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회 [옛날 사람의 아이들]
“백지영 노래 부른 여자 때문에 이혼할 거야?”
나의 아픔을 누구보다 속상해하는 은숙이 조용히 물었다.
“희생은 미련한 것일까? 무능한 자들의 변명 같은 것일까?”
나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햇살이 전면 통창으로 담뿍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근심이라곤 만져본 적 없는 환한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벽 세 시에 들어온 하군 와이셔츠 쇄골 부분에 희미하게 묻은 파운데이션 자국을 보고 뭘 하고 놀면 이 자리에 파운데이션이 묻을까, 절망했던 적도 있었지.”
한숨을 쉬는 은숙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성급하지 않아. 그때마다 나는 하나만 생각해. 이 세상에서 내 아이들을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하군 뿐이다.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
“만약 하군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질 거야?”
은숙이 집요하게 채근하며 물었다.
“음, 아쉽긴 하지만, 보내 주어야겠지?”
그래야지. 별 수 있나.
“바라는 바다. 하고?”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맘 떠난 남자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으니까.”
“은숙 씨는?”하고 은숙에게 묻자마자 우리는 칫, 하고 서로 어이없는 웃을 지어 보였다.
“현실이야 말로 막장이지.”
의사 남편이 간호조무사와 바람나는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설정은 은숙의 현실이다. 은숙은 새싹 약국을 페이 약사에게 맡겨두고 잠적해 버린 남편과 내연녀를 찾으러 다녔다. 그들은 천안에 아파트를 구해 살고 있었다. 부인과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살림을 차려버리는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의 무책임함과 잠복하기 위해 같은 단지에 뚝딱 아파트를 구해버리는 돈 같지도 않은 은숙의 돈에 어린 나는 기가 막힐 만큼 놀랐다.
“은숙 씨는 능력도 있고 예쁘고 젊어. 은숙 씨는 자기 약국을 가지고 있는 약사야. 왜 그런 남편한테 집착하는 거야? 은숙 씨 남편은 심지어 남자로서도 별로야. 그런 남자는 잊어버려.”
이런 조언은 숏단발이 동네에서 가장 잘 어울리던 서른넷의 은숙에게 들리지 않았다. 남편이 의대를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한 것에 대한 배신감인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노력인지, 설마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것인지 은숙의 분노만 보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은숙은 정신 나간 여자처럼 펄펄 뛰며 그들을 쫓아다녔다.
임신한 남편의 내연녀를 병원으로 끌고 가 임신 중절을 시켜버렸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은숙을 보며 나는 새싹 약국의 새싹은 관념적 상징으로서의 새싹일 거라고, 봄이 되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연둣빛 자그마한 것들과 마르고 언 땅에서 올라오는 가녀린 푸르스름한 것들은 그저 ‘와, 봄이다.’ 탄성 하면서도 언제든 화난 어른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버릴 수 있는 거라고, 실체로서의 새싹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거라고 곱씹었다.
은숙이 잠시 서울에 올라온 사이 둘은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뒷머리는 까치집을 하고 얼굴에 버짐이 피고 입가엔 침 자국이 허연 채 등원을 하던 은숙의 딸 희주는 생선 비늘처럼 튼 입술을 뜯고 손가락을 빨다 그 꼴을 마뜩잖게 여기던 꽃잎반 선생한테 야단을 맞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은숙이 유치원으로 달려가 꽃잎반 선생의 뺨을 때렸고 선생이 끼고 있던 안경이 바닥으로 나뒹굴었으며 나머지 선생들은 공포에 질려 은숙이 사라질 때까지 교실로 숨어버렸다고 정신 나간 은숙을 대신해 희주를 데리러 갔을 때 원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했다.
“꽃잎반 선생이 희주 어머니를 고소한다는 걸 제가 간신히 말렸어요. 인센티브 명목으로 십만 원이나 줘가면서요. 꽃잎반 담임도 바꾸었고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작은 눈을 한껏 더 가늘게 뜨고 바이올렛 입술로 우는 소리를 하는 원장에게 나는 미안함을 들키지 않는 어른처럼 최대한 밝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희주를 퇴원시킬 수도 없는 거니까요. 희주 어머니가 찬조금을 포함해 방과 후 보육 비용까지 내는 비용이 백만 원이예요. 다른 원아 몇 명분이다 보니 희주가 나가면 운영에 타격이 큽니다. 희주 부모님 직업도 무시할 수 없고요. 원의 수준을 일정하게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남편과 내연녀를 잡으러 전국 방방곡곡을 달리고 있는 은숙을 대신해 희주를 데리러 갈 때마다 원장은 반가운 얼굴로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커피 향이 가득한 원장실로 나를 불러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에게 커다란 갈색 테이블 옆의 누런 미니 냉장고 안에 있는 오렌지 주스를 대접했다. 그것이 셈에 밝은 원장의 영업인지, 순수한 호의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때 미쳐있었지. 딸한테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그렇게 밖에 못해서.”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어두워진 은숙의 얼굴을 비추자 은숙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미안해하지 마.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어쩌면 나도 그랬을지 몰라. 서른넷의 나라면.”
나는 이번에는 공감할 줄 아는 어른처럼 은숙의 고단한 손을 잡고 위로했다.
“내 이상형은 하나였어. 흔들리지 않고 나만 사랑해 주는 사람.”
나는 은숙이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은숙이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학교에 가고, 혼자 책을 읽고, 혼자 걸었다.
“어딘가에 있을 거야.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 역시 평생 한 명만 사랑하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하며 백지영의 ‘사랑 안 해.’를 떠올리고 있었다. 은숙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이상형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거였어. 나는 이제 허황된 꿈을 기대하지 않고 사랑에 시니컬한 어른이 되어 버렸어.”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에 묶인 삐쩍 마르고 앙상한 다리가 긴 강아지가 엎드린 채 지루한 표정으로 베이커리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그린이 강아지에게 다가가자 강아지가 꼬리를 빠르게 흔들며 일어났다. 해그린이 빈 그릇에 사료를 한 컵 붓고 물그릇에 물을 채워 주고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자 강아지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군이 너를 기만하는 게 나아,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 편이 나아?”
집요하고 예리하게 내 가슴을 후비는 은숙의 질문에 나는 답을 하지 못한다.
“가만 보면 무척 잔인한 구석이 있어.”
나는 은숙을 노려보았다.
만약 하군이 바람이 난 거 같으면 제대로 의심하고, 뭐라도 찾으려면 확실히 찾을 각오로 행동을 개시해야겠지. 흥신소에 의뢰하고(흥신소에 의뢰할 돈이 없다) 하군의 핸드폰을 뒤지고(불법이다)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파고(귀찮다) 하군의 이메일을 뒤지고(비번을 모른다) 온갖 번거로움은 다 해내야겠지.
“그런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엔 나는 늙고 지쳤어.”
은숙이 정원에 묶여 안쪽을 바라보고 있는 강아지처럼 마르고 앙상한 팔로 팔짱을 끼었다.
“기력이 딸리고 하루하루 떨어지는 체력만큼 의욕도 없어. 하군의 사랑이건 바람이건 알고 싶지도 않고 찾고 싶지도 않아.”
“때론 모르는 게 약이지.”
은숙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약간 치사하다고 생각해. 가정까지 버려야 할 정도로 바람이 나려면, 이왕이면 좀 더 일찍 그러든가. 젊은 나도 새 출발이라는 것을 꿈꿔 볼 수 있게.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여러 면에서 새 출발은 무리일 거야.”
“아이를 두 명이나 낳은 나이 많고 소득 없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랑은 얼핏 모든 걸 초월한 참사랑 같지만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어리숙하고 불안정한 풋내기의 감정이야. 사랑으로 포장한 달콤한 악마의 고약한 꼬드김이지.”
나는 가여운 은숙의 몹시 억울하다는 불평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늙어버린 나를 버리겠다고 하면, 좀 치사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그럼에도 하군이 헤어지자고 하면, 그래야 하겠지.”
“순순히?”
“응. 순순히.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보아야겠지. 지옥에 빠져 며칠을 사느니 단 며칠이라도 빨리 지옥에서 나와 하루라도 빨리 잊고 싶어. 무엇보다 나는 내 얼굴을 잃고 싶지 않아. 내가 갖고 태어난 나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가꾸며 살고 싶어.”
“넌 나와 달라서 참 다행이야.”
은숙이 미소를 지었다.
“작가에겐 막장보다 더 지독하고 비루한 삶을 아름답게 묘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럼 아무도 읽지 않을 걸. 아름다운 것은 지루하다고 말이야.”
“펜으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살리는 편이 낫잖아, 약간의 조미료를 쳐서 서로 사랑하도록 북돋우고 환각제 같은 마법을 뿌려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두 깨달아 버릴 거야. 여기가 지옥이구나.”
나는 지옥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자,라고 외치며 수십 명씩 죽어가는 대환란의 시대를 상상했다.
“작가에게는 희망의 여지를 항상 남겨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다짐하듯 말하며 나는 해그린이 라테에 도톰하게 그려 넣은 하얀 하트를 마셨다.
“하군과 헤어지면 다른 누군가랑 재혼할 거야?”
은숙이 말 같지도 않은 걸 자꾸 묻는다. 이런 쓸데없는 가정법식 질문으로 듣고 싶은 위안이 틀림없이 있을 거다. 어떤 답을 내놓아야 최근에야 비로소 상처 준 남편과 내연녀를 잊기 시작한 은숙이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놉!”
이건 확실하다. 놉.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던 결혼, 해봤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봤다. 확실히 똥은 아니었지만 오래 묵을수록 참맛이 나는 된장도 아니더라. 더 이상은 사양한다. 귀찮기만 한 연애도.”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은숙이 칫, 하고 짧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어쩐지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대신 얻은 것도 있잖아.”
“설마 아이들?”
“그렇지.”
“옛날 사람. 하하하!”
“맞아. 옛날 사람. 하하!”
우리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헤어지지 못해 살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기분이 지속되고 있어. 어떤 판단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삶의 한 구간을 지나고 있지만 깨달은 것이 있지.”
“뭐지?”
은숙이 물었다.
“글을 쓰는 동안 얼마나 행복한지 말이야. 온갖 스트레스와 잡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나의 세계에 집중하는 동안 이제야 나는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어.”
“웹툰과 유튜브 시대에 글이라니. 정말 옛날 사람.”
우리는 베이커리의 다른 손님들을 신경 쓰지 않고 더 크게 웃었다. 웃다 바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해그린과 눈이 마주쳤다. 저맘때 아이들은 원래 저렇게 예쁜가, 쟤가 예쁜 건가, 나는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연둣빛 해그린을 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