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시작되는 관계
▣ 호칭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학교 다닐 때, 결혼하기 전에 친구들은 나를 구름아,라고 불렀다.
회사를 다닐 때는 또래 친구들과 언니들에게는 구름아, 후배들에게는 구름 언니, 그 외에는 비단구름 씨라고 불렸다.
나보다 조금 윗세대는 김 양, 미스 리 같은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김 양이라던가, 미스 리 같은 호칭으로 여직원을 부르는 것이 지양되어 내가 회사를 다닐 때에는 구름 씨라고 불렸다.
결혼 전에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학교 다닐 때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직장을 다닐 때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이름이 없어지는 경험을 한다.
금비 엄마!
금조 엄마!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들 사이에서 금비 엄마, 금조 엄마라고 불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이 위주로 생활하며 사람을 만나다 보니 나는 구름 씨가 아니라 금비 엄마 또는 금조 엄마로 존재했다.
엄마가 되면 아이 위주로 기억을 해야 편한 모양이었다.
서로 그러기로 약속한 거처럼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면 아이 이름으로 불렀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지 신기했다.
모성이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 아무나 부를 수 없는 이름
그러던 어느 학부모 모임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어느 날 몹시 신선한 제안을 했다.
결혼하면 이름 대신 ‘○○엄마’로 불리는 것이 싫다며 이름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을 하다니, 그녀가 참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먼저 혁신적인 제안을 한 그녀가 참 쿨하다고 생각했다.
모임 회원들은 단번에 그러자고 동의했다.
그리곤 금비 엄마나 금조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 구름아,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임의 막내인 나는 그녀들에게 ○○야,라고 부를 수 없었다.
○○ 씨라고 부르는 것도 안 되는 거였다.
이름을 부르자고 그녀들이 먼저 제안해놓고, 나는 ‘언니’ 외에 그녀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연장자에게 ○○엄마, 라고 부르는 것도 암묵적으로 금기되었다.
자기들이 먼저 이름 부르자 해놓고.
결혼하면 아이 이름으로 불리는 거 싫다며, 이름 부르자 해놓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처럼,
아가씨 때처럼 이름을 부르자는 그녀들의 이름을 나는 부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금비 엄마, 금조 엄마로 불려야 하는 것이었다.
▣ 이름으로 시작되는 관계
각 동에는 직능단체가 있다.
직능단체의 공식적인 호칭은 위원이다.
직능단체 활동을 하는 동안은 서로를 위원님이라고 부르도록 권장된다.
하지만 활동을 시작하고 몇 차례 모임을 하고 나면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끼리 무슨 위원이야. 그냥 이름 부르자.”
‘그럼 나는?’
‘언니’라고 불러야 할까?
‘오빠’라고 불러야 할까?
‘형’이라고 불러야 할까?
‘누나’라고 불러야 할까?
밥을 같이 먹는 사이도 아니고, 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도 아니고, 동네 친구도 아니고, 같이 놀러 다니는 사이도 아닌데?
그들은 나에게 구름 씨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 씨’라고 부를 수 없다.
‘언니’ 또는 ‘위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자기들이 먼저 이름 부르자 해놓고.
편하게 이름 부르자 해놓고선 ‘○○ 씨’라고 불러,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격식 따지는 거 싫다면서 더 확실하게 선을 그어버린다.
노력의 결과를 옆으로 나열하지 않고 수직으로 세우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노력과 상관없는 것들, 날 때부터 정해진 것들까지 서열을 매긴다. 호칭으로.
쿨함이라는 것도 연장자의 특권인 걸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론 쿨함이라는 것은 연장자의 것이었다.
연장자의 허락 없인 쿨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존중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이 있는 반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서열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다.
정작 쿨하지 않은 사회적관습, 나이, 역할의 쿨한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 조직 속 그들만의 쿨한 세상에서 그들만이 세상 좋아졌다며 쿨하게 만족하며 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