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기회 [취미가 업이 되는 즐거운 상상]
백수가 된 하군은 매일 아침 일곱 시가 되면 넥타이를 매고 새로 산 연한 그레이 재킷을 입고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누가 보면 확실히 직업이 있는 사람처럼 어디론가 나가는데 나가봐야 갈 곳이 없다는 걸 아는 내 눈에는 제 이름 석자만 겨우 쓰는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첫날 제 등짝보다 큰 책가방을 지고 교실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처럼 애잔하다. 도대체 아침마다 어디로 가는 걸까.
혹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서울을 순환 중이신가?
아니면,
어디 공원 벤치에 앉아 이천오백 원짜리 원조 김밥 한 줄에 천칠백 원짜리 맥도널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나?
혹시나 하고,
아무나 붙잡고 무작위로 부탁하러 다니고 있나?
몹시 궁금하지만 하군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을 나에게 들키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일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내가 관심을 가지면 몹시 불편해하니 일단은 지켜보기로 한다. 고민 따윈 혼자 짊어지는 것이 남편 노릇이라고, 아빠 노릇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바보다. 하군이 가고 혼자 아침을 먹으며 오늘 무지개를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좀 쓴다 싶었으나, 어젯밤 은숙에게 “내일 전화할게.”했던 것이 생각나 까먹기 전에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 전화해서 30분쯤 통화했다. 용건 없는 대화, 아무 쓸데없는 대화, 목적 없는 대화를 한참 나눈 것도 모자라 “만나서 얘기하자.”며 단번에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좋다.
마추와 도토리나무 숲을 산책하면서 생각했다.
오후엔,
정리(를)나 하고
청소(를)나 하고
장(을)이나 보고
책(을)이나 읽어야겠다고.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시원한 줄 알았는데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세 명이나 발견할 정도로 햇볕은 뜨거웠고 십 분 정도 걸으니 덥다고 느껴졌다.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중년 여자들이 비닐봉지를 들고 나무 아래 떨어진 도토리를 주우며 도토리나무 숲 구석구석을 훑고 있다.
베이커리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알바를 본 마추가 알바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이 보는 맞추는 눈썹 연장 시술을 한 것처럼 눈썹이 몹시 길고, 곰 발바닥만큼 발이 큰 대발이이고, “쫑이야!”, “바둑아!”, “나비야!”(고양이에게 어울릴 법한 이름임에도)라고 부르고 싶은 대로 마구 불러도 어색하지 않고, 나보다 마추를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동네의 인싸 강아지이다.
“이름이 뭐야?”
알바가 처음 보는 강아지를 대하듯 이름을 물었다. 반짝이는 머리핀이 꽂혀 있는 단정한 머리 대신 부스스하게 일어난 회색 머리카락이 솜사탕처럼 알바 얼굴 주위에 펼쳐져 있다.
“마추예요.”
“마추? 특이한 이름이네. 무슨 뜻이야?”
알바가 입으로 쭈, 쭈 소리를 내며 마추와 눈을 맞추었다.
“마추픽추요.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하지만 음, 제 생각엔 가는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마추픽추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이름이라도 실컷 불러보게 마추라고 불러요.”
나는 알바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알바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왜 못 가. 가면 되지. 아직 살날이 많구먼.”
“휴가라고 해봐야 일주일 뿐이라서요.”
알바가 마추를 귀여워하며 구운 쥐포 채를 한 가닥 주었다. 마추가 맛을 보더니 스핑크스 자세로 알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알바를 빤히 보았다.
“근데 눈썹이 왜 이렇게 길어? 속눈썹 시술했어?”
“원래 이렇게 길어요.”
“길러 주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좀 잘라 주어야 하지 않아? 앞이 안 보일 거 같은데.”
“이게 잘라 준 거예요. 머털 도사 아시죠? 거기 나오는 누덕 도사처럼 눈썹이 원래는 한 십 센티미터쯤 길었는데 좀 잘라주었어요. 근데 이게 또 얘 트레이드마크 같은 거라 너무 짧게는 안 자르고 있어요.”
“그래? 오호, 신기한 강아지네.”
알바가 고개를 갸웃, 갸웃하며 마추를 요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살펴보았다.
“참 예쁜 강아지야. 착하게 생겼어.”
“그래요?”
“착한 영혼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어. 심성은 드러나게 마련이거든. 강아지라고 다를 것 없지.”
“보는 눈은 다들 비슷한가 봐요. 착하게 생겼다는 얘기 많이 들어요.”
“그럴 거야. 만져 봐도 되나?”
“그럼요.”
알바가 마추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귀엽다고 쥐포 채를 더 주었다. 날름날름 받아먹다 보니 네 개나 먹었다. 멀리서 해그린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알바가 소리쳤다.
“아직 한 시 안 됐는데 왜 뛰어? 안 늦었어.”
“그냥 뛰고 싶어서요.”
해그린이 가빠진 숨을 고르고 안으로 들어가 커피와 달콤한 단팥을 넣은 고소한 감사 크루아상을 가지고 나왔다.
해그린이 들어오면 삼십 평 남짓한 가게가 백 평쯤으로 넓어졌다. 해그린이 근무하는 날은 베이커리 테이블이 가득 찼다. 여자 손님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빵을 먹으면서 커피를 먹으면서 흘깃흘깃 해그린의 조그맣고 하얀 얼굴과 가지런히 뻗어나가는 짙은 눈썹 아래 맑은 눈동자를 훔쳐보았다.
“할 말 있어?”
알바가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해그린에게 물었다. 나는 눈이 마주치면 사랑에 빠지고야 말 것 같은 해그린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전부터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오호, 그래? 나한테?”
“사장님한테요. 이름이 알바예요?”
알바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해그린의 순진함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에 가족이랑 미국 여행을 간 적이 있어. 시애틀에 도착해서 LA를 거쳐 뉴욕까지 가는 거대한 일정이었지. 남편이랑 딸이랑 영어로 주문하는데 나는 커피 한 잔 주문하는 것도 떨릴 정도로 나만 영어를 못했어. 창피하더라고.”
“가족인데 창피해요?”
“가족한테 창피한 것이 아니라 나한테 말이야. 그래서 한국 돌아오자마자 딸에게 부탁해서 영어학원에 등록했어.”
“올리브 선생이 참 예뻤어.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리에 단정하게 핀을 꼽아 고정시킨 선생이 칠판 앞에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사처럼 위풍당당했지. 게다가 1 형식과 2 형식 문장을 구분하지 못해도 계속 미소를 지어 주면서 몇 번이고 알려줄 만큼 친절하고 다정한 좋은 선생이었어.”
“지금은 영어 잘하시겠네요?”
“포기했어. 안 되는 것도 있고 안 맞는 것도 있더라. 나는 영어랑 안 맞아. 난 이과거든.”
알바가 후훗,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때 건진 게 하나 있어. 첫 수업에서 영어 선생이 닉네임을 지어보라고 하더라고. 연령대가 다양한 수강생들이 모여 있는 강의실이지만 수업 시간만큼은 누가 위고 아래인지 구분하지 말고 닉네임으로 부르자면서 말이야.”
“영어 학원에선 영어 이름을 많이 부르죠. 대게는.”
“자네도 닉네임이 있나?”
“저는 영어 이름도 그린이에요.”
“그렇겠네. 좋은 이름이야.”
알바가 말했다.
“나는 제시카 알바가 이를 드러내고 시원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반했어. 나도 그렇게 입을 크게 벌리고 보는 사람까지 시원하게 웃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알바라고 불러달라고 했지.”
“제시카... 아니고요?”
해그린이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시카는 너무 길어. 발음도 어렵고. 알바, 간단하잖아?”
“그때부터 알바가 되셨군요.”
알바가 수수께끼를 맞혀서 대견하다는 듯이 손바닥을 탁, 쳤다.
“그렇지! 그리고 말이야, 지금은 영어 못 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아. 대신 다른 취미를 찾았거든. 빵 굽는 거 말이야.”
손님들이 베이커리 안으로 들어갔다. 해그린이 쭈뼛거리더니 초콜릿을 내밀었다.
“얼마 전에 생일이셨죠?”
나는 해그린이 내미는 초콜릿을 받았다. 해그린이 머뭇거리다 손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잘해 봐. 어서.”
알바가 해그린이 사라진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달려오는 남자처럼 투명한 건 없지.”
“해그린은 그저 순수한 사람일 뿐이에요.”
“해그린이 내 별명 따위가 궁금한 줄 알아?”
“알바 별명이 궁금하진 않겠죠.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에요. 확실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맞아. 확실히.”
알바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알바 그거 아세요? 요즘 애들은 사랑도 참 복잡하게 해요. 요즘엔 스킨십을 해도 썸이라네요. 밀당도 당연하다고 하고요. 똑똑한 애들이라 사랑도 치밀하게 재단해요.”
“썸이니 밀당이니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하는 남자는 투명해.”
알바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계속 노크하고 있잖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해.”
알바가 손을 꼭 잡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알바의 갈색 눈동자는 깊은 비밀을 간직한 우물 같았다.
“가서 너의 행복을 찾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알바의 말을 곱씹었다.
나는 십 미터나 자랄 수 있는 엄마를 이십 센티미터 길이의 분재로 만들어 손바닥만 한 화분에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놓은 미끼 같은 존재다. 은숙의 여성 호르몬이 거의 막바지쯤 다다랐을 때 은숙은 썸을 타고 있었다. 은숙은 매일 남산공원에 갔다.
“남산에서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그냥 가만히 걷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야. 예전에 누가 그랬어. 그냥 앉아서 쉬어도 된다고.”
신촌에 있는 경양식 레스토랑의 어두운 실내를 밝혀주는 노란 조명이 은숙의 주름을 당겨주어 열 살쯤 젊어 보였다.
“검정 티셔츠 위에 남색 패딩 조끼, 검정 운동복 바지,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한 칸 건너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었어.”
검정 조끼와 검정 바지를 입은 웨이터가 야채수프와 크림수프를 가져다주었다. 은숙과 나는 루틴처럼 직사각형 테이블 위의 후추를 뿌렸다.
“책을 읽느라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어.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 뒤늦게 깨닫고 보니 휠체어 탄 남자를 밀고 있는 남자가 앞으로 지나가며 말을 붙이고 있었어.”
“은숙 씨한테 말을 건 거야?”
나는 은숙의 걸쭉한 야채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케첩을 물에 탄 시큼하고 달큼한 맛이 혀에 닿았다.
“멍청하게도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의자라고 착각했어. 왜 착각했는가 하면 휠체어를 본 적이 없어서 휠체어가 실제론 훨씬 작다고 상상했기 때문이지. 그래도 그렇지, 의자가 움직일 리가 없잖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안녕하세요,라고 쓴 종이를 붙인 휠체어를 밀면서 남자가 슬로 모션처럼 내 앞을 지나갔지.”
웨이터가 다가와 수프 그릇을 가져가고 곧 빵이 담긴 돈가스와 밥을 곁들인 비프커틀릿을 가져와 테이블 보 위 유리를 올린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멀지 않은 곳에 두 손을 모으고 대기했다. 나는 웨이터가 좀 더 멀리 가서 서 있기를 바랐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둘이 닮은 듯, 형제인 거 같았어. 둘도 가을꽃이 만개한 풍경과 냄새를 꽤 좋아하는지 산책 나온 모양이더라.”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더니.”
은숙이 비프커틀릿을 반으로 잘라 내 접시에 올려 주었다. 나도 돈가스를 잘라 은숙 접시에 올려놓았다. 경양식집에선 감미로운 90년대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쎴지만 사실 알고 있었어. 남자는 며칠 째 매일 내 맞은편 벤치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모른 척했지.”
“그랬어?”
“하지만 결국 휠체어를 탄 형제와 산책을 하는 다정한 남자를 사랑하게 됐지. 삼일 째 머리를 감지 않고 아침 세수도 하지 않아 손으로 쓱 밀면 각질이 밀려 나올 정도로 푸석하고 사막의 모래 알갱이가 덮은 거친 얼굴로 나가다 남자를 의식하고 나선 세수를 하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바르기 시작했어. 묘하게 설레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남자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움직였지. 나 역시 남자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어. 사랑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내심 바랬어. 사랑이라니, 다신 나에게 반하는 남자는 없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벤치에 앉아 있는 나에게 반한 남자라, 생각만으로도 꽤 근사한 일이었어.”
은숙의 볼이 소녀처럼 상기됐다. 나는 은숙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은숙이 말했다.
“남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본 채 고민만 하다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일어났어. 뒤돌아보니 남자가 저만치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어. 나는 알 수 있었어. 사랑하는 남자의 눈빛만큼 투명한 것은 없지.”
“연애하고 싶어?”
“응. 한 번쯤 잘해 보고 싶었어.”
나는 은숙의 눈을 바라봤다.
"올리브는 신이 주신 열매라고 알려져 있어."
은숙의 쓸쓸한 눈동자에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 피어난 올리브가 비췄다.
"사실은 척박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열매를 맺게 한 것은 인간의 의지와 사랑이지. 신의 축복은 그렇게 완성돼."
은숙 씨의 행복을 찾아. 나는 은숙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은숙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나는 겨울이 오기 전 벤치를 호위하듯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의 이파리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이파리가 내 머리 위로, 내가 앉은 벤치 옆자리에, 내 발밑에 사뿐히 안착하는 것을 보면서도 가을이 쓸쓸하지만은 않았어. 그거면 됐어.”
은숙은 마지막 썸남 이야기를 마친 뒤 평안한 얼굴로 깊고 은혜로운 미소를 지었다.
요즘 들어 부쩍 현재와 과거를 혼동하는 알바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마추가 이번에는 식수대 앞으로 가더니 물이 마시고 싶다며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커피 뚜껑에 물을 받아 주었더니 목이 마른 지 급하게 잘 먹었다. 컵 뚜껑이 좁아 물이 콧구멍에 들어가는지 컥컥, 컥컥거리면서, 힉힉, 숨을 고르면서 물을 마셨다. 컵이 작아 일곱 번쯤 리필해 주고서야 갈증이 좀 가셨는지 집으로 향했다.
“저기, 제가 통장을 사용하지 않은 지가 몇 년 되었는데요, 요즘 대포 통장이니 뭐니 해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통장은 정지가 된다던데, 제 것도 정지됐지요?”
집에 돌아오는 길 은행에 들른 김에 직원에게 물었더니 민첩한 손가락 놀림으로 타 다다다, 타이핑을 하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한 사람이네, 하는 눈빛을 보냈다.
“정지 안 됐어요.”
“그래요? 통장에 돈이 별로 없어요. 몇 만 원쯤 있거든요. 그래도 괜찮은가 봐요.”
직원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일 초 정도 보이더니 “고객님 VIP 신데요.”라고 했다.
“VIP요?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돈이 없는데.”
그러자 직원도 고개를 갸웃했는데 지금에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돈이 없다는 엄살을 들으며 잔고를 확인한 직원의 도대체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돈이 있다는 말인가, 황당하다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그럴 만했던 것이, 통장에 무려 삼백만 원이 넘는 거금이 있었다.
“삼백만 원이오?”
직원이 통장 정리를 하고 넘겨준 통장에는 원금을 합해 삼백만 원이 넘는 잔액이 있었고 분기별로 이자가 붙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무려 육백 원 가량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일했던 번역비가 모두 입금된 것이다.
나는 결혼한 후로 줄곧 가내수공업과 같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약간의 수입이 발생한다고 해도 아주 적은 수입인 이상 하군의 기준으로 나는 놀고(먹고) 있는 것이다. 생계를 유지할 만큼 벌어들이지 못하는 활동은 정확하게는 일을 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하군의 생계로서의 경제관념이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70년대에 태어난 여자들은 많이들 그랬다. 강단 있게 일터로 나간 여자들은 “지나고 보니 엄마가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나은 것 같아요. 그래도 아이한테는 엄마가 곁에 있어주어야 하는 것 같아요.”라며 피눈물 나는 수고로운 삶을 죄책감과 바꾸려고 했다.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사회에서 근사한 자리가 있는 여자들과 있는 듯 없는 듯 가정에 머물며 한 듯 안 한 듯한 뒤치다꺼리를 하는 여자들은 서로를 부러워했다. 지독하게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였다. 하리를 남의 손에 맡기기 싫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으니 백 프로 내 의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이와 함께하고 싶었으니 온전히 내 선택이었다. 게다가, 하군에겐 나를 발톱 없는 앞발을 허우적거리며 포효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방구석 호랑이로 만드는 매직월드가 있었다.
“그럼 애는?”
딱 이 두 단어면 되었다. 그뿐이었다. 하군은 새로운 국면에서 언제나 이 질문을 가장 먼저 던졌다. 내가 대학원에 붙었을 때도, 직장에 복귀한다고 했을 때도, 집에서 과외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도. 집에서 말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주말에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하군과 내가 얼마나 바늘과 실, 환상의 짚신짝처럼 찰떡궁합이냐 하면, 하군의 말이 내심 맞는다고 생각한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만두었다. 나는 하리가 어린이집에 가면서는 업종이나 직군을 가리지 않고 하리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하원할 때는 어린이집으로 데리러 갔다.
“넌 좋겠다. 일만 하면 되어서.”
아침 일곱 시에 나가 밤 열 시가 되어 돌아오는 나만큼 보수적인 하군이 아이 등 하원에 신경 쓸리 없었다. 낮 시간에 일을 하든 말든, 아이 케어에 최우선으로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은 나여야 한다는 것만큼은 나나 하군이나 일치했다. 몹시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결정이었지만 아이라는 작고 고약한 사랑에게 뇌를 잠식당하고 마음을 빼앗긴 것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아쉬워한다고 내가 대단한 커리어를 쌓으며 살고 있을 것 같지 않고(나는 꽤 오랫동안 나에게 가스 라이팅을 하고 있다) 후회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다.
중급반 교포 강사와 밀애를 즐기던 곱슬머리 원장의 느끼한 눈빛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시간과 급여가 딱 마음에 들었던 학원을 그만두었다. 만나보진 못했지만 매력 있을 것이 분명한 원장의 부인과 학원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중급반 강사도 모자라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다니, 도대체 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여자를 거느려야 만족한단 말인가, 나는 은숙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했다.
“그깟 돼지 같은 남자 신경 쓰지 말고 네 이익에만 집중해.”
은숙이 애절하게 충고했지만 돼지 곁에 머물며 원장의 만족을 채워줄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은숙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은숙 씨 말을 들을 걸.”
막상 학원을 그만두고 나니 내가 원하는 조건을 다 들어주고 페이를 그만큼이나 지급해 주는 그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벌거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을 주던 괴상한 분위기의 돼지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원장은 나에겐 일종의 귀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출판 번역은 한 건에 몇 백만 원씩 입금되는 것에 반해 기술 번역은 페이지 분량에 따라, 작업 분야에 따라, 난이도에 따라 몇 만 원에서 몇 십만 원까지 입금액이 달랐다. 출판 번역은 한두 달의 기한이 주어지는 반면 기술 번역은 기한이 하루에서 일주일 정도로 짧은 편인데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마치면 비교적 빨리 입금이 되어서 몇 만 원씩 들어오니 가뭄에 소나기 같은 부업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나는 낮에 번역을 했다. 기술 번역의 최고 단점은-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그것이 가진 장점, 즉 마감이 매우 촉박하다는 점이다. 장점이 단점으로 변하기는 손바닥 뒤집듯 참 간단하다. 연애시절 나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세상 참 든든하게 여겨졌던 하군이 결혼 후에도 여전히 돈 어려운 줄 모르고 써대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는 것이다.
번역물을 받으면 하루나 이틀, 길어봐야 며칠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마감을 맞추려면 밤을 새워야 할 만큼 촉박한 속도와의 전쟁이다 보니 번역을 하는 동안 번역 실력보다는 타이핑 실력이 속기사급으로 늘었다. 부족한 어휘력으로 기후 변화, 환경, 수입차 매뉴얼, 수입 업체 매뉴얼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받아 번역하곤 했는데 전문 분야가 아닌 분야까지 번역을 하려다 보니 전문 어휘를 체크하느라 마감 시간이 부족해 날이 밝을 때까지 꼬박 밤을 새워 처음으로 눈에 실핏줄이 터져 보았다.
분량이 되는 것들도 종종 받아 한 번은 매우 긴 번역물을 일주일간 꼬박 매달려 납품하고 ‘이번 달엔 제법 입금이 되겠군.’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회사와 클라이언트 간에 계약서상 오해가 발생하여 번역비 지급이 늦어졌다. 담당 매니저는 시간이 걸린다, 조율하고 있다, 는 말을 할 뿐 번역비 지급이 하염없이 늦어졌고 나중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번역비를 떼인 것이라고 속단했다.
출판 번역이나 문학 작품 번역은 의역을 하기도 하지만 원작자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되고 의역을 하더라도 원작자의 작품을 잘 살려내야 한다. 누군가 써 놓은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기면서 내 안에선 글을 쓰고 싶다는 몽글몽글한 꿈이 생긴 것이 이 무렵이었다.
설거지 거리가 싱크대에 잔뜩 쌓여 있고 하군이 출근할 때 입을 와이셔츠들은 빨래 바구니에 쌓아 놓아 입었던 셔츠를 또 입고 나가게 하면서 납품한 번역비를 떼인 줄 알고 참담한 심정이었던 나는 하군에게 면이 서지 않았다. 입금되지 않은 통장 바닥을 보는 일은 생활비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나에게 자긍심은커녕 ‘뭘 해보려고 해도 정말 잘 안되는구나.’ 하고 아리고 쓰렸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번역비 입금 통장을 회피했다. 입금되지 않은 돈을 확인하지 않는 것이 당시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 달에 약 이백만 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가정했을 때, 점심값, 유류비, 식비, 생활비, 꾸밈비, 대외활동비, 친목 도모비, 품위유지비 등 이것저것 비용을 쓰고도 무려 삼백만 원을 저금한 셈이지.”
이렇게 유치학 말하려던 것이 아닌데. 하군이 구직활동을 하는 동안 사용할 여윳돈이 생겨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데.
“그러네. 대단한걸.”
어쩐 일로 나의 일방적인 무논리에 하군이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상당 부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는 진심의 끄덕임이다.
“게다가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네가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보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단 말이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해주는 하군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으쓱하다. 나더러 베리 임폴턴트 펄슨이라는 끄덕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