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나게 해서 미안
우리 동네 공원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아파트 단지 오십 여개 동을 가로 세로로 가로지르며 이어져 있어 누구에게든 아지트이자 안식처 노릇을 톡톡히 한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멍, 하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곳. 십칠 층에 사는 노인도 이십이 층에 사는 아이 엄마도 아침 일과를 마치면 공원으로 나와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겨울이 물러난 자리에 봄의 여신이 다가와 가늘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꽃봉오리를 터치하니 공원은 더욱 화사했다. 공원 여기저기서 땅 속의 생명이 깨어나 다채로운 빛깔이 어제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날과 대조되는 오월이었다.
나는 밝고 환한 햇빛을 받은 공원의 꽃들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걷고 있었다. 가끔 여신의 전령 같은 봄바람이 후, 하고 공원길을 날쌔게 지나갔는데 그 바람에 어린 꽃잎들이 살랑거리고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하늘로 사뿐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곁에서 함께 걷던 여자와 특별할 것 없는 이런저런 근황을 얘기하며 동네를 돌기에 딱 적당한 걷기 좋은 날 오후였다.
공원길의 여러 갈래 중 한 갈래로 방향을 틀어 앞으로 가는데 저 멀리에서 화사한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커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커플과의 거리는 서서히 좁혀져 급기야 커플과의 거리가 십여 미터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그제야 커플이 대화를 나누던 것이 아니라 다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단발머리 여자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린 채 높은 언성으로 퍼붓고 있었고 머리카락이 새카만 남자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커플이 서 있는 자리 왼편으로 삼 미터쯤에는 동네 사랑방 노릇을 하는 아담한 카페가 있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낸 여자들 모임으로 카페 안의 여덟 개 테이블은 전부 차 있었고 야외 테이블엔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따사로운 평일 낮 카페의 야외 테이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년 남성 세 명과 벤치에 앉아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중년 여성들, 그 앞에서 다투고 있는 커플의 모습이 천재화가의 정밀하게 구도처럼 평화로운 주거지 공원 풍경과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며 화폭에 담기고 있었다. 커플 곁을 돌아서 지나갈 모양으로 한 발자국 더 떼는데 이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남자가 별안간 주먹으로 여자 얼굴을 가격했다. 남자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여자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너 이 자식, 엄마를 때려!”
물음이지 외침인지 모호하게 내뿜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나와 지인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는 세 명의 남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 곧바로 달려 나와 상황을 정리해 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세 명의 남자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 일어서지 않았다. 셋 모두 매우 신중한 타입인 모양이었다.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야단인지 걱정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톤으로 우리에게 소리쳤다.
“보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112에 전화하고 경찰이 당도할 때까지 모자는 그 자리에 발바닥이 붙은 듯 꿈쩍 않고 있었다.
“어떻게 엄마를 때려! 이 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여자가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했다. 미세한 침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봄의 여신의 손끝에서 피어난 어린 꽃잎에 닿자 어린 꽃잎이 고개를 떨궜다.
자세히 보니 이제 겨우 중학교 삼 학년쯤 되었을, 아니면 많아봐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아이는 엄마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가만히 서있었다.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거릴 뿐‘엄마는 뭘 잘했는데?’와 같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여자의 입에서 중간중간 ‘학원’, ‘네 아빠’와 같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자의 흥분은 멈추질 않고 점점 더 격앙되어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을 기세로 울분을 토로하며 남자를 원망했기에 ‘엄마라고 하지 않았었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여자가 악다구니를 치는 동안 아이는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꽉 쥔 두 주먹이 덜덜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십여 분 후 경찰이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세 명의 남자도 일어나 다가와 이랬다 저랬다 사건 경위를 설명하며 여자를 거들었다. 한 명이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동안 다른 남자들이 어떻게 엄마를 때리냐고, 나쁜 녀석이라고 아이에게 한 마디씩 타박했다. 아이는 여전히 거친 숨을 쉬며 두 주먹을 쥐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이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 여자에게도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권유한 뒤 모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세 명의 남자는 야외 테이블에 돌아가 앉아 담소를 이어갔다.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년 여성들은 바로 앞에 미사일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것처럼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유모차에 뉘인 아기와 눈을 맞추며 공원 반대편으로 갔던 아기 엄마는 여전히 유모차에 누운 아기와 눈을 맞추며 걸어오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알록달록한 꽃으로 가득한 공원길의 해프닝이 조화롭게 마무리되고 다시 풍요롭고 활기가 넘치는 파티의 오찬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것은 이 동네에서 너무 당연했다.
나란히 걷는 모자의 모습이 공원의 꽃길을 벗어나 화폭에서 멀어져 갔다. 빠른 걸음으로 앞장선 엄마를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 걷는 아이의 거대하고 어두운 등짝과 얼핏 보이는 아이의 검붉은 얼굴의 색채가 화단에 정갈하게 피어있는 꽃들의 밝은 색채와 만들어내는 오묘한 대조는 풍요로운 동네 분위기를 아름답게 담아낸 화폭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
수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불쑥불쑥 내 앞에 나타난다. 흥분한 두 사람이 함께 집에 들어가도 괜찮은 건지, 둘은 이제 괜찮아졌는지, 내내 마음이 쓰인다. 아이가 잘했다고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때리는 사람은 때릴 만한 이유가 있고 맞는 사람은 맞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현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아이의 분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다.
"아이야, 아프게 해서 미안. 분노하게 해서 미안. 외롭게 해서 미안. 우리 모두 잘못했어.”
‘우리 모두의 책임’이 누구의 책임도 아니게 되어 버린 무책임한 사회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상처에 책임 소재를 묻는다면 우리 모두 일말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봄의 여신이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를 어제 일처럼 또렷하고 강렬하게 매일 눈앞에 펼쳐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