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좌절하지 말기를

꽃들에게 희망을

by 비단구름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각각의 세대는 할 말이 많다.

해방둥이 부모 세대는 일제 치하를 경험했다. 나라 잃은 서러움은 겪어보지 않고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둥이 세대는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집도 가난, 국가도 가난했다. 쌀 구경을 하지 못해 초록 색 풀 뜯어다 밀가루 넣고 한 솥 풀죽을 쑤었으나 그것마저 여러 식구 입에 풀칠하기에는 부족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어딜 가든 사람이 많았다. 인권이라는 개념을 들어본 적이 없이 공장의 소모품이 되었다. 국가 발전을 위한 부속 정도의 취급을 받으며 일했다.


86세대(60년대 출생, 80년대 학번)는 민주화를 얻어내기 위해 싸웠다. 눈물 콧물 빼던 최루탄 가스의 지독함을 몸이 기억한다.


97세대(70년대 출생, 90년대 학번)는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기업들이 도산했다. 비정규직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한국이 망한 것 같은 뉴스가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태어났을 땐 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었고, 선진국이었고, 부유했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져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코리아'를 아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고 한국 사람 좋다고 엄지를 추켜올린다.


세계의 청년들이 K-POP을 따라 부르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 영화들은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 이십 년 전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어느 외국인이 로레알 화장품을 보여주며 “너네 나라도 이거 있니?”라고 물었던 것에 비하면 이십여 년 만에 천지가 몇 번이고 개벽을 한 셈이다.

이렇게 부유한 나라,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나라에 태어났으니 우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세계 2위 수준의 여권 파워가 있는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누구도 부럽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위기도 있었지만 내려가기보단 계속 올라가고 있었으니 어깨춤이라도 추어야 하는 것이다.




2023년 한국의 청년들은 어느 세대 못지않게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고민한다. 한국사회는 풍요로워진 만큼 돈, 권력, 학벌, 외모, 직업, 배경, 든든한 집안 등 필요한 것이 많아졌다. 매일 부단히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시대, 우리는 모두 허하다.


전례 없는 시간과 지독한 노력을 쏟아 부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기란 쉽지 않다. 어차피 비율제로 나눠지는 자리싸움 끝에 얻을 수 있는 최상위 자리는 한정적이며 소수이다. 한숨 고르기도 전에 나보다 똑똑한 사람, 나보다 근사한 사람, 나보다 집안 좋은 사람, 나보다 돈 많은 사람, 나보다 잘생긴 사람,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타난다. 이제 좀 무언가를 해낸 것 같은데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불안이 꿈속까지 쫓아온다.



“도대체 이놈의 공부 언제까지 해야 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자격시험,

어학시험,

승진시험

다시 자격증

이직 시험

퇴직 후 생존을 위해 다시 자격증

도대체 언제 쉬어?”


“누가 너더러 그렇게 공부하래든?

눈 똑바로 뜨고 봐.

귀 쫑긋 세우고 들어.

마음 문 활짝 열어 놓아야 해.

그게 살아있는 배움이야.”



속된 말로 피똥 싸서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은 자리 유지하려면 피똥 쏟아지는 노력을 평생 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상승이 어렵다며 헬조선, 흑수저, 금수저와 같은 씁쓸한 신조어로 너와 나를 조롱한다.


지금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신이 공평하게 나누어 준 젊은 시간의 특권이고 나를 존중하는 방법이다. 기회와 노력에 대한 보상이 빨리빨리 이루어지면 인생이 좀 덜 고단할 텐데 피땀 흘렸던 시간에 대한 보상은 바로바로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하다.


그래도 급하게 좌절하지 말기를. 일찌감치 포기하지 말기를. 보상은 인생 전반에 걸쳐 어느 때고 나타난다. 유쾌하고 시원시원한 박막례 할머니는 만만하지 않은 생활을 견디어 낸 내공으로 칠십에 유튜브 스타가 되었다, 근사한 신사 같은 김칠두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순댓국집을 운영하다 환갑 넘어 시니어 모델로 인생을 즐기고 있다. 평생 평범한 주부로 살다 어느 날 훌쩍 떠난 중국의 쑤 민 할머니는 SNS 스타가 되어 많은 중국 여성들에게 해방감과 용기를 주었고 공익광고 모델이 되었다.


돈, 권력, 학벌, 외모, 직업, 배경, 든든한 집안이 있으면 빠르게 고속도로를 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핸들을 단단히 붙잡고 어깨와 뒷목이 뻣뻣하도록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멋진 풍광을 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뒤차들에게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 내내 쫓긴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 속 애벌레들은 높을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생의 목표이다. 아래쪽에 있는 애벌레들은 보이지도 않는 끝을 향해 부지런히 위로 향한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고, 밀치고, 떨어진다. 애벌레들은 생의 종착점을 향해 위만 보고 높이 올라가지만 맨 꼭대기의 애벌레만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꼭대기에 다다른 애벌레도, 아직 출발 못한 애벌레도, 올라가다 떨어진 애벌레도, 올라가다 포기한 애벌레도 모두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


인생에서 돈과 성공으로 가는 속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 먼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업을 구하고 자동차를 사고 멋진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산 이들은 아주 조금 먼저 도달한 나비일 뿐이다. 그러니 급하게 좌절하지 말기를. 일찌감치 포기하지 말기를.


군중에서 잠시 멀어져, 가짜 판에서 나와, 광풍의 돌풍에 휩쓸리지 말고 긴 여정을 위해 한숨 고르기를. 불안해하지 말고 느긋해지기를.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나는 아름다운 나비라는, 자부심을 갖기를.



keyword
이전 09화공원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