무가 아닌 머리를 제대로 쓰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회사원"으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모멘텀이 되었다고......

예전의 리더는 정답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리더는 팀원과 함께 답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이건 내가 해야 직성이 풀려요"라는 말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자물쇠와 같다.

당신이 모든 걸 혼자 하면 팀원들은 언제 성장할까? 완벽주의라는 감옥의 문을 열고 나와라. 혼자 모든 걸 잘하는 사람보다, 팀원을 성장시키는 사람이 훨씬 더 멀리, 그리고 오래 간다.


다음 15회에서는 "일잘러가 실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다룬다. 일도 나눴고, 팀도 잘 돌아가는데 실수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수 회복의 기술, 함께 알아보자.

매거진의 이전글맙소사! 월급 루팡이 과로보다 더 괴로울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