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기회 [오드리 헵번처럼]
밤을 알리는 어둑한 바람이 한 뼘쯤 열어둔 창틈으로 들어왔다. 다섯 평 남짓한 방에서 멀지 않은 고요한 도로 위로 오토바이 소리가 지나갔다. 적막함을 떨쳐내기 위해 켜 둔 티브이에서는 남자 탤런트가 핫초코를 타고 있었다.
“저 사람 핫초코 먹는 거 보니까 갑자기 핫초코 먹고 싶어.”
“핫초코 타 줘야겠네.”
하군이 바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집에 핫초코가 있었어?”
“저번에 사놨잖아!”
안방까지 들리도록 주방에서 하군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유에 타면 되지?”
“응. 뜨겁게 해 줘. 핫초코는 뜨거워야 맛있지.”
전자레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하군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핫초코를 들고 침대로 왔다.
“너는 안 마셔?”
“나는 배불러.”
하군이 핫초코를 건네고 침대에 누워 리모컨으로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리 바꿨다. 나는 그런 하군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티브이를 보는 하군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다. 굳게 다문 입술, 티브이 화면에 집중하는 눈빛.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생각과는 달리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걸까. 아무리 읽어 보려 해도 커튼을 쳐버린 하군의 표정은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군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대자 하군이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많이 차네.”
하군이 내 손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내일 뭐 할까?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하군이 물었다.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어떻게 되긴. 그냥 사는 거지.”
하군이 더는 말을 하지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혼자 사는 남자가 뽀얗고 말간 얼굴로 잠에서 일어난 뒤 주방으로 가 아침을 준비했다. 남자가 커튼을 열자 환한 아침 햇살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남자가 베이글에 연어를 올린 오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것을 본 후 티브이를 껐다. 하군이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도 옆으로 돌아누웠다.
다음날 늦잠을 자고 여덟 시가 넘어 거실로 나가보니 하군은 여느 날처럼 여섯 시에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길게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거실 티브이에는 ‘내일을 향해 쏴라.’가 틀어져 있었다.
“바다 보러 갈까? 아니면 서울?”
하군이 내 얼굴을 보더니 반갑게 물었다.
“우리가 한가롭게 놀고먹을 여유가 있어?”
그러자 하군이 씩,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일정을 검색해 봤어. 돈가스 먹으러 갈까? 부암동에 돈가스 맛집이 있다는데.”
“진짜 놀고 싶었구나!”
나는 물컵을 들고 하군 옆에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은 안개인지 미세먼지 분간이 가지 않는 회색빛이었다.
“가서 인사하고 짐만 챙겨서 나올 거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돈가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백석동 길에 차를 주차하고 하군과 함께 비탈진 길을 걸어 내려왔다.
“저거 봐. 햇무리야!”
길을 걸어 내려가던 하군이 하늘을 보고 외쳤다. 커다랗고 둥근 햇무리가 뿌연 하늘에 걸려있었다.
“예쁘다! 꼭 무지개 같아!”
붉은빛과 푸른빛과 노란빛이 무지개처럼 오묘하게 섞여 얽힌 거대한 고리가 태양을 둘러싸고 빛났다.
“햇무리가 보이는 걸 보니 비가 오려나? 햇무리 보면 비 온다잖아!”
내가 말했다.
“햇무리를 보다니 재수가 좋으려나?”
하늘에 떠있는 햇무리를 보며 하군이 말했다.
“평일 낮에 데이트라니, 백수의 삶도 나쁘진 않아. 오늘은 하늘에 걸린 햇무리가 축복하는 좋은 날이야.”
오 분여를 걸어 도착한 돈가스 집에 들어갔을 때 손님은 여자 두 명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 여자들이 나가버려 돈가스 집을 전세 낸 것처럼 가게 안에 손님은 하군과 나 둘 뿐이었다. 옆 가게 직원 두 명이 놀러 와 돈가스 집의 서빙하는 남자 직원 세 명, 주방에서 가끔 얼굴을 비추는 반다나를 한 여자 직원 한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맥주 한 잔 할래?”
하군이 물었다.
“운전은 어쩌고?”
“너만 먹으면 되지. 돈가스엔 맥주지.”
모차렐라 치즈 돈가스와 함께 하군이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짙은 원목 몰딩 사이마다 화려한 패턴의 빈티지 꽃문양 벽지로 둘러싼 돈가스 집 내부는 어릴 때 먹던 경양식집을 떠올리게 했다. 주문한 돈가스와 맥주가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일어서서 돈가스 집구석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았다. 입구 쪽에서는 홀에 네 개의 테이블만 보이지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아늑한 공간에 네 개의 테이블이 더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내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근처에 서있던 안경 쓴 남자 직원이 물었다.
“안쪽 공간이 궁금해서 잠깐 둘러보는 중이에요.”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와 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하얀 밥과 돈가스와 크림수프와 양배추 샐러드와 할라피뇨, 그리고 큼직하게 담근 깍두기가 한 접시에 함께 나왔다.
“여기 보기보다 넓네. 안쪽에도 테이블이 있어.”
하군에게 비밀 장소를 알아낸 것 마냥 의기양양하게 돈가스 집의 은밀한 공간을 알려주는 동안 하군은 음식을 테이블에 정리하고 맥주를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화장실은 저기 있어.”
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얼굴과 눈짓으로 화장실을 알려 주었다. 하군이 돈가스를 자르니 안에서 모차렐라 치즈가 흘러내렸다.
“방금 튀긴 고소하고 뜨거운 돈가스와 곁들여 마시는 생맥주가 최고야!”
나는 청량하고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어릴 때 갔던 경양식 집이 떠오르네. 엄마는 종종 돈가스를 사주셨어.”
나는 테이블 위의 후추를 수프에 뿌렸다.
“옛날 경양식 집 기억나지?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릴까요, 했던.”
“그때는 그랬지.”
“수프도 두 종류였는데 기억나?”
“양송이 수프, 크림수프?”
“아니, 양송이 말고 야채수프.”
“야채수프?”
“응, 크림 스프랑 야채수프.”
“나는 어릴 때 경양식 집에서 돈가스를 먹어본 적이 없어. 어머니가 딱 한 번 집에서 해주시긴 했지.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신 어머니로서는 꽤 신경을 쓴 셈이야. 야채 스프라는 게 있는 줄은 몰랐어.”
하군이 말했다.
“엄마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딱 한 가지는 욕심을 내셨어.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서 늘 근사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시곤 했지. 그 당시 가장 근사한 곳은 경양식 집이었지. 나는 항상 크림수프를 시켰어. 엄마는 언제나 빨간 야채수프를 시켰어. 토마토로 국을 끓여 먹다니 당시로선 야채수프는 꽤 파격적이었지.”
“야채수프가 토마토로 만드는구나. 무슨 맛인지 상상이 안 가네.”
하군이 맥주를 한 모금 맛보았다.
“토마토소스 같은 국물이야. 야채수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굉장히 특이한 면이 있구나, 생각했었어.”
“장모님은 개성이 강하셨지.”
하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채수프 꽤 맛있는데 언제부턴가 사라졌어.”
나는 초라함을 감추며 엄마와 둘이 호기롭게 앉아있던 경양식 집의 어두운 갈색 의자와 테이블에 깔려있던 커다란 꽃무늬 테이블보를 떠올렸다. 아빠가 집을 나간 뒤부터, 정확하게는 아빠가 내연녀와 경양식집에서 데이트를 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엄마는 나와 경양식집에 갔다.
“왜 사라졌지?”
“토마토소스가 그 당시에는 익숙한 맛이 아니어서였지 않을까?”
“지금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내가 언젠가 야채수프 해줄게.”
“그럼 좋지. 그런데 이거 혼자 먹기에는 양이 제법 되네.”
하군이 돈가스 한 덩어리를 크게 잘라 건넸다.
“너 많이 먹어. 이렇게 많이 주면 너는 어떡해.”
“양이 꽤 되네.”
양이 꽤 된다는 말을 하며 하군이 또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차 있는 데까지 걸어 올라가면 금방 깨.”
하군이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내가 눈썹을 추켜올리자 하군이 말했다.
“동태찌개 먹으러 갈 걸 그랬나? 저번에 봤던 데 있잖아. 후암동 동태찌개.”
하군이 돈가스를 덜어주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하군은 돈가스보다 동태찌개를 먹고 싶은 날이 더 많은 것 같기는 했다.
“후암동? 거기는 여기서 멀어. 용산이잖아.”
“바로 옆 아니야? 내가 보기엔 바로 옆 동넨데.”
“거긴 멀지.”
하군이 깍두기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하군의 깍두기 다섯 개가 다 사라졌다.
“깍두기 더 갖다 줄까?”
“괜찮아.”
하군이 마지막 돈가스를 욱여넣듯 입에 넣고 물었다.
“커피 한 잔 하러 갈까?”
“여기서 제공하는 후식 커피 마셔도 되는데.”
“수성동 계곡에 아는 카페가 있어. 거래처 직원이랑 한 번 가봤어.”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오르막을 따라 늘어선 개성 있는 카페들을 다 지나치며 하군이 말했다.
“서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곳이야.”
“방금 우리 엄마 같았어. 소름이 돋아 버렸지 뭐야.”
하군이 말한 카페에 도착하니 주차장이 꽉 차 있었다.
“어쩌지? 금방 빠질까?”
시간을 확인하니 한 시 사십 분이었다.
“금방 빠질 것 같지는 않지?”
하군은 그대로 차를 몰고 인왕산로를 내려가 주택가에 빈자리를 찾아내곤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터 수성동 계곡이야. 이 계곡을 조금 올라가면 아까 그 카페가 있어. 십 분쯤 걸어야 하는데 괜찮지?”
수성동 계곡을 오르려는데 비가 한 방울 떨어졌다. 하군이 트렁크에서 둘이 쓰고도 공간이 남을 파라솔처럼 커다란 검정 우산을 꺼내 폈다. 나는 하군과 우산을 나눠 쓰고 천천히 걸었다.
“여기 산책하기 되게 좋네. 서울 한 복판에 이 정도의 계곡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그렇지? 지인이 근처 빌라 사는데 여기 되게 좋다고 이사 오라고 만날 때마다 얘기하더라고.”
“그래? 너도 여기가 좋아?”
“복잡하고 공기 나쁘고 주차할 곳 없지만 서울에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좋은 게 하나도 없는 서울이 좋다는 말이지?”
“사는 것과 비슷하군.”
“서울은 이상한 동네야.”
동네 주민들인지 외지의 관광객인지 모를 사람들이 계곡을 오르내렸다.
“저기 인왕산 보이지?”
중간쯤 걷다가 하군이 멈춰 서더니 손을 뻗어 인왕산을 가리켰다.
“인왕산이 이렇게 멋진 산이었구나.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왜 그렸는지 알겠어. 아주 똑같이 그렸어.”
나는 숨을 헐떡였다.
“많이 힘들어?”
빨리 걷지 못하는 나에게 하군이 물었다. 발뒤꿈치를 올릴 때마다 발등의 근육들이 육포 결을 따라 찢어지는 것처럼 욱신한 통증이 퍼졌다.
“지난번에 다친 다리가 아직 말썽이네. 너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그런 거 같단 말이야.”
“그건 정말 실수였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군이 절절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웃었다.
“잠깐 쉬어갈까?”
나는 하군과 계곡 중간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았다. 계곡을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 소리와 계곡 따라 흐르는 바람소리와 발아래 작은 생명과 나무 위 생명들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하모니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멀었어?”
“저기 계단 보이지? 저 계단 올라가면 아까 우리가 지나왔던 도로가 나와. 그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카페가 있어. 그렇게 멀진 않아.”
“그래? 그럼 빨리 갈까?”
나는 다시 일어섰다. 하군 말대로 계단을 오르고 오르막 도로를 오 분 정도 걸으니 산 중턱에 자리한 거대하고 모던한 카페가 보였다.
“여기 카페 위치 엄청 좋네!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카페 안으로 들어가 하군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나는 차가운 바닐라 라테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니 그새 주문한 음료가 나와 하군이 음료를 들고 이층 계단 초입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층에서 먹을까? 이층 괜찮지?”
“그럼, 괜찮지.”
나는 하군과 자리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 카페는 개방감이 좋았다. 널찍한 실내의 테이블은 복잡한 도심에서 한낮의 여유를 찾는 사람들로 거의 다 차있고 한 자리가 남아있었다. 미세먼지로 하늘은 뿌옇고 비가 듬성듬성 떨어지고 있어서 넓은 야외 데크의 테이블은 세 개의 테이블만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밖으로 나갈까?”
하군에게 물었다.
“그럴래?”
“응. 여기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하고, 갑갑한 것 같기도 하고. 잠깐 바람 쐴까?”
“그러자.”
우리는 음료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 야외 바에 나란히 앉았다.
“우산은 안 펴도 될 거 같아. 비가 많이 떨어지지도 않는데 뭘.”
우산을 펴려는 하군을 말리고 나는 목을 감싸던 하얀색과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스카프를 풀러 머리에 감쌌다.
“이러면 돼. 어때? 오드리 헵번 같아?”
하군이 스카프를 두른 내 모습을 보고 웃었다.
“오드리 헵번 보다 네가 예쁘지.”
“오드리 헵번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야. 오드리 헵번은 두 번 결혼했지만 남편의 외도로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어. 오드리 헵번은 개인적인 고통에 무너지는 대신 두 아들을 살뜰하게 보살피는 좋은 엄마가 되어 주었어. 상처에 굴복당하는 대신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었어. 그녀의 아버지는 나치 당원이었다고 알려져 있지. 그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생의 마지막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호활동과 자선사업을 펼쳤어. 나는 오드리 헵번처럼 어떤 고통에도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나 같은 사람으로선 몹시 어려운 일이지.”
카페의 야외 바 아래로 잿빛 미세먼지에 갇힌 서울이 펼쳐졌다. 뿌연 미세먼지 너머로 남산 타워와 저 멀리 롯데 타워가 희미하게 분간이 되었다.
“이제 너는 나를 보고 설레지 않지?”
“설레는 게 좋은 건가? 계속 설레면 안 돼.”
하군이 말했다.
“그런가? 설레면 안 되나?”
“계속 설레면 어떡해? 그러면 죽어.”
나는 슬로모션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것을 느끼며 달달하고 시원한 바닐라 라테를 마셨다.
“오늘 미세먼지가 심해서 아쉽네.”
하군이 미세먼지로 뿌옇게 덮인 서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울이 숨을 못 쉬어.”
“살려 달라고 고요히 절규하는 걸 외면하는 가련한 서울.”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아도 앞으로 마스크는 벗을 수 없어.”
“그래. 앞으로 우리는 마스크를 벗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조용히 서촌을 내려다보았다. 눈 아래로는 주택과 다세대 주택과 빌라들이 오밀조밀하게 펼쳐져있었다.
“너 아는 지인이 저 아래 동네에 산다는 말이지?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도 이렇게 카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꽤 분위기 있게 느껴지네.”
나는 난간에 바닐라 라테를 올려놓았다. 빗방울이 컵 안으로 들어가 라테와 섞였다.
“여기 많이 비싼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빌라들을 보며 내가 물었다.
“주변이 온통 산이고 바로 옆이 청와대라 개발도 안 될 거야.”
옆 테이블에 캐주얼 점퍼를 입은 중년 남자 두 명이 각각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나 아는 사람이 이 동네 괜찮다고 여기 빌라를 사두래서 사놨잖아.”
가는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말했다.
“여기가 집값이 오르려나? 청와대가 떡 버티고 있는데?”
얇은 남색 캐주얼 점퍼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모르지. 미친척하고 청와대를 딴 데로 옮길지.”
남자들의 대화는 우리 들으라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청와대가 이전할 가능성도 있어?”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리듯 하군에게 물었다.
“한 삼십 년쯤 지나면 또 모르는 일이지. 통일되면 행정수도와 경제수도를 확실하게 분리할 수도 있고.”
“근데 저 사람들은 왜 당장 청와대가 이전할 것처럼 얘기해?”
“여유 있는 사람들은 집 한 채 사놓고 기다리는 게 뭐 일이겠어?”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빌라들의 지붕과 지붕을 배경으로 하는 대화는 이어지다 끊기다 했다. 남자들의 대화를 듣는 사이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비가 많이 떨어지는데 안으로 들어갈까? 비 좀 맞는 건 상관없는데 커피에 물 들어가는 것 같아. 너 좀 추운 것도 같고.”
하군이 말했다.
“그럴까? 서울 경치도 이만하면 보긴 했지?”
하군이 커피와 가방을 챙기는 것을 보고 내가 물었다.
“들어가기 전에 말이야,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뭔데?”
하군이 물었다.
“너는 다시 태어나면 그때도 나랑 결혼할 거야?”
나는 가만히 하군을 보았다. 하군이 말했다.
“물론이지. 내 인생에 여자는 너뿐이야.”
하군이 대답하며 일어섰다. 다시 실내로 들어와 보니 아까부터 비어 있던, 우리가 원래 앉으려고 했던 누운 눈사람 모양 테이블이 여전히 비어 있었다. 대화가 끊겼을 때는 서로 핸드폰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여기까지 나왔는데 핸드폰만 보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면 나는 하군에게 말을 걸었다.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는 낡은 빌라의 지붕 같은 얘깃거리가 바닥난 억지스러운 대화보다 침묵이 길어질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빠르게 서울을 가로질러 달렸다. 차창 밖에는 빌딩 사이로 조각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강이 뒤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