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회 [자발적 사랑]
나에게는 일정 시간에 일정량의 수면을 해주어야 하는 ‘수면 총량의 법칙’이 있다.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들은 새벽 네 시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지만 나는 그 경지에 이르려면 멀었다. 수면이 틀어지면 다음날 하루 종일 멍하고 피곤하고 맥을 못 추다 결국 낮잠을 자게 되고 그 밤엔 어김없이 불면으로 시달린다. 불면으로 시달리는 밤에는 어김없이 희주가 나타난다. 엄마를 닮아 숏 컷이 잘 어울리는 희주가 리본 헤어밴드를 하고 상큼하게 웃고 있다. 춤추는 걸 좋아하는 희주가 비를 맞으며 밤새도록 춤을 추다 아침 해가 밝아오면 고개를 푹 숙이고 실망한 표정을 나에게 두고 떠난다.
밖이 아직 어둡다. 다섯 시면 환하게 빛나던 여름 아침이 물러나고 있다. 무더운 여름에는 코로나가 종식될 거라던 예상을 비웃고 코로나는 더욱 확산되고 있는 추세라 야외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다섯 시 반까지 더 자보려고 침대에 붙어서 안간힘을 써보았는데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창밖 세상이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도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의 카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침으로 에그 샐러드를 넣은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
잠이 부족해 입맛이 없는 하리가 먹고 싶다는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냉장고에서 달걀을 여덟 개 꺼내 삶았다. 삼수를 하고 있지만 공부하느라 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둠칫둠칫 몸을 흔드는 걸 좋아해 댄서가 될 줄 알았던 하리는 밤늦게까지 세상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계란을 삶는 동안 타이머를 맞춰 놓고 벌써 멍해지고 있는 몸을 그대로 소파에 눕히고 멍, 하고 있는데 벌써 십 분이 지났는지 타이머가 울렸다. 짧은 사이에 깜박 잠이 든 나는 유체 이탈된 몸을 일으켰다. 계란을 까고 있는데 이 새벽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지 뒤통수가 뜨겁다. 뒤를 돌아보니 계란 냄새를 맡은 마추가 스핑크스 자세로 앉아 나를 보고 있다.
“여덟 개의 계란 중 한 개는 네 몫이야. 하지만 산책 갔다 와서 줄게. 네가 이 말을 알아들었으면 좋겠어.”
일곱 개의 계란을 으깨고 마요네즈를 뿌리고 식빵에 발라 샌드위치를 만들었더니 씻고 나온 하군이 식탁 위에 놓인 샌드위치를 보고 좋아한다. 창문을 열었더니 빗소리가 들렸다. 날씨 정보를 확인하니 시간대별로 종일 비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빗방울이 먼지를 씻어내기라도 하듯 초미세먼지는 보통이다. 깜깜한 바깥 풍경을 짧게 보고 창문을 닫자마자 씻고 나온 하군이 온 집안의 창문을 열어젖힌다.
“지금 비 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주방 창문을 연 하군이 앞 베란다로 가 베란다 문도 활짝 열었다. 금요일이라 홀짝, 홀짝 다니는 하군의 움직임이 어딘가 가벼워 보인다. 옷도 입지 않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고 있는 하군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는 식탁에 요구르트를 꺼내 올려놓았다.
“다음 주에 워크숍 가.”
요구르트 껍데기를 벗기며 하군이 말했다.
“워크숍? 어디로?”
“몰라. 그건 아직 안 나왔어. 다음 주쯤 알게 되겠지.”
“워크숍 장소를 어째서 매번 알려주지 않는 거야?”
“그럼 그걸 알려줘?”
답을 하고 싶지 않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되묻기다. 이런 소모적인 거로 싸우고 싶지 않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이런 말장난 같은 말대꾸는 종종 과거일까지 전부 소환해 버리는 큰 다툼이 되곤 한다.
신발을 신던 하군이 물었다.
“비 오나?”
“응, 비와.”
현관문을 연 하군이 홱, 몸을 돌려 손바닥을 활짝 펴고 손을 흔들더니 우산은 내버려 두고 돌격, 앞으로! 하며 일터로 뛰쳐나갔다. 확실히 귀가 예전 같지 않은 하군이 나간 뒤 창문을 닫기 위해 베란다에 가서 섰다. 날이 밝아지는 아파트 주차장 바닥이 물기 하나 없이 뽀송하다. 벌써 말랐나? 눈에 힘을 주어 빗줄기를 찾았다. 동체시력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은 이렇게 해야 빗줄기가 보인다.
어?
비가 안 온다. 난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마음의 소리?
사로와 농구를 하다 허리를 삐끗한 하군은 요즘 아침마다 누워서 양말을 신고 삐그덕 거리는 허리로 어기적거리며 용케 출근하고 대단한 귀소본능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압도적인 차이로 지고 있는 와중에 지금, 슛을 해야겠다,라는 결심이 들어 슛을 쏘려고 점프를 부웅, 하고 샥, 착지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지.”
하군이 무릎을 굽히고 오랑우탄만큼 긴 팔을 허공으로 뻗으며 우스꽝스러운 슛폼을 몸소 보여주었다.
“온몸의 근육들-살덩이들-이 묵직한 쓰나미처럼 허리를 덮치더라고.”
“그건 점프라고 할 수 없었어.”
곁에서 조용히 사건 경위를 듣고 있던 사로가 하군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내가 보기엔 너는 이제 단 10센티도 공중부양을 하는 것은 무리일뿐더러, 네 한 몸이나 가누기도 영 성치 않아 보여.”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넌 내가 평생 먹여 살릴게. 애들 독립하면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건 일도 아니지.”
고무줄 반바지의 허리춤을 매만지며 하군이 큰소리를 떵떵 친다.
“요즘은 아이들 독립이 쉽게 오지 않는 어려운 세상이야. 게다가 노인 기준 연령을 칠십 세로 상향하고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어.”
“국민연금 수급이 또 늦춰지겠군. 나는 죽을 때까지 일할 모양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런 위험한 운동은 하지 마. 숨만 쉬어도 힘든 세상이잖아.”
허리를 삐끗한 하군은 피부 상피세포마다 감각이라도 달렸는지 윽, 아, 으으으, 와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온 집안을 절뚝거리며 돌아다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출산을 하고 손목엔 뜨거운 물을 엎질러 화상을 입고 요로결석으로 응급실에 간 경험을 한 나에게 어지간한 고통은 견뎌지는 것이다.
요로 결석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잭나이프로 옆구리를 쑤욱, 하고 찔러 넣은 뒤 반 바퀴 돌려 후비는 것 같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예리한 아픔이었다. 이 어메이징 한 요로결석을 처음 맞이했을 때 나는 요로결석이라고는 생각 못하고 처음에는 잠을 잘못 자서 허리가 배긴 거라고 생각하다가, 이상하게 계속 아픈 것을 심상치 않게 여겨 마침내 타이레놀을 먹고 한 나절을 버틴 뒤 ‘제대로 배겼나 보군.’하고 잠이 들었다가, 결국 새벽에 “누가 내 옆구리를 쑤시고 있어!”하고 소리치며 응급실로 직행했다.
의사로부터 요로결석이라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 나나 하군이나 요로결석이라는 병을 몰랐었기 때문에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하군은 내가 심부전증 같은 중병에 걸린 줄 알고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내가 출산을 할 때보다 더 불안하고 초조한 낯빛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항생제를 한꺼번에 잔뜩 맞아서인지 하군의 얼굴이 내가 죽으면 당장 따라 죽을 헛것으로 보였다.)
무려 요로결석을 하루 동안 미련하게 참아낸 나와 달리 오버액션을 잔뜩 끼얹은 엄살을 부려 어떤 아픔이든 언제나 나와는 다소 갭이 큰 고통을 맞이하는 대조적인 행태의 하군을 보고 있노라면 유주얼 서스펙트(1996)의 케빈 스페이시처럼 내 앞에서는 절뚝거리며 걷다가 일터에선 훨훨 날아다닌다든지, 내 앞에서는 왼쪽 어깨를 기우뚱하게 내리고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싸며 걷다가 나 없는 곳에선 고개를 까딱까딱하고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사이코는 아닌지 괴기한 상상을 해본다.
‘사이코 일리가 없지. 빙구 일리는 있어도. 그동안 봐온 빙구 짓이 얼만데.’
혹은 종횡사해(1991)의 주윤발처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아픈 척하며 때를 기다리는 절세 영웅인가, 하며 면밀히 관찰해 보기도 한다.
‘우리 집 영웅이긴 하지, 빙구 같긴 해도. 그동안 얼마나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지면서 가장 노릇하겠다고 불쌍하게 일했는데.’
정작 하군이 저러고 듣기도 싫은 신음 소리를 내며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이겠지) 까닭은 아픈 김에 돌봐달라는 거다. 그러니 엉뚱한 상상과는 별개로 하군이 충분히 엄살을 부리도록 내버려 둔 뒤 몸이 찌뿌둥해져 제 스스로 도저히 아픈 척하는 것이 지겨워질 때까지 아이 다루듯 한껏 잘 돌봐주어야 한다. 몹시 피곤하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병원 가.”
“아니야, 괜찮아.”
민간요법과 자연치료를 선호하는 하군과 달리 의사 선생님이 탯줄을 끊어주어 모체와 분리된 독립된 개체로 세상에 나앉은 사로는 아프면 병원부터 찾아 의사로부터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 비로소 안심하는 병원 신봉주의자다.
“주짓수 하다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충격으로 손목이 살짝 삐끗했어. 병원 가야 될 거 같은데.”
“아니야. 괜찮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어떻게 단정할 수가 있지? 진짜 엄마 맞아?”
“얼굴이 터지도록 널 낳고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고 요로결석으로 응급실에 간 경험을 한 내가 보기에는 죽을 것 같지 않아.”
“진짜야, 너무 아픈데.”
사로가 손목을 감싸며 죽겠다는 듯 인상을 쓴다. 하군의 유전자가 새겨진 세포로 만들어 놓은 사로의 얼굴이 하군 엄살 부릴 때 얼굴과 놀랍도록 똑같다.
“진짜 너무 아프면 너 그러고 못 있어.”
대화를 포기하고 사로가 방문에 설치해 둔 풀업 바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참, 주짓수 관장님이랑 그 수강생이랑 다 음성이래.”
“거 봐. 멀쩡하잖아.”
“아아아악. 으으으윽!”
사로가 양말도 제대로 못 신는 하군에게 갔다. 둘의 표정이 심각하다.
“어디가?”
“병원! 사로 병원 가봐야 되지 않아? 많이 아픈 것 같은데.”
허리 아픈 하군과 빙구 아빠를 두어 행복한 사로는 약 오백 미터 거리에 있는 병원에 걸어가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여 차를 타고 일 킬로미터를 돌아갔다.
“뭐래?”
“엑스레이를 찍어봤는데 의사 선생님이 손목은 괜찮대. 그런데 말이야.”
“근데?”
“아직 소아라 성장판이 활짝 열려있다는데?”
아침마다 턱에 쉐이빙을 바르고 티브이에서 멋진 남자가 광고하는 최신 면도기로 몇 가닥 안 보이는 솜털 같은 수염을 정성껏 면도하고, 목젖이 나오기 시작한 뒤로 쓸데없이 한껏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사로는 손목이 괜찮다는 말보다, 성장판이 활짝 열려있다는 기쁜 소식보다, 소아라고 진단받은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놀릴 것이 생겼다. 그러니까 우리 막둥이 소아라는 거지?
“소아라고? 거 봐! 의사 선생님이 제대로 봤네. 우리 막둥이 엄마 눈에만 아가로 보인 게 아니었구나. 우헤헤헤헤!”
“에휴, 엄마 그만 좀 해."
사로가 또 쓸데없이 청년 폼을 잡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성장판이 활짝 열려 있는 소아라는 진단을 받고 진료비가 사만 원이 넘게 나왔다. 저런 막둥이 자식! 이 빙구 남편!
"병원 간 김에 네 허리도 진료 보지 그랬어."
"그랬다가 입원하라 그러면 어떡해?"
"이참에 쉬는 거지."
"이 사람이, 쉬면 일은 누가 하나?"
하군이야 말로 아픈 게 맞다. 빙구 짓을 하도 하더니만 제 아픈 몸뚱이에 돈 쓰는 걸 아까워하는 불치병에 걸려 버렸다. 하군의 아픈 허리를 보니 내 마음도 괜스레 아프다. 역시, 하군의 아픈 몸뚱이가 하군을 잡아먹지 않도록 하군은 내가 돌봐야 한다.
하군이 나가고 조금 더 자보려고 다시 누웠으나 지난밤에 푹 잤는지 역시 잠을 잘 수가 없다. 하리와 사로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누워 있다가 여섯 시 사십 분쯤 일어나 샤워를 하며 오늘은 좀 그럴싸한 옷을 입기로 했다. 씻고 나오니 누가 이사 가는지 우리 동에 사다리차가 준비 중이다. 나는 계속 여기 살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면 언제 이사 왔는지 모를 낯선 이웃들을 만난다.
마추의 뜻밖의 재주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간식 얻어먹기다. 산책을 하다 간식 냄새를 맡으면 다가가 세상 사랑스러운 얼굴로 빤히 쳐다본다.
“간식 줄까?”
운이 좋은 날은 간식을 획득하기도 한다. 오늘 아침엔 산책을 하는데 공원 평상에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슬픔과 고민 따위 모르는 발랄한 기운이 느껴졌다. 즈그들끼리 웃고 얘기하고 웃고.
마추가 얼굴에 귀여움을 장착하고 평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추가 다가오자 여학생들이 반응했다.
“꺄악! 귀여워!”
남학생들도 싱글벙글하며 마추를 보았다. 그럴 수밖에. 마추가 지금 입을 살짝 헤, 벌리고 미소를 지을락 말락, 눈웃음을 장착한 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들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이다.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인지 코까지 실룩거린다. 이들은 틀림없이 먹을 것을 가지고 있다!
“귀엽다!”
여학생들은 귀엽다! 만 반복해서 외칠 뿐, 정작 마추는 오늘 간식 획득에 실패했다. 호의를 베푸는 일에도 수줍어하는 사람도 있다. 먹고사는 게 늘 쉬운 일은 아니다.
마추가 발을 씻고 나오자마자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로 가서 누웠다. 마추를 따라 나도 소파에 누웠다. 겨우 산책을 했을 뿐인데 지친다. 집에서 일을 하면 좋은 점은 눕고 싶을 때 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눕고 싶을 때 반차를 내야 하겠지.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일어나야 한다.
어제 널어둔 하얀 빨래를 걷어와 소파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오후 글쓰기를 하기 전 커피를 마실까, 하는 소리를 들은 하리가 홍차 어때? 하고 묻는다.
“홍차에 빠져 버렸어.”
홍차를 타며 노래를 부르듯 하리가 말했다. 하리가 타 준 얼그레이가 오후를 여유 가득한 수분으로 채워준다. 라디오에서 izi의 ‘응급실’에 이어 거미의 ‘You are my everything’ 이 가슴을 적신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틀어 놓았는데 질리지 않는다. 밤공부를 위해 하리는 마추를 끌어안고 잠을 자려고 누웠다. 삼수생의 여유로운 오후 낮잠이다. 잠들기 전 "엄마도 이리 와서 누워."라고 음냐음냐, 칭얼거리듯 중얼거리더니 마룻바닥에서 잠들었다. 하리가 잠들자 마추가 빠져나와 볕이 잘 드는 베란다로 가 누웠다. 다 자기 편한 잠자리가 있는 법이다.
“이거 사인해 줘.”
사로가 미적분, 화학∏, 생명∏를 선택한 신청서를 내밀었다.
“엄마 생각은 어때? 잘 선택한 거 같아?”
“모르겠어. 내가 공부하는 것이 아니니. 나라면, 음.”
나라면 쉬운 과목을 선택했을까? 쉬운 것보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로가 대견하다. 말끔하게 면도하는 것이 성적보다 중요한 사로는 기타를 치러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일찌감치 집안 정리를 하기로 했다. 주말을 앞두고 식구들을 위한 나의 배려이자 이벤트이다. 라디오 볼륨을 올리고 청소기를 먼저 돌리고 정리를 시작했다. 날이 차가워지고 있으니 확실한 여름 반팔 티셔츠를 몇 장 집어넣고 여름이지만 서늘한 밤 입을 얇은 긴팔을 꺼냈다. 냉장고에서 불필요한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한 번 보고 가장 제거해야 할 것들을 몇 개 치웠다. 그새 스멀스멀 기어 나와 싱크대 위 공간을 점령한 그릇들이며 스낵, 커피, 티백과 같은 주전부리들도 싹 원래 위치로 돌려보냈다. 쭈그리고 앉아 현관 바닥의 흙먼지를 닦았다. 하군이 바닥의 티끌만 한 흙먼지에 또 한 번 나가자빠지는 것은 곤란하다.
“저녁 먹고 가.”
오후 일곱 시 하군에게 전화했더니 하군이 늦는다고 알려주었다.
“누구랑?”
“말하면 다 알아?”
또다시 질문으로 답하기.
“그래도 나한테 말해줘야지. 내가 와이프인데.”
“직원들하고.”
직원들하고,라고 말하며 하군이 짧게 한숨을 쉰다. 내가 하군을 피곤하게 하는 걸까. 나는 그저 궁금한 것인데.
“어디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여자들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린다. 저 여자들 중 백지영 노래를 부른 여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근처에서. 나도 가 봐야 알아.”
하군의 목소리가 주위를 의식하듯 낮아진다.
“그래, 알았어.”
별달리 할 말이 없는 나는 전화를 끊었다.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 ‘뭐든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런 마음으로 늦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지만 여자들의 웃음소리는 날 내버려 두지 않는다.
샤워를 하고 나온 사로가 축구를 해서 배가 고프다고 했다.
“마니토를 하자는데 좋아하는 애들도 있고 싫어하는 애들도 있는데 어떡하지?”
사로는 아까부터 바쁘다. 아이들의 의견을 다 들어줄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고 꽤 고민이 되는가 보았다.
“아들, 엄마한테도 관심 좀 가져보지?”
“엄마는 우리 없을 때 뭐 해?”
사로가 곧바로 물었다.
“엄마도 일해. 심지어 엄마는 쓰리잡이야. 가사도 하고 우리도 돌보고 글도 쓰잖아.”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하리가 재빨리 대꾸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샤워를 하고 식탁에 앉아 눈을 감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집중한다. 우린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사는 거다. 길을 가다 신을 맞닥뜨리게 되면 신 앞에서 각자 잘못한 몫을 지불하고 가던 길을 가는 거다. 하군의 실수에 대한 정산은 하군이 하는 거다. 노여워할 이유는 없다. 서로에게 노할 자격은 애초에 없는 거다.
“나에게는 사랑할 기회만 있어.”
맑은 날에도 맨몸으로 비를 맞듯 일하는 하군과 치맥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늘은 특별히 불고기 피자도 시켜 푸짐한 TGIF 파티를 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치킨만 시켜야겠군."
쌍화탕 한 병을 꺼내 머그컵에 따른 후 전자레인지에 40초간 돌려 뜨끈뜨끈하게 마시고 자발적 야근을 시작한다. 어디서고 언제고 생각하고 쓰는 것 외에 별 뾰족한 수가 없지만 글을 쓰는 이 순간 오롯이 영혼이 살아있다.
"하군이 비를 맞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일은 무지개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