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인연 더 귀하게
“짓궂은 친구들 있으면 알려주세요.”
온화한 미소가 ‘이 사람은 틀림없이 외유내강형 사람이다.’라는 확신을 주는 단발머리 과장이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다. 금연상담을 받으러 오는 친구들이 대부분 이십 대 초반의 남성이다 보니 소수가 시도하는 짓궂은 장난이 걱정되어서 보인 배려다.
상담하러 오는 친구들이 아들처럼 보인다. 병원 로비에서 똑같은 회색 운동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장난치고 까부는 모습을 유심히 본다. 머지않아 내 아들도 저러고 있겠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내 아들의 가까운 미래를 엿보다니 범상치 않은 인연이다.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가 인연이라고 착각하는 것뿐 인연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비슷한 성향과 학력과 직업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동선이 겹칠 확률이 높은 것을 인연이라고 믿는 거라고 생각한다. 맘에 들어했던 우리 학교 여학생을 학교 도서관에서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광장시장에 앉아 빈대떡을 먹고 있는데 별안간 옆자리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는 킬리안 음바페와 눈이 마주치는 정도는 되어야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를 우연히 만났다면?
그건 그냥 '우연'이다.
그런데 그 '우연'이 반복된다면?
어쩌면 상대가 당신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있는 과정이다. 상대가 마음에 들거나 그 정성이 마음에 든다면 만남을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오백 겁의 인연이 있어야 이생에 옷깃 한 번 스친다고 한다. 긴 시간과 인연을 '겁'이라고 표현하는데 '한 겁'을 설명하는 표현이 몇 가지 있다.
1. 천년에 한 번 지상에 내려온 선녀가 치맛자락을 스쳐 큰 바위가 모두 닿아 없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
2. 한 방울씩 떨어지는 지붕의 낙숫물이 집채만 한 바위를 뚫는 시간
3. 잠자리가 날갯짓으로 바윗돌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시간
4. 43억 2천만 년
'무한' 만큼이나 가늠이 되지 않는 시간이다. 43억 2천만 년 전에 내 전생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긴 하지만.
전생에 오백 겁의 인연을 쌓아야 이생에서 옷깃 한 번 스치는 인연으로 만난다는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재미 삼아 적어본다.
1천 겁의 인연은 한 나라에 태어난다.
2천 겁의 인연은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한다.
3천 겁의 인연은 하룻밤을 한 집에서 잔다.
4천 겁은 한 민족으로 태어난다.
5천 겁은 한 동네에 태어난다.
6천 겁은 하룻밤 같이 동침을 한다.
7천 겁은 부부가 된다.
8천 겁은 부모 자식이 된다.
9천 겁은 형제자매가 된다.
1만 겁은 스승과 제자가 된다.
군대에는 다양한 젊음이 전국에서 모인다. 자라온 환경, 집안, 학력, 취향, 생김새가 다양한 친구들이 한 부대에 모여 같은 목적을 위해 조율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 된다. 모두 귀한 인연이고 시의적절한 인연인 것이다.
군대 내에서는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다. 노트북도 반입이 금지다. USB를 꽂는 즉시 어디로 불려 가 혼날지 모른다. 군 병원 컴퓨터로 작성한 문서는 외부로 반출이 되지 않으니 쉬는 시간 짬짬이 글을 쓸 수도 없다. 상담하러 아무도 오지 않으면 독서를 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면 아무리 흥미진진한 책이라도 내려가는 눈꺼풀을 막을 수 없다. 천하장사도 내려가는 눈꺼풀은 들어 올리지 못한다고 했다. 눈꺼풀이 내려갈 즈음 방문해 주는 친구들은 오늘 나의 귀인이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성장의 계기가 된다. 동기나 선임 따라 금연 상담하러 오는 친구들이 있다. 이 친구들에게 금연 생각 있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없다고 한다. 그것도 절대 없다고 한다. 금연클리닉 방문한 김에 금연해 보자고 하면 질색은 하지만 옆에 동기가 “야, 너도 해!” 한마디에 등록카드도 작성하고 하루 동안 금연하겠다고 다짐도 한다.
“좋은 친구네요. 좋은 거 권하는 이런 친구가 귀인인데.” 이렇게 말해주면 나보고 관상도 보냐고 묻는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겐 '인연', '귀인'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관상가=점쟁이'와 동일시되는 모양이다.
짓궂은 장난도 마냥 귀엽기만 한데 상담하러 온 친구들 중 단 한 명도 무례하거나 불쾌한 언행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수줍어하거나 조심스러워했다. 또는 발랄하거나 유쾌했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어서 젠틀하고 조심스러웠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젊고 예뻤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이중적인 언행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앞과 뒤를 일치시켜 본인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라고 귀띔해주고 싶다.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사람, 나를 귀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은 귀인이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부부의 연이나 부모 자식의 연보다도 깊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귀인을 만난다고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귀인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다. 쾌락과 유흥이 언제나 더 강하기 때문에 대체로 귀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귀인과의 만남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가꾸어 나갈 마음의 준비를 한 자들의 선택이다. 좋은 인연을 알아볼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고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 곁에 있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꾼다면 그 인연은 더 귀한 인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연마다 정해진 기한이 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있고 잠시 머물다 가는 인연이 있다. 다툼이나 갈등이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멀어지는 인연이 있고 정성을 쏟고 공을 들였음에도 끝내 떠나는 인연이 있다.
보내야 하는 인연이라면 보내고 흘러가는 인연이라면 흐르게 두는 편이 낫다. 저 멀리서 새로운 인연이 오고 있다. 이왕이면 잠시나마 내 곁에 머물렀던 인연이니 행복을 빌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