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우리 아파트의 경비가 전면 교체된 것은 몇 년 전쯤이다.
경비원의 인건비 상승에 대한 부담으로 인근 아파트 단지들 중 빠른 곳은 진즉에 각 동에 배치되었던 경비를 무인경비 시스템으로 전환했고, 우리 아파트 단지는 두어 번인가 ‘경비 유지 vs 무인경비시스템 설치’에 관한 투표를 하며 경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건비 상승에 더해 경비 업무와 관리 업무를 구분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경비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 청소 미화 보조, 분리수거, 관리사무소의 일반 업무 보조와 같은 업무를 경비원에게 부담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대당 부담되는 경비원의 인건비 상승에 부담을 느낀다는 민원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렇게 버티다 몇 년 전 입주민 투표에서 경비를 무인 경비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마지막이 되어버린 무인 경비 시스템 교체 투표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모든 공동 현관에는 무인 경비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무인 경비 시스템을 설치하면 보안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와 인건비 상승 및 경비업무 분장 사이에서 결국 우리 아파트도 가성비를 선택했다.
경비원들이 동에 딸려있는 경비초소에서 근무하셔서 오다가다 자주 뵙다 보니 나는 경비원에게 인사를 하는 편이다.
아파트 경비원들 중에는 왕년에 은행 지점장 하시던 분도 있고, 회사 임원이었던 분도 있다고 한다.
다들 인생의 화양연화 열두 번쯤은 누려본 이들이라는 소문을 들어서라기보단, 그저 1-2평 정도 되는 경비초소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 심정, 입주민들에게 깍듯하게 대하시는 심정, 화양연화 열두 번을 누려본 만큼 험하고 서러운 일 모두 경험해 봤을 그들이 삶을 대하는 대수롭지 않음에 대한 존중이다.
무인 경비 시스템으로 교체되기 전까지 근무하셨던 경비원은 내가 이 아파트에 입주하기 훨씬 전부터 근무하시고 계셨다.
그는 입주민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며 입주민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버지뻘인 분이 자식뻘인 나에게까지 공손하게 인사를 하셔서 "아, 예." 하며 나도 모르게 공손하게 수그려지곤 했다.
그는 금조를 예뻐하셨는데 초등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금조를 보시면 경비초소 창문으로 요구르트를 한 개씩 주시곤 하셨다.
무인 경비 시스템으로 교체되고 새로운 경비원이 등장했다.(엄밀히 따지면 그는 경비원이 아닌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에 각 동마다 경비원이 배치되었던 거에 비하면 그는 두 동을 관리하는데 주로 우리 동 경비초소에 계신다.
그를 위해 세대가 부담하는 비용은 예전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하는 일은 예전과 많이 비슷하다.
단지 화단의 잡초제거, 낙엽 청소, 수목 관수, 단지 내 쓰레기 수거, 제설작업, 재활용품 분리배출 감시 및 정리, 재활용품 반출확인, 재활용품 반출 후 주변 정리, 대형 폐기물 스티커 관리, 주차관리, 불법주차 감시, 장애인 주차구역 주차 감시, 외부차량 출입 통제, 택배보관, 도난, 화재, 위험 발생 방지, 순찰, 방법, CCTV 감시, 외부인 출입관리, 심야시간 등의 위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긴급업무 등.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아파트 경비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일흔 전후쯤 되어 보이고 약간 마른 체형, 안경을 쓰고 있다.
예전에 근무했던 경비원이 입주민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스스럼없이 다가가 친근함을 나누던 것에 비해 그는 입주민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 적도 있는데 그는 인사를 받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는 늘 우리 단지 주변을 걸어 다녔다.
내가 밖을 나갈 때마다 그를 마주칠 정도로 그는 우리 동과 옆 동 주위를 부지런히 누비고 있었다.
어느 아침 케이와 산책을 나갔는데 단지 옆 샛길에 들어섰을 때 멀리서 그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출근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를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는 경비 유니폼을 입고 단지를 누비던 그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는 짙은 색도 아니고 옅은 색도 아닌 중간 톤의 회색 베레모를 비스듬히 눌러썼다.
베레모를 쓰고 셔츠를 단정히 여미고, 면바지에 받쳐 입었는데 키가 크지는 않은데 날씬하고 팔다리가 길어서 멀리서 걸어오는데 눈에 띄었다.
예술가 같기도 영국 신사 같기도 한 그는 경비 유니폼을 입고 목장갑을 끼고선 재활용 분리수거 박스를 정리하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는 듯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옷차림에 잔잔한 격조를 풍기며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단지의 종문에 달려 있는 샛길은 둘이 동시에 지나치려면 서로 배려를 해야 부딪치지 않을 만큼 넉넉하지 않은 길이므로 나는 그가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네, 안녕하세요.” 하고 지나갔다.
며칠이 지나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재활용 분리수거 날이 되었다.
일주일 동안 모은 분리수거 용품을 가지고 분리수거장으로 갔더니 며칠 전엔 영국 공작 같았던 경비원이 오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니폼에 목장갑을 끼고선 분리수거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건넸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다음, 나는 그에게 저번에 뵀을 때 참 근사했다고, 스몰토크를 시도해 볼까, 했으나, 그만두었다.
말을 걸려면 사람을 불러야 하는데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경비님?
경비 아저씨?
여보세요?
경비원 1, 경비원 2, 경비원 3...?
경비원 A 씨, 경비원 B 씨, 경비원 C 씨...?
5년 전에 근무했던 경비, 10년 전에 근무했던 경비, 작년까지 근무했던 경비...?
아저씨???
이름을 부르는 대신 ‘경비’라고 부르는 것은 공장의 부품 같은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기분이 든다. 이름을 부르는 대신 대충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아파트의 번거로운 일들을 처리해 주는 사람을 성의 없이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말을 거는 대신 종이류와 플라스틱과 잡병과 스티로폼과 비닐류를 차례차례 넣어야 할 곳에 넣었다.
어찌 보면 말을 걸 필요도 없고, 말없이 할 일만 하면 되는 세상이 된 것은 편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게 정말 좋은 걸까, 생각하면서.
학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금조가 경비초소 앞을 지날 때마다 창문을 열고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 주시던, 몇 년 전부터 몇 년 전까지 꽤 오래 근무했던 경비원의 이름도 모르지 않은가. 그의 얼굴을 꽤 오래 기억했는데 이름을 몰라서 그런가 이제는 그의 얼굴도 점점 희미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