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울지 않기

두 번째 기회 [조용한 비]

by 비단구름

하군의 미래가 몹시 궁금했던 나는 언젠가 하군의 사주를 본 적이 있다. 으스스한 분위기의 점집에서 갓 신 내린 무당과 마주 앉을 용기가 없는 나는 대신 온라인 무료 운세를 보았다. 하군의 애정운이 소름 끼치도록 달콤한 예언을 해주었다.


‘진정한 사랑을 나중에 만납니다.’


나중에 만난 진정한 사랑이 나인지, 아니면 나를 만난 이후 하군이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는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친절하지 않은 예언이었다. 무엇보다 애정운은 하군이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하여도 알려주지 않았다. 만 원이나 주고 본 이 허술한 온라인 사주 결과를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이유는 하군의 운이 없던 초년운과 그저 그런 재물운을 딱 들어 맞추었기 때문이다.

‘가정 형편이 다소 어려운 가운데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많은 것을 누리며 지내지 못하여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사고의 틀이 잡혀 있으며 지나칠 정도로 부드러우며 착한 성품이 형성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점괘인지! 보는 김에 내 사주도 보았다.


“다섯 시였던가, 일곱 시였던가, 낮이었나, 저녁이었나, 저녁을 먹기 전이었나, 먹고 나서던가.”

희주가 떠오르는 엄마가 나를 낳은 시를 헷갈려하는 바람에 사주의 일시를 다섯 시도 넣었다가 일곱 시도 넣었다가 하는 수고로움에 비해 결과는 평범했다. 재물운이 가득하여 하늘에서 내려준 부자가 된다던가, 무병장수하여 천수를 누린다던가, 하는 것은 어떤 시를 대입해도 나오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 사주에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반은 맞고 반은 심하게 틀리니 사주란 역시 재미로 보는 거지, 하고 무시하지 못하고 일주일에 네 번을 늦게 들어오는 하군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는 상상을 하던 나는 파운데이션이 묻어있던 와이셔츠가 떠오르려는 머리를 세차게 저어 생각의 파편들을 떨어낸다.



충혈되고 뻑뻑해진 눈을 꿈벅꿈벅하며 피곤하다 했더니 하군이 팁을 알려 주었다.

“나처럼 한쪽 눈씩 사용해. 이렇게.”

그러더니 왼발, 왼발, 오른발, 오른발, 하는 것처럼 왼눈, 오른눈을 번갈아 감는, 아니지, 번갈아 뜨는 시늉을 몸소 보여주었다. 양쪽 눈꺼풀을 자유자재로 개폐할 수 있다니 기인이긴 하다.

“해 봐.”

“난 윙크 못하는데.”

일인용 소파에 엎드려 ‘재밌는 수학여행’이라는 사로의 예전 책을 보고 있는 하군은 농담한 줄 알았건만 놀랍게도 오른 눈을 감고 왼눈으로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진짜였구나! 진짜 한쪽 눈으로 책을 보네!”

그러자 하군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오른쪽 눈을 감고 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뜨고 있어. 작아서 그렇지 다 뜬 거라고!”

자기 비하 유머를 하며 두 눈을 깜박거리며 웃는 하군의 얼굴에서 얼핏 예전에 사랑했던 소년의 미소를 본다.

“밖에 다닐 때도 두 눈 크게 뜨고 다녀. 한쪽 눈으로만 보면 균형 감각이 흔들린대. 계단조차 똑바로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불확실함은 두려움을 준다. 확실함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불확실한 ‘실종’은 확실한 ‘죽음’ 보다 서늘한 이별이다. 어딘가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실종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실종이 뜻밖에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집에서 무언가 실종되었다.


사로는 하군을 닮았다.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 날엔 휘파람을 불기도 한다. 매일매일이 행복하다. 빨리 씻고 나오는 것이 목적인 나는 샤워하면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다. 노래는 샤워 후에 개운한 기분으로 부르는 편이 낫다.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듣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나는 하군이 샤워하면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사람이네, 했다가 사로가 샤워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이런 것도 유전이 되는가, 짐짓 놀랐다.


하군도 그랬다. 뭐가 신이 나는지 샤워실에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 불렀어? 좋은 일 있어?”라고 물으면 “내가 노래 불렀어?”라고 되물을 만큼 무색무취 공기 같은 일상의 설렘을 들이마시고 내시며 사는 소년이었다.


요즘 하군은 샤워를 하면서 화를 낸다. “씨바” “아, 씨바 것들.” 틀림없이 화내는 소리다.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걸까. 누구에게 하지 못한 욕을 물을 틀어놓고 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 뱉는 화는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와 물소리에 섞여 배수구로 흘러 내려간다.


하군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에 빠진다. 혹시 회사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는 건가. 같은 팀 직원들이 하군을 우스워하는 건가. 그래서 참았던 화를, 하지 못하고 삼켰던 말을 집에 와서 터뜨리는 건가. 어쩌면 화는 나를 향하고 있는 건가.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내가 일을 안 해서. 내가 집에서 놀아서. 내가 살림을 잘 해내지 못해서. 내가 나이를 먹어서. 더 이상 내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올패부터 하군은 염색을 시작했다. 염색 비용을 아끼겠다며 웃옷을 벗고 화장실에서 셀프 염색을 한다.

“염색을 자주 하는 거 같아.”

“좀 젊어 보여야지. 직원들이 팀장 나이가 많아? 하면 그렇잖아?”

“그래? 직원들이 팀장 외모도 신경 쓰나? 그럼 피부 관리도 할래? 내가 해줄까?”

거울을 보며 염색약을 바르는 하군 옆에서 나는 뒤적뒤적 진주 펄 마스크팩을 꺼냈다.


“우리 도장에 주짓수 다니는 블루벨트 아저씨가 있거든. 머리가 백발이지만 마흔한 살이야. 그렇지만 그 아저씨는 머리가 하얀데도 되게 젊어 보여. 체격도 있는 편이거든? 근데 뚱뚱한 느낌은 아니야. 되게 건장한 느낌이야. 보고 있자면 무척 근사해. 아빠도 그렇게 해 봐.”

어느새 안방 화장실 문지방 앞에 서서 사로가 친절하게 조언해 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마에 삼자 주름을 만들며 염색약을 바르던 하군이 관심을 보였다.

“그야 나는 모르지. 아빠 매력은 아빠가 알아서 해야지.”

사로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약 이십 분 후 하군이 토해내는 불평은 쏴아, 흘러내리는 검은색 물소리 속에서 희미하게 흘렀고 불안은 또렷해졌다.




회사의 합격 통지를 받던 날 하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이 바닥에서 나름 오래되기도 했고 이 업계에선 꽤 인정을 받는 곳이야.” 하군의 회사는 집에서 편도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양재에 있었다. 8-5(실제로 다섯 시에 마치지도 않지만.), 9-6(왜 여섯 시 칼퇴근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범위 내에서 탄력근무라더니 여덟 시에 대표 주재 미팅이 있어 새벽 다섯에 출발했다.

“도대체 어째서 밝고 둥근 해가 떠있는 낮 시간을 온전히 바쳐 하루를 꼬박 일을 하는 것을 온당하게 여기는 비정상에 대해 대부분이 동의하는 거지?”

“그럼 놀아?”

“이게 대체 누구를 위한 거야? 왜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거냐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비판 없이 소수를 위해 대부분이 가혹하게 혹사당하고 있어.”

“일 안 하면 놀아?”


시스템에 약점 잡힌 것처럼 순종하는 하군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무정부주의자 내지는 사회 부적응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 가학적이고 비윤리적인 시스템은 고대부터 소수의 권력자와 자본가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야. 어째서 직원은 이백만 원에서 많아 봐야 천만 원, 잘 받아봐야 몇 천만 원의 급여를 받는 것에 반해 창업자라는 이유로 몇 백억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말이지.”

“대신 사장은 리스크를 안고 있지.”

하군이 또 생판 얼굴도 모르는 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느라 얼굴이 벌게지도록 열을 내기 시작한다. 부조리와 불합리로 곳곳에 만연한 사회가 삐그덕 거리면서도 데굴데굴 잘 굴러가는데 하군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리스크에 대한 부담감? 리스크는 직원도 짊어져. 회사가 망하면 직원들도 일자리를 잃는다고.”

“사업 아이디어는 아무나 갖고 있는 것이 아니야.”

하군이 세상 모든 CEO들의 대표인 것처럼 군다. 이런 유형을 따까리라고 하던가? 아니면 꼬봉? 아니면 딸랑이? 문제는 대표 앞에서는 안 그러고 내 앞에서만 저러고 있다는 것이지만. 왜 이렇게 유교의 후손답게 매사 쓸데없이 공명정대하려고 구는지 모르겠다.


“사업 아이디어는 직원도 내. 그 사업 아이디어를 함께 발전시키고 생산을 유지하는 것도 결국엔 직원이지. 이 시스템은 애초에 이거 아니면 별 수 없는 약자들에 대한 갑질과 교활한 욕망을 합리적으로 포장하여 혹독하게 부려먹는 것이 본질이야.”

이럴 때 나는 극단적인 프롤레타리아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열변은 애초에 적절하게 시스템화되어 있는 하군에게 통하지 않는다.



오래되고 업계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회사엔 하군 아래로 아무도 없었다. 하군은 신입, 대리, 과장 업무에 차장 업무까지 일당 백을 했다. 한 달 내내 주말 없는 야근을 했다. 프로젝트 기간에는 몇 달 동안 열두 시 넘어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곤 다음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출근했다.


“새벽 다섯 시부터 밤 열두 시까지 농사를 짓는다면 만석꾼이라도 되겠어.”


나는 피곤에 얼굴이 부은 채로 나가는 하군을 보며 투덜거렸다. 잠이 부족한 것보다도,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겠다는 걱정보다도 더 큰 걱정은 연이은 프로젝트와 동시다발적 프로젝트를 감내하느라 하군의 뒷골이 당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회사의 모든 프로젝트를 떠안아 프로젝트 걱정으로 초조해하던 하군은 종종 뻣뻣해지는 뒷목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했다. 이러다 어느 새벽 하군의 혈관이 터져 자는 듯이 가는 건 아닐까, 몹시 걱정되는 날들이 이어지던 중 마침내 회사에서 인원을 충원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과장급이나 대리급이 들어오겠지.”

하군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뜻밖에 회사는 이사를 한 명 더 충원했다.

“상전만 한 명 더 늘어난 거잖아! 대표 두 명, 부사장 한 명, 상무 두 명, 이젠 이사가 두 명이라니! 코딱지만 한 회사에 임원이 도대체 몇 명이야?”


회사는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살았다. 매달 일감을 받아오기 위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절절매지 않으면 다음 달 직원들 월급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긴장감 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입사하고 보니 단가 후려치기로 업계에선 쉬쉬하며 유명한 곳이더군.”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너만 모르고 있던 거야?”

“그런 셈이지.”

“언제나 그렇듯 말이야.”

“도대체 왜 이사를 또 뽑았대?”

“그간 그가 쌓아온 화려한 인맥이 회사를 향후 몇 년간 안정적으로 먹여 살려 줄 거대한 공룡 같은 일감을 물어다 줄 거라고 회사 창업자이자 투자자인 대표는 회의 때마다 들떠있어.”

“그 대표라는 양반도 나잇살이나 먹고 꽤나 어리석군. 새로운 이사가 뭐라고 허세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세상에 인맥은 무슨. 술 먹을 때뿐이지.”

내 말을 듣고 있는 건지 하군은 대답이 없다.

"새로 온 이사가 입만 살아있는 스타일인지, 공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데 능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굴러온 돌멩이한테 당하면 어떡해! 너도 정치질이라는 것 좀 해 봐! 맨날 당하기만 하지 말고!"

정치질 대신 하군은 ‘난 내 할 일을 열심히 하겠어. 결국엔 진실은 통하는 법이니까.’를 택했다.


어느 날 새로 온 이사와 거래처 단가 맞추는 미팅을 하던 중 의견 조율이 되지 않고 있을 때 대표가 “너 혹시 돈 먹었냐?”라고 물었다.


이때부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련한 하군이 이직을 생각한 것은. 대표 딴에는 업계에서 흔히 할 수 있는 농담이라고 여겼을 나부랭이를 모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서운함으로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모욕감과 서운함이 대표의 저질스런 농담 때문인지 새로 이사를 뽑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울고 싶을 땐 뺨을 맞아야 눈물이 나는 법이다.


집의 외장재가 강풍을 맞고 한 겹 더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덜너덜한 판잣집 안으로 숭숭 들어오는 외풍을 맞으며 하리와 사로를 감싸 안고 주저앉아 모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도 대책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까닭이 나태함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용기와 결단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마추와 산책하기 위해 호시탐탐 밖을 나갈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첩첩 첩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았다. 가까워질수록 다소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소리는 주방 구석에서 나고 있다. 후룹, 첩첩 첩첩, 이건 마치 좀비가 방금 죽은 사람의 촉촉하고 따뜻한 살점을 파먹고 있는 것 같은 소리다.


주방으로 들어가 보니 마추가 쓰레기봉투를 옆으로 뉘어 놓고 봉투에 머리를 박고 시체에서 내장 파먹듯 쓰레기봉투 안의 쓰레기들을 음미하며 핥고 있다. 돼지고기 포장용기 스티로폼 바닥에 깔린 종이팩에서 돼지고기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녀석의 바로 뒤까지 근접하도록 마추가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비가 주방에 출현했다고 상상되는 것보다 충격이다. 귀가 덮여 청력은 그렇다 쳐도 후각이 인간의 오십 배라며? 내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뿐 아니라 내 체취조차도 못 맡은 것이야?

“마추 뭐 하고 있어?”

큰소리로 묻자 화들짝 놀란 마추가 아기 코끼리 덤보처럼 큰 귀를 펄럭이며 1미터쯤 날아오르더니 0.3초 만에 튀었다. 사라졌다. 고요하다. 어딘가에서 아쉬워하고 있을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다니지 않아 비가 오지 않는 줄 알고 나가보니 조용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온 이상 마추와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비가 오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마추는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마을의 거대한 빌딩이 붕괴 위험이 있어 근처에 소방차와 경찰차가 대기하고 빌딩 주위로 크게 폴리스 라인이 쳐졌다. 분무기로 뿌린 수증기 같은 비를 맞고 있는 견고하게만 보였던 빌딩이 무너지려고 한다.

“마추, 저 치과 보이지? 한 층을 다 쓰는 치과 말이야. 개업한 지 두 달 만에 빌딩이 폐쇄됐어. 우리는 바로 내일도 알 수 없어.”

마추의 귀가 쫑긋하고 움직인다. 들으려고 애를 써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어쩐지 옛날보다 크기가 작아진 것 같은 바닐라 웨하스와 커피를 꺼내 노트북 왼편에 올려놓았다. 마추가 모험을 떠나는 소설을 쓰고 있는데 도서관에 있는 삼수생 하리에게 카톡이 왔다.

“엄마 내 폰 케이스 온 것 같아!”

그러더니 카톡에서 혼자 춤을 춘다.


땐쑤 댄쓰!!!!!!


빨리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고대하던 소중한 폰 케이스가 왔는지 확인하고 왔으면 안으로 들여다 놓고 알려달라는 소리다. 일어나서 현관으로 가 현관문을 열었다. 조그만 팩이 현관문 앞에 놓여있다. 가지고 들어와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더니 몹시 기뻐한다. 춤은 카톡에서나 춰야 할 텐데. 기쁜 나머지 도서관에서도 생미역 같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춤을 추는 건 아닌지.


사수를 하기로 작정한 듯 한 하리와 카톡을 한 김에 점심을 먹기로 한다. 짜파게티에 파인애플, 마늘 몇 쪽, 청양고추 몇 쪼가리, 실파 몇 가닥, 무순 조금, 고기, 숙주 등 먹고 남은 것들을 섞은 괴식 같은 잡식을 먹는다. 이것저것 다 먹어치워서인지, 내 피부는 맑음, 혈색은 쾌청하다. 잡식과 피부와의 인과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으니 설거지를 마치고 바로 청소를 할 거라고 이상한 짜파게티를 먹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마추가 오늘은 좀 오래 잔다. 달그락달그락, 우당탕탕! 하며 세상 요란한 설거지 소리에 나올 법도 한데(귀를 덮고 있는 강아지는 청력이 안 좋은가?) 라디오에선 노래가 빵빵하게 흘러나오는데도 나와 보질 않는다.


한 번쯤 나와서 나를 한 번 쓱 보고 다시 들어갈 법도 한데 오늘은 어딘가에서 깊은 잠을 자는지 아직 안 나오고 있다. 꿀잠을 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추가 쉬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청소는 좀 미루기로 했다. 대신 빨래를 했다. 점심때쯤 날이 맑아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공기 중에 습도가 있어 눅눅하긴 하지만 햇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세탁기에 빨래를 명령했다. 인내를 가지고 모아둔 하얀 수건, 하얀 티셔츠, 하얀 러닝, 하얀 와이셔츠를 세탁기에 넣고 락스를 붓고 세제도 넣었다. 헹굼도 한 번 더 눌러주고 세탁기를 돌렸다. 위잉, 세탁기가 무게를 감지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네이버 비서만큼 똑똑한 세탁기다. 이 집엔 나 말고도 말하는 것이 여럿 있다. 세탁기도 말하고 밥솥도 ‘맛있는 밥을 시작합니다.’고 말을 한다. 마추도 할 말이 있으면 나를 똑바로 보고 눈을 마주치면서 입을 한껏 오므리고 “오, 워, 오우”라고 말을 한다. 주로 “밥때 됐어. 밥 줘.”, “(산책 나가기 전에) 빨리 준비해.”라고 하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사로 목소리를 들은 마추가 어슬렁거리며 나온다. 정수리와 얼굴 털이 까치집인 폼이 푹, 잔 얼굴이다. 하얀 털로 덮인 얼굴이 어째 더 뽀얗다. 곧장 내 앞으로 와 앉아 있는가 싶더니 사로를 보더니 사로 앞으로 가서 앉았다가 다시 내 옆에 와 앉는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게 확실하다. 사로가 생일 선물로 받은 바나나 우유를 들고 있다.


“맛있겠다. 나도 먹고 싶다.”

단 것이 당긴다.

“한 입 줄까?”

그래 놓고 원샷을 했다.

“이런, 까먹고 다 먹었네.”

......

“엄마 거 하나 사다 줄까?”

......

사로가 새로 산 운동복의 바지 단이 너무 넓다며 줄이고 싶다고 했다. 왜!!!!!!?????? 사로는 나를 내버려 두질 않는다.

“츄리닝이라며! 츄리닝 단을 왜 줄인다는 거야? 츄리닝은 그냥 입는 거 아니었어?”

“바지 단이 너무 넓은 거 같아.”


츄리닝이란 자고로 일하려고 입거나, 쉬려고 입는 바지로 인식하고 있는 나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안일을 아주 잘 해내기 위해 집에선 늘 검정 츄리닝을 입었다. 원피스 나부랭이나 블라우스 쪼가리 같은 것을 입고는 쪼그리고 앉아 주섬주섬 정리할 때 치맛자락이 질질 바닥에 끌리고, 팔 걷어 부치고 설거지를 할 때 소매가 자꾸 흘러내려 불편하고, 효율적이지 않으며, 더디다. 일할 때는 츄리닝이 최고라고 외치면서 집에서 주야장천 츄리닝만 입고 있는 바람에 검정 츄리닝의 무릎이 헤벌레 하게 늘어나고 희뿌연 먼지 같은 것도 붙어 있었지만 츄리닝 입고 있는 나의 모습도 하군에게 몹시 사랑스러울 거라고 한껏 착각했다. 요즘은 츄리닝마저 패션의 일부라니 요즘 아이들이 똑똑하다. 마추가 앞발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앉아 우리 대화를 듣고 있다.


“도와줄까?”

하얀 빨래가 다 됐다. 앞 베란다로 나가 하얀 빨래를 널고 있는데 사로가 다가왔다. 츄리닝의 단을 줄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원래 이런 녀석이다.

“아니야, 하얀 빨래만 해서 별로 없어.”

“그래? 달달한 거 먹고 싶어?”

“응, 달고 시원한 거.”

“빼빼로 줄까?”

“시원한 거라고 했지?”

“그럼 개복숭아 타 줄까?”

“정말?”


사로가 얼음을 넣고 시원한 개복숭아를 타 왔다. 츄리닝 단을 수선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이런 자식이다. 사로 임신했을 때 태교를 어떻게 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이렇게 태어났다. 고마운 자식이다. 마추가 앞 베란다로 쫓아 나와 볕이 잘 드는 환한 앞 베란다에 벌러덩, 누워 우리 대화를 듣고 있다.


소파에 앉아 사로가 타 준 시원한 개복숭아를 마시고 있는데 사로가 방에서 성적표 같은 걸 가지고 나오더니 쓱, 내밀었다.

“내신이래.”

너비 0.3밀리미터, 길이 10센티미터의 하얀 종이에 숫자만 깨알만 하게 적혀있지만 아직 노안이 오지 않은 눈은 사로의 엉망진창 성적을 대문짝만 하게 확대해 찾아냈다.

“이게 출결, 이건 봉사활동, 이건 교내 활동.”

사로가 성적표보다 훨씬 두꺼운 손가락으로 숫자를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출결, 봉사활동, 교내 활동은 더할 나위 없는데 성적이 참담하다. 별 수 없이 내 마음도 참담하다. 사로가 잽싸게 방으로 들어갔다.


“츄리닝 고치러 안 갈 거야?”

도망가는 사로 뒤에다 대고 큰소리로 물었다.

“오늘 안 고쳐도 돼. 나 혼자 가도 되고.”

지도 조금 찔리는 가 보다.


“나 닮아서 그래.”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을 두고 빙구와 더빙구인 하군과 나는 서로 지 닮아서 그렇다고 이실직고한다. 하군은 자기가 공부를 꽤 안 했다고 하고 나도 공부보다는 주로 딴짓을 했다고, 나 닮아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둘 다 꽤 객관적 자아 성찰을 하는 편이고 양심이란 걸 가지고 있다.


“공부를 너무 못해서 엄마 얼굴을 못 보겠지?”

“엄마, 나 고등학교 어디 가는 게 좋을까. 특목고는 못 가겠지?”

사로는 아직도 특목고가 특수한 목적이 있는 학교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지. 특목고는 무슨.”

“일반고 가야겠지?”

내 대답은 신경도 안 쓰고 사로가 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왜인지 내신 성적표를 들고 다닌다.

“그래, 그 성적표 좀 눈에 띄는데 붙여 놓고 각성이란 걸 좀 해보는 게 어때?”

“영광 가는 게 낫나?”

“너는 어느 학교 가고 싶은데?”


집에서 가장 가까워 걸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1 지망이다. 학구열이 매우 높은 학교다. 공부로 방귀 좀 뀐다는 아이들도 첫 중간고사 성적표를 머리 싸매고 누워서 받는다는, 내신이 안 나오는 학교다. 하리가 다니고 있는 학교다.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다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어떻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어려운데? 쉬운데?”

“대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어느 학교를 가든지 상위권을 유지하는 게 좋은데 말이야, 그런데 그게 쉽지 않지. 이유는, 어느 학교든 공부 잘하는 애들이 꼭 있거든. 그러니 기타만 주야장천 치고 있는 네가 이 동네에서 쉬운 학교, 어려운 학교를 구분하는 것이 딱히 의미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재석이는 과학고 원서 냈대.”

“거 봐.”

사로와 농구하는 친구 중 한 명이 과학고 원서 낸 모양이다. 요즘 애들은 놀고 있는 것 같아도 다 공부 잘한다.

성적표는 잊었는지 사로는 기타를 연주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안방 청소를 하다 안방 창문 너머 앞 베란다에 하얀 빨래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 걸 보고 잠시 멈춰서 바라보았다. 하얀 셔츠, 하얀 티셔츠, 하얀 수건, 하얀 러닝, 하얀 양말 위에 때마침 더 강해진 햇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살짝 열어둔 앞 베란다로 바람이 들어와 하얀 빨래들이 살랑살랑 건들건들 춤을 춘다. 청소를 마치고 나니 땀이 나 샤워를 했다.


오늘도 도서관을 가기 전 하리가 홍차를 타 놓았다. 점심 먹고 마시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 샤워를 하고 나와 소파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쉬었다. 라디오에선 노래가 흐른다. 벌써 다섯 시다. 곧 저녁을 해야 한다. 참나물을 무칠까?


저녁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갔다. 고기 굽는 냄새 때문에 식구들이 모두 기대 중이다. 이제 밥만 푸면 된다.


그런데!

취사 버튼을 안 눌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갓 지은 밥, 식구들에게 갓 지은 뜨끈뜨끈한 밥을 주기 위해 딱 적당한 타이밍에 취사 버튼을 누르려는 완벽한 계획을 했는데, 참나물 데치고, 오이 자르고, 실파 자르고, 버섯 볶고, 부대찌개 끓이고 고기 굽다 까먹었다. 뭘 했다고, 뇌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다. 쾌속 취사가 있잖은가?

십 분이면 밥이 되는 이토록 놀라운 기능이 있다는 걸 십팔 년 만에 하리가 알려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쾌속 취사를 누르는 하리가 말하는 밥솥만큼 영리한 것 같아 다행이다.


어쩔 수 없이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십 분이 참 길게 느껴진다. 식탁에 착착 차려지는 반찬들과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 냄새를 맡으며 출출함을 못 이기고 오이를 집어 먹던 식구들이 김 빠진 사이다처럼 퓨슉, 하더니 제각각 어딘가로 흩어졌다. 하군은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하리는 오이를 집어 먹었다. 사로는 안 보이는 걸 보니 방에서 휴대폰을 하고 있을 거다.


마침내 반가운 소리, “보온이 완성되었습니다!”라고 밥솥이 말을 했다. 흩어졌던 식구들이 다시 모일 시간이다. 사로가 방에서 무얼 들고 나온다. ‘당선증’이다. 요즘은 임명장이라고 안 하고 당선증이라고 하는가 보다. 하긴 투표를 해서 뽑혔으니 당선증이 맞기는 하다. 사로 덕에 밥맛이 꿀맛이다. 밥을 먹다 생각이 났는지 사로가 물었다.


“이육사 시인 알지?”

“알지.”

“이육사 시인이 누구 후손인지 알아?”

“음, 이순신?”

훌륭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 후손일 것만 같다.

“아니, 이순신 장군님은 덕수 이 씨 가문이셔.”

“우와!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니?”

“난 위인 덕후니까. 후훗.”

사로가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턱에 브이를 그린다.

“이육사 시인은 퇴계 이황 후손이야. 14대손 이래.”

“그렇구나.”

나는 사로의 경계 없는 관심사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육사 시인 본명 알아?”

“이원록”

“오, 대단한데! 그럼 왜 이육사 시인인지 알아?”

“이육사는 선생님이 수감되었을 때 수감 번호야.”

하군의 대답에 사로가 눈썹을 끌어올리며 놀란다.

“‘강철로 된 무지개’, ‘청포를 입고 오는 손님’ 이육사 시인의 비유는 읽을 때마다 소름 돋는 전율이 느껴지지. 이육사 시인 기념관 가보자. 그런데 가 봐야 하는데.”

말 나온 김에 주말 일정을 잡을 모양이다. 사로가 물었다.

“그럼, 일제 강점기 때 현상금 가장 높았던 독립운동가가 누군지 알아? 1, 2, 3위 말해봐.”

1위도 모르겠는데 순서까지 맞히라고 한다.

“음, 1위는 김구 선생님?”

“음, 역시,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땡!”

“아니야? 음, 알 것 같은데 이름이 김...”

이런 것이 뇌의 노화인가? 분명 아는 이름인데 기억이 안 난다.

“왜, 그 있잖아, 영화 ‘암살’에도 나오고.”

“조승우?”

“그래. 조승우가 한 역할.”

“오, 엄마 대단한데. 맞아 김원봉.”

“그래 김원봉 선생님. 김원봉 선생님이 1위야?”

“어. 1위는 김원봉, 2위는 김구, 3위는 이승만.”

“그렇구나.”

“아빠, 김원봉 선생님이 활동했던 단체 이름 알아?”

사로의 질문이 이어진다.

“의열단?”

“오, 대단하군.”


사로가 만족의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역사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 근현대사인가 보았다. 독립운동가들 중 어떤 분은 사회주의를 택하셨다는 것, 그런 연유로 덜 알려졌다는 것까지 넓게 배우는 모양이다.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전 세계 난민 문제, 국회의원 및 정치인의 역할, 이념과 체제에 대해 아이와 2절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하군이 신이 나는지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주시경 선생님의 조선어학회에 대해 설명하며 3절을 시작한다. 위인 덕후 사로와 삼수생 하리가 잘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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