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趣向)에 대하여

나를 이루는 것들

by 성현
경향신문에 기고된 작가 하미나 씨의 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어서, 좋아질 때까지 좋아하다 보면 정말로 그 좋음을 누릴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나는 '아직 내가 아닌 것들'을 선망하면서 나를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을 촌스러워하진 않았다.

취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이때의 자부심이란 허영심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발 담가보며 구축해 온 뾰족한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 행위, 향기들로 꽉 채워진 온전한 나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남들한테 장점 한 가지씩 배워서 나라는 사람을 구축해 왔고,

좋아하다 보면 결국 내 것이 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끈기가 생기고 취향이 만들어졌다.

내가 선망하던 것들은 ‘고작 이따위의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작은 습관 하나조차 기대 이상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는 중이기에..

이분의 글이 공감되면서도 공감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까지 돈이 드는 취미를 원해오지 않았어서일까?

하미나 씨는 이상향의 끝에 허망함이 있었던 걸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조차 점점 계급화되어가고

마음 울적한 날에 향기로운 칵테일에 취하는 것조차 돈이 드는 이 세상에서!

돈이 없으면 즐길 수 없는 것들이 즐비하다.

소위 비싼 취미라 불리는 것들 말고,

(오히려 이것들은 즐거움 이후에 더 큰 공허가 찾아오는 것 같다)

사소한 것들 중에서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취향을 채택한다.

돈을 써야 한다면, 돈으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나를 꽤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가성비 취향'이 좋은 것 같다.


하미나 씨가 말한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이상향을 찾는 사람.

그 끝에 발견한 이상향이 별 게 아니더라도..

헤맨 만큼 내 땅이라는 말처럼,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유의미하다 생각한다.

너무 큰 자유 앞에서도 불안한 게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동질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본질을 찾고 진리를 되새기고.. 향기 나는 사람, 흐릿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취향은 필수적이다.

서점에 있던 퍼스널 브랜딩 같은 시류를 따라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취향은 나를 드러낼 수 있는 + 스스로를 알아갈 수 있는 수단임에 틀림없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항상 그때의 내가 생각하길,

‘멋진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일정한 추구미가 있었다.

(지금도 물론이고.)

그 방향대로 변하려 하다 보니 정말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게 참 신기하다.

말하는 대로, 쓰는 대로, 생각한 대로 되는 사람 < 너무 멋지지 않은가?

(이걸 느끼다 보면 내가 뭘 말하고 써야 할지 매우 망설이게 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취향은 이정표가 되어 나를 이끌었다.

변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취향도 자연스럽게 변화했고,

그것을 향유하다 보니 더 많은 것들이 가지치기되어 내 옆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에게 취향은 하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삶을 공부하는 '수단' 같은 거다. 이것저것 탐구하고, 그러다 내 것이 되면 잘 돌보고.

질리게 되면 놓아주고 다른 것을 궁금해하는 일련의 '과정'들인 거다.


취향의 한자 뜻을 보면 앞선 말이 명확해진다.

취향은 '뜻 취(趣)'와 '향할 향(向)'을 쓴다.

즉,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취향을 동경해서 마음이 쏠릴 수도, 그것이 멋있어 보여서 무작정 따라 하고 싶을 수도,

아니면 정말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이 내 취향일 수 있다.

의도와 상관없이 이끌리는 방향이 곧 나의 취향이다.


취향이 꼭 현재진행형일 필요도 없다.

과거의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가 현재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가 누리다 포기한 것, 누리고자 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어느새 내가 걸어온 길 뒤에 방점이 찍혀있고 그것들이 나를 이룬다.

내가 현재 누리지 않더라도, 이전에 누렸고 앞으로 갈망하는 것들이

나의 사고방식과 말투, 분위기, 몸짓을 결정한다.


정리하자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취향의 시작점은 딱히 명확해야 하고 투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 허영심에 가득 차 독서를 시작했듯,

연합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어 무턱대고 들어간 사진 동아리에서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게 되었듯,

잠자는 게 좋다 보니 asmr을 10년 넘게 듣게 되었듯..

어떠한 동기로 취향이 시작되었든 간에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나 싶다.

내가 현재 그것에 만족하고 누리고 있다면 의도와 상관없이 나를 이루는 것이다.


둘째, 이상이 내 생각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해도, 허무해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동경했던 취향을 누리게 된 이후, 그 취향이 '고작'이라는 말에 적합한 것 같더라도

그러한 불일치는 나를 더 뾰족하게 하고 오히려 좋고 싫음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

또 다른 취향이 되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는 게 좋아 보여서 따라 했다가 그것이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내가 그저 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척'하는 연습을 해온 것을 깨달았다면.

얻게 된 와인에 대한 취향과 술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그 자리에 두고,

나는 또 나만의 것을 찾으러 떠나면 된다.

내가 얻은 와인에 대한 취향이 가지치기처럼 뻗어나가서

음식과 와인의 조합을 이리저리 바꿔보며 즐길 수도 있고,

있어 보이는 것을 따라 하는 내가 싫었다면 진정성 있는 것들에 시선이 갈 수 있다.


오로지 나를 위함이 아닌, 그들을 좇아 도달한 지점이라 하더라도

그만큼의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나만의 취향대로 삶을 이루는 게 더 어렵다 생각한다.

타인과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설계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세상과의 접촉에서 타인을 배제할 수 있겠는가.

좋아 보이는 것을 이것저것 따라 해본 과정은 분명 당신 어딘가에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 두었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내 감각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이게 좋은가 저게 좋은가 남들의 말에 의지한다.

심지어는 나에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타인의 취향을 궁금해하고, 나와 다르다면 그것을 이해하려 해 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취향보다 그의 것이 좋다고 느껴지면 똑같이 따라 해 본다.

그렇게 다양한 것들을 맛보고 시도해 보면서 점점 호불호가 분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고집이 세지고 사람이 뾰족해진다.


내가 취향을 만들어 가는 과정엔 '정답'이랄게 없다.

누리고 변화하고 가끔은 변덕스럽게 원래의 취향을 택하지 않기도 하며

취향에 자유를 둔다.


물론 허무한 것도 있다.

좋아 보여서 따라 했던 모습들이 안 좋은 시선을 받게 한 적도 있다.

시니컬함은 생각보다 주변인들에게 날 선 반응을 느끼게 했고,

선호에 대한 고집 있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변하고 보니 알게 되는 것도 있다.

내가 생각하던 게 별 것 아니라는 것도, 고작 이뿐이었다는 것도,

결국 온전한 내 것이 아니라 남들을 따라 하고자 했던 억지 취향이었던 것도 경험해 봐야 안다.


그리고 나는 후자가 더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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