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_메밀전병

웃다 보면 1일 1 행복

by 비단구름

생각해 보니 대단한 날은 아니지만 눈이 부신 날들을 살아가고 있었다. 돌 지난 아이 손을 잡고 공원에 나가 버스가 멈출 때마다 유심히 보면서 퇴근하는 케이를 기다리던 시절, 버스에서 내리는 아빠를 보고 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어가고 그런 아이를 보고 활짝 웃는 케이를 보며 나도 함께 웃던 시간들. 그렇게 눈이 부셨던 날들을 내 마음속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본다.


아빠를 향해 좋아서 뛰어가던 아이들은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케이는 차를 가지고 다녀 더 이상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정류장에 마중 나갈 일이 없다. 편리함을 얻은 대신 소소한 낭만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데 강원도로 외근을 간 케이에게 전화가 왔다.


“왜?”

“그냥, 날도 더운데 집에만 있기 갑갑하지 않아?”

“괜찮은데.”

“어디 바람 쐬러 갔다 와.”

“나가 봐야 돈만 쓰지.”

그러자 케이가 웃었다.

“인생 별거 있나. 돈도 쓰고 그러는 거지.”

“난 괜찮은데.”

“자기 좋아하는 메밀전병 샀어.”

“전병? 좋지!”

“이따 가지고 갈게. 근데 날이 더워서 저녁까지 괜찮을까?”

“생 무채 들어가니까 괜찮을 거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 주고 사다 주는 케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메밀전병을 좋아하는데 서울에선 강원도식 메밀전병을 먹기가 힘들다. 서울에서 파는 메밀전병은 겉을 바삭하게 튀긴 것이 김치만두를 구워놓은 것 같다. 시장 할머니들이 무채만 넣고 설설 굴려 만든 겉이 촉촉하고 안은 살짝 매콤한 메밀전병은 강원도에 가야 구할 수 있다.


어떤 마음일까? 메밀전병을 살 때 케이는.


케이에게 연애편지와 이벤트와 명품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케이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안다. 케이는 틈틈이 꾸준히 한결같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 가보고 싶은 장소, 필요한 것, 해보고 싶은 것은 놓치지 않고 챙겨줬다. 지나가는 말이어서, 분위기에 취해 한 말이었을 뿐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기억해 놓고 세심하게 챙겼다.


연애편지와 이벤트와 명품을 갖고 싶다고 하면 해주기 위해 마음을 쓸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연애편지와 이벤트, 명품 중 그 어느 것에도 설레지 않는다. 먹지도 못하는 것보다는 먹는 것이 좋고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고 넘쳐 간수하는데 애를 먹이는 것보다는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작년에 종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마지막 회 대사를 가끔 생각한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아무 의미 없는 하루하루 같아도, 특별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아름답다. 어떤 이의 삶이든 말이다.


누구에게나 눈부신 날이 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괴롭다면 바로 지금 털어버리기 위해 시도해 보는 게 어떨까. 힘들었던 지난날도 돌이켜보면 눈이 부신 날이었다는 걸, 바로 오늘이 눈이 부신 날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오늘의 가치가 달라 보이고 이전과는 다른 행복이 찾아온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but today is a gift. That’s why it’s called the present.”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보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오늘 하루도 그저 그런 날이고 별 대단한 거 없는 날이지만 오늘이 바로 그 눈이 부신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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