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호칭 정리 좀 해줬으면 좋겠다.
▣ 누가 호칭 정리 좀 해줬으면 좋겠다.
몇 달 전부터 집 근처 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날마다 오고 가는 인원이 다르긴 하지만 대게 대여섯 또는 예닐곱 명의 봉사자들이 도시락 포장을 한다.
봉사활동을 한지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왕따냐고?
그건 아니다.
은따냐고?
그것도 아니다.
도시락 포장하면서 봉사자들은 소소하게 스몰토크를 나눈다.
심지어 단톡방도 있다.
스몰토크는 어떻게 하느냐고?
음, 그냥, 겉도는 이야기들을 얘기한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고, 집에 가서 기억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스브레이킹처럼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분위기를 약간 부드럽게 만져줄 정도의 가벼운 이야기들.
그냥 누군가 얘기하면 대충 누군가 듣는다.
듣는 사람을 특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얘기를 하면 듣고 있던 누군가 중 한 명이 적당히 대답을 하는 스몰토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물어볼 거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확인할 거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예를 들면
“오늘 도시락은 몇 개인가요?”,
“뚜껑 덮을까요?”,
“가방에 넣을까요?” 등을 음, 그냥, 눈 마주치면 얘기한다.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데 신기하게 대화가 이어진다.
물론 깊은 대화는 아니다.
기억에 남을만한 대화도 아니다.
그저 시간을 때우는 가벼운 대화다.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데 신기하게 도시락 가방이 착착 채워지고 일이 된다.
신기하다.
▣ 복지사 대신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호칭을 부르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때는 조직에서다.(조직에서는 호칭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직에서 상대적으로 나이 어린 사람은 호칭이 그나마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보호 장치가 된다.
복지관의 20대 사회 복지사에게 ‘복지사님’이라는 호칭마저 없다면 그녀보다 마흔, 오십, 육십 세쯤 나이 많은 연장자들이 ○○야,라고 바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심지어 경험이 많은 봉사자들이 복지사를 가르치려 들 수도 있어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는 것을 넘어 업무 진행이 방해받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복지사님”이라는 호칭이 그녀의 역할과 복지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역할을 구분해 준다.
복지사를 ‘복지사님’이라고 부른다. 이름 대신에.
▣ 사회복무요원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복지관에는 사회복무요원들도 있다.
봉사자들은 사회복무요원들과 함께 도시락 포장을 한다.
복지사는 ‘복지사’라는 직함이라도 가지고 있어 그나마 복지사라고 부르면 되는데 함께 봉사를 하는 사회복무요원들은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나이 어린 사람을 대할 때는 한결 심플한 면이 있다.
이름을 부르면 되니까.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나이 어린 사람에게 ○○야,라고 이름만 부르는 대신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닌데, 매주 보는데, 금비, 금조 또래의 사회복무요원들에게 ○○씨라고 부르는 것도 한편으론 어색하다.
그렇다고 ○○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영 이상하다.
아들 같다고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야,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이상하다. 다 이상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아들 또래인 사회복무요원들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되도록 말을 걸지 않는다.
▣ 자식이 수십 명은 되는 것 같다.
복지관 사회복무요원들이 어쩌다 나를 부를 때는 뭐라고 하느냐.
놀랍게도 깍듯하게 “어머님.”이라고 부른다.
아들이 또 늘어난 기분이다.
나 40대인데.
아직 50도 안됐는데.
불과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오십 대는 조부모가 되었긴 하지만.
그들로선 자기네 엄마 또래인 나에게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최선의 매너 있는 호칭이었을 것이다.
‘어머님’과 ‘어머니’는 어감이 약간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나더러 “어머님”이라고 깍듯하게 호칭하는 사회복무요원들이 고맙고 귀여우면서도 이거보다 적절한 호칭은 없을까, 고민해본다. 어머님 대신에.
“어머니?”
“이모님?”
“고모님?”
“누님?”
“누나?”
“아줌마?”
“아주머니?”
“선생님?”
“저기요?”
이상해. 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
나 역시도 우리 엄마 또래의 연장자들에게 “어머님”이라든가, “이모님” 외엔 딱히 달리 부를 호칭이 없어 “어머님”이라거나, “이모”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이런 호칭들로 불리는 것엔 적응이 되지 않는다.
더 좋은 게 없을까, 생각해본다.
더 나은 게 없을까, 생각해본다.
이건 어떤 거 같은지?
“구름씨?”
“구름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이름을 불러도 될까?
▣ 80대 친구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함께 도시락을 포장하는 봉사자들의 연령구성은 다양하다.
나, 40대.
A 50대
B 60대
C 70대
D 80대
70대인 C는 나와 같은 항렬이다.
같은 항렬인지 알아본 이유는 집안 남자들이 이름에 같은 돌림자를 쓴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항렬 같은 거 따지지 않는 분위기지만 우리 집안에서 항렬은 현재에도 꽤 유효하다.
막내 할아버지, 둘째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로 이어온 듯한 우리 집은 항렬이 높은 편이다.
정년퇴직을 하신 예순 넘은 조카님께서 사십 대인 나에게 아주머니라고 부르거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같은 항렬 친척들께 형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는 일은 집안에서 당연하다. 나이가 같다고 할머니 자식과 내가 형제가 되는 건 아니고,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고 언니 아들이 나더러 누나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거니까.
같은 돌림자를 쓰는 70대 C는 나에게 언니이다.
나는 그녀를 언니라 불러야 한다.
70 대 C가 언니니까 60대 B도 당연히 언니, 나랑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50대 A도 당연히 언니.
이제 80대 D가 남았다.
가끔 A, B, C가 D에게 언니라 부르는 걸 확인.
그럼 나도 70대 C를 언니라 부르는 김에 80대 D도 언니라 부르는 건.....
이게 맞는 거야?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 사항은 80대 D의 딸이 나와 동갑이라고 D께서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D 에겐
“어머님?”
“어머니?”
무난하게 “선생님?”
“어르신?”
“아줌마”라고 할 수도 없고, “할머니”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봉사자님이라고 정 없게 부를 수도 없고.
누가 호칭 정리 좀 해줬으면.
▣ 친구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같은 복지관에서 매주 같은 요일에 만나 취약계층 노인들을 위해 도시락을 정성껏 담고 있다.
도시락을 담으면서 누군가, “맛있게 드셨으면.”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그녀들의 나이가 오십이건, 육십이건, 칠십이건, 팔십이건, 마음속으로 그녀들을 벗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던데 좋은 일로 만난 20대 사회복무요원들도,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복지사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름을 부르면 되는데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기가 쉽지 않다.
○○씨,
○○야,
○○님?
아님 성까지 다 붙여서 ○○○?
○○○! 하고 부르면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렇게나 쉽지 않다.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언제부턴가 친밀하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이름을 부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 같다.
역시, 친해지거나 거리를 두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것인가.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무난한 호칭은 없는 것인가.
이름을 부를 수는 없는 것인가.
서로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노인과 청년이 친구가 될 수 있겠어.
서로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사장님과 기사님이 친구가 될 수 있겠어.
서로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선생님과 학생이 친구가 될 수 있겠어.
친구는커녕, 동료라도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