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와 만둣국을 시켰더니

일산 시장 칼만둣국

by 비단구름
사장 맘대로 끓인 만둣국을 먹으며 오해가 풀릴 줄이야!


전날 사두었던 크루아상과 당근 케이크와 단호박 샐러드를 진하게 끓인 베트남 커피와 먹고 있을 때 케이가 물었다. “시장은 몇 시에 갈까?” 오늘은 어머니 기일이었다. “강아지 산책을 시켜야 하니 점심 먹고 가는 편이 낫겠지?” 시간을 확인하며 내가 말했다. “가는 김에 시장 갈 때마다 줄이 늘어서 있는 순대 국밥집에서 간단하게 점심 먹는 건 어때?” 케이가 물었다.


한 시쯤 케이와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화가 마음이 상하는 방향으로 가볍게 튀어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채로 시장에 도착했을 때 시장 주차장 일이 층은 이미 만석이었다. 우리는 삼층에 차를 세우고 다리가 쑥 빠져버릴 것 같은 철계단을 내려왔다. 순대 국밥집이 가까워질 즈음 케이가 배를 문지르며 변덕을 부렸다.

“아침 먹은 게 소화가 안됐어. 배가 안 고픈데.”

“나도 안 먹어도 돼.” 마침 나도 밥맛이 나지 않았다.

“자기 배고프잖아. 먹어야지.” 마음이라고는 여린 케이가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입맛도 없으면서 끼니를 때워야 한다는 강박에 잡힌 우리는 ‘뭐 먹어야지.’, ‘안 먹어도 되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며 설 대목을 앞두고도 한산한 시장 골목을 배회했다.


시장에는 식당이 많지 않았다. 몇 개 있는 식당은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우리는 시장 골목을 두 바퀴쯤 돌다가 낡디낡은 간판만 봐서는 만두만 파는 가게인지 식당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작고 낡은 식당 앞에 홀린 듯 섰다.


식당 유리문 너머로 실내엔 술에 잔뜩 취한 듯 얼굴이 벌건 남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데는 좀 그런가?” 케이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말했다. 만취한 것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와 좁은 공간에 있는 이미지가 선뜻 그려지지 않았다. “상관없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는 케이에게 말했다.


스르륵, 우리가 조심스럽게 여닫이문을 밀고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훑는 호기심 어린 눈빛이 느껴졌다. 가게 안에는 둥근 철제 테이블 네 개가 있었다. 술 취한 남자는 친구와 모서리 쪽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의 옆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볼에 김치만두소가 수북이 싸여 있었다. 아기 같아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마주 앉아 부지런히 만두를 빚고 있었다.


“자리 있어요?”라고 묻자 중년 여자 사장이 방금 누군가 먹고 나간 것 같은 테이블을 빠르게 치워 주었다. 나는 멀뚱히 서서 사장이 테이블 위의 빈 그릇과 까맣게 그을린 냄비와 수저들을 치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며 케이는 냅킨을 뽑아 테이블 위의 남은 물기들을 닦았다.

“나는 칼국수.”

“나는 만둣국.”

주문을 받은 사장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장이 문 닫는 것을 잊자 만두를 빚던 여자가 일어나 문을 닫고 다시 앉아 만두를 빚었다.


“만두 잘 빚는 걸 보니 시집 잘 가겠어.”

술에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만두 빚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딸도 만두 좋아하는데. 우리 딸한테도 만두 빚는 거 좀 도와줘라.”

남자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저는 여기 안 살아요.”

남자의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여자의 손은 쉴 새 없이 만두를 빚었다.

“엄마는 어디 가셨냐?”

남자가 유리문 밖을 한 번 힐끔 보며 여자의 어깨를 툭, 건드리자 여자가 어깨를 움찔했다.

“칼국수 사러 가신 모양이에요.”


여자의 대답을 듣고 나는 괜히 번거롭게 했구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나저나 주문한 칼국수와 만둣국은 언제쯤 먹을 수 있으려나, 할 즈음 사장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큼지막한 두부 한 모가 들려 있었다. 얼른 두부집에 가서 사 왔다고 했다. 그녀는 두부를 듬성듬성 썰더니 작은 접시에 담아 김치와 함께 내왔다.


우리가 두부김치를 맛보는 사이 그녀는 식당 밖의 가스에 냄비를 올려놓고 본격적으로 칼국수와 만둣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온 김치는 땅속 김장독에서 막 꺼내 방금 썬 듯한 김장김치 맛이 났다. 단맛이 덜하고 젓갈 향이 은은하게 배어나면서도 쌉싸름하여 올해 맛본 김치 중 가장 맛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한 김치였다. 숟가락으로 흰쌀밥을 듬뿍 떠 그 위에 한 점 딱 올려 먹고 싶은 아삭한 겨울의 맛과 그녀가 썰어준 따뜻한 두부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나는 맞은편 테이블의 만두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런 김치로 만든 만두는 틀림없이 맛있을 거야. 만두도 사갈까?”

우리는 어느새 만두로 일심동체가 되어 있었다.


사장이 칼국수와 만둣국을 내왔다. 커다란 전골냄비에 함께 내온 칼만둣국이 신박했다. 우리는 분명 칼국수와 만둣국을 주문했는데 함께 끓여버릴 줄이야! 누가 이렇게 같이 끓여달라고 했어요,라고 불평하지 않은 까닭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것 같은 사장의 투박한 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에선 이런 식의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이들 삶에 대한 존중 같았다. 그리고 재밌었다. 그리고, 맛있었다.


“만두가 맛있어요.”

나는 사장에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은 칼국수 시키는데 우리 집에서는 만둣국 시켜야 돼요. 만두도 크고 맛있고.”

사장이 말했다.

“다 맛있지만 특히 만두가 최고지!”

옆 테이블의 남자가 큰 소리로 거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끓여 내온 만둣국의 국물은 담백하고 간이 적절해 숟가락이 자꾸 갔다. 세련된 만둣국은 아니지만 훌륭한 손맛을 지닌 친구네 엄마가 차려주신 밥 같았다. 옆 테이블의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떨구고선 만둣국을 먹는 내내 우리를 노려보는 바람에 고개를 들 때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가 우리를 관찰하도록 두었다. 음식을 반 정도 먹었을 때 남자가 일어나 다가오더니 굵은 가래떡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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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 봐요. 아주 맛있어.”

거절할 틈도 없이 남자가 노릇하게 구운 가래떡을 테이블에 놓고 갔다. 바로 옆 조그만 화로에선 석쇠에 가래떡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고맙습니다.”

남자가 곧 다시 다가와 시럽이 담긴 종지를 놓고 갔다.

“여기 찍어 먹으면 맛있어요.”

은근히 구워지는 가래떡의 구수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여자 한 명이 합류하여 만두 빚는 여자는 셋이 되었다. 나이 지긋한 여자가 만두를 빚다 별안간 소리쳤다. “가래떡 타는 냄새나! 뒤집어!”


칼만둣국을 먹으며 케이가 천장을 가리켰다. 크리스마스트리 전구가 반원으로 물결무늬를 그리며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총총하게 매달려 있는 꼬마전구에서 뿜어내는 은은한 노란빛으로 가게 안은 별 바다를 이루었다.


“야, 설거지 좀 하라니까!”

친구가 남자를 다그쳤다. 두 남자는 어지간히 친한 모양인지 그들의 대화는 다투는 것 같기도 놀리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저러다 싸우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시장이 활성화가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시장이 시장이나 좀 활성화시켰으면 좋겠어.”

남자가 나름의 언어유희를 구사했다.

“여기는 말이야 먹거리가 부족해. 떡볶이 같은 거 말이야.”

“떡볶이를 왜 먹는데?”

남자가 되묻자 친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장 오면 말이야, 떡볶이도 사 먹고 순대도 먹고 어묵도 먹고 그러는 거야. 근데 여긴 그런 데가 없잖아. 너는 그런 것도 모르니까 암말 말고 설거지나 해.”

나는 설맞이 장을 크리스마스까지 인증하라던 화장실 입구에 붙어 있는 시장 활성 포스터를 떠올렸다.


“우리 누나네 가게에요.”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뜬금없이 씩, 웃었다.

“가래떡 맛있지요?”

남자가 물었다.

“예, 맛있습니다.”

케이와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더 먹어요.”

남자가 몇 번이고 권했다.

“괜찮습니다. 배가 너무 불러서요.”

우리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허기진 상태라면 화로에 구운 가래떡을 몇 개라도 먹었을 테지만 사장이 푸짐하게 끓여준 만둣국 덕분에 한 개 이상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음 고운 케이가 결단을 내렸다.


“한 개만 싸주십시오.”

남자가 몹시 만족스럽다는 듯 활짝 웃으며 가래떡을 싸주었다. 방금 전까지 남자와 으르렁대던 친구가 거들었다.

“이게 말이지 한 개에 삼천 원은 받아야 되는 거예요.”

“예, 정말 맛있습니다.”

우리는 투박해 보이지만 인심 좋은 사장과 대야 가득한 만두소를 군말 없이 만두로 빚어내는 천사처럼 고운 딸과 친구끼리 닮는다더니 똑같이 선한 빛의 친구가 속을 푸짐하게 채워 넣고 꾹꾹 눌러 곱게 빚은 만두를 이 인분 포장했다.

“냉동실에 바로 넣으면 되죠?”

“냉동실에 넣어둔 만두는 먹기 전에 미리 꺼내 놔요. 냉장고에 하루 전에 넣어 놔도 괜찮아요. 그래야 안 터져요.”

사장이 만두를 담아주며 알려주었다.


늦은 밤 나른하게 퍼진 몸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들이었어. 멋모르고 움칫, 했던 것이 미안할 만큼.” 나는 나를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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