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기회 [소년의 노크]
남편을 잡으러 다니며 앓았던 광기 어린 화병은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후 우울증으로 전환되었다.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함께 식탁에 앉지 않았고 외식은 선유를 데리고 둘만 나갔다. 언성을 높이고 보이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는 대신 일절 말을 섞지 않아 집은 언제나 오싹하게 고요했다. 우울증이 심했던 은숙은 약국을 접고 베이커리를 차렸다.
은숙은 하나 남은 딸을 데리고 전국의 베이커리를 찾아다녔다. 베이커리에서 풍기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크로와상의 버터향을 맡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며 은숙은 아침, 점심, 간식으로 크로와상을 먹어대더니 제과제빵을 배우러 다녔다.
우울증이 아니었어도 사업 수완이 부족한 은숙의 약국은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을 거다. 은숙은 남편에게 학비를 대며 의대를 졸업시키고 대차게 차일 만큼 호구였고 언니, 언니 하며 애살맞게 굴던 간호조무사가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순진한 사람이었고 헐값에 약국을 넘길 만큼 돈에 관해 숙맥이었다.
“망하기도 어려운 약국 팔고 베이커리 한다고 하니까 다들 치매 걸렸냐고 물었어. 그건 치매환자를 심각하게 모욕하는 언사지. 약사가 베이커리 하는 게 남자와 남자가 결혼하고 정자를 거래하고 가상인간이 광고를 찍는 거보다 파격적인 일이야?”
은숙이 물었다.
“예시들이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내가 대답했다.
“제멋대로 지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약 냄새만 맡아도 의사와 간호사가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지껄여댔지. 흰가운만 보아도 떠오르는 병원에 치 떨려서일 거라고 수군거렸어. 하지만 모두들 잘못짚었어.”
은숙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왜 반대했지?”
은숙이 다시 물었다.
“그야 허리 아픈 은숙 씨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그렇지.”
진심이었다.
“그래도 빵 냄새가 약 냄새보다는 낫지. 암, 훨씬 낫고말고. 약 냄새만 맡으면 머리가 아파서 말이야. 빵과 약은 공통점이 많아. 정확한 수치로 계량을 해서 반죽을 하거나 약을 조제한다는 점이 같지. 무엇보다 둘 다 사람을 치유해. 부드럽고 달콤한 빵 냄새를 맡으면 아픈 허리도 아픈 마음도 잊게 되지.”
은숙이 갓 구운 밤식빵을 가져왔다. 밤식빵을 찢자 뜨거운 김과 부드러운 버터향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렇게 허무하게 접을 거였으면 대체 왜 약사가 된 거야?”
식빵의 결을 따라 죽죽 찢으며 물었다. 은숙이 굽는 밤식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이었다. 은숙은 나를 위해 매일 버터향 가득한 밤식빵을 구웠다.
“그야 공부를 잘했으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몇 개 없어.”
“나는 공부를 못해서 다행이야. 고생고생하고 먼 길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엄마 닮지 않은 것이 이렇게 다행이라니.”
“쉬운 길 놔두고 멀리 돌아갈 수는 있지.”
전국의 베이커리를 찾아다니며 들른 전국의 휴게소에서 먹은 호두과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개발한 단팥 크루아상은 베이커리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단팥 크루아상은 뜻밖에 전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어 외롭던 은숙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모두 해그린 덕분이지.”
알바가 방긋 웃었다. 홍보니 마케팅이니 알바 아니라는 시대착오적인 사장을 보다 못해 베이커리의 SNS 홍보는 해그린이 알아서 올렸다. 해그린은 매일 갓 구운 빵과 갓 내린 커피 사진을 햇살 가득한 느낌으로 보정한 후 SNS에 올렸다.
“알바, 택배 문의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해그린과 알바가 진지하게 회의를 하고 있다.
“먹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보내주고 싶지만 말이야.”
알바가 입술을 꾹 다물고 깊은 고민을 했다.
“빵의 신선도나 품질 때문에 걱정되시는 거죠?”
해그린이 물었다.
“것도 그렇지만 말이야.”
해그린이 알바의 대답을 기다렸다.
“환경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택배 발송할 때마다 발생될 환경오염이 염려된단 말이야.”
“알겠어요. 알바 뜻에 따르겠어요. 택배 발송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할게요. 택배 문의 들어오면 잘 설명할게요.”
해그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고 있는 하군의 대학 선배가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제안했다. 한 달에 몇 차례 야근을 하고 한 두 번은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기는 하지만 십 년 동안 이렇다 저렇다 군소리 없이 다니는 가 싶어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하군의 선배가 이직 바람을 넣자 하군은 흔들렸다.
“회사 옮기려고? 왜?”
“회사도 더 크고 연봉도 더 많으니까.”
“일하기는?”
“일하는 건 다 거기서 거기지.”
선심 쓰듯 두 발 벗고 나서 호의를 베푸는 선배의 제안에 순수한 하군이 흔들리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하군에게 이직을 제안한 하군의 선배라는 그 남자를 떠올리면 이상하리만치 불쾌하기에 하군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하군의 후배이며 남자의 후배이기도 한 직원이 육 년을 일하고 퇴직할 때 퇴직금을 한 푼 주지 않고 내보냈다. 이백만 원도 되지 않는 급여로 영업비까지 충당해야 했던 후배는 자발적 퇴사를 선택했다. 남자는 후배에게 회사 운영이 어려우니 이해해 달라고, 도와 달라며 앓는 소리를 하곤 일 년 뒤 마포의 신사옥에 잔금을 치르고 들어갔다. 매년 동문회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임에도 퇴직금은 후에도 지급하지 않았고 이런 일쯤 사나이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후배는 남자에게 한결같이 깍듯했고 남자는 일관적이게 고압적이었다.(후에 후배와 남자가 동년배라는 사실을 알고는 나는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언젠가 하군과 데이트 중에 그의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저 편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가 스피커폰을 켜 놓은 것처럼 들렸다. 야, 이 새끼야, 어쩌고, 저쩌고. 하군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미친 공룡 같은 그의 욕지거리를 욕받이처럼 순순히 듣고 있었다.
“그 남자는 참 운이 좋아. 주변에 착한 사람들만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험담은 이 정도가 다였다.
“타이푼 들어봤어? 외국계 회사야.”
“외국계 회사가 더 좋아?”(그 사람은 남 좋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외국계 회사에서 한 번 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영어를 해야 하나?”
그 회사로의 이직을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영어라면 질색을 하는 하군이 영어에 관심을 가졌다.
“옮기고 싶어?”(지한테 떨어질 콩고물 판을 짜 놓았는가 보지.)
“본사는 미국에 있고 우리나라에 있는 건 지점인데 규모가 꽤 커. 매출도 상당하고. 미국에 본사가 있으니 잘하면 연수도 갈 수 있으려나? 연봉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제시하네.”
“애들 학자금은? 그거 때문에 지금 회사가 좋다고 했잖아. 이제 곧 학자금 받을 텐데.”(너를 이용하려는 거겠지.)
“학자금은 애들이 대학을 가야 받는 거고.”
“그렇긴 하지만, 대학을 가긴 갈 텐데.”(네가 그 사람과 얽히는 게 싫어.)
“그 학자금만큼 더 받으니 비슷한 거야.”
“그렇구나.”(나는 그 사람이 싫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어떤 사내인지 하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나 때문일까? 내가 일을 하지 않아서? 역시 내가 문제인가? 그래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려고 하는 걸까?
중학교 졸업을 일주일 남겨 놓은 사로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군대 갈 계획을 세웠다. 세부 계획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군대 갈 때까지 머리를 기르겠다는 것, 두 번째는 친구들과 동반 입대하겠다는 것이다.
“군대 가려면 아직 한참 먼 것 같은데. 우선 고등학교나 가시지.”
사로에게는 꽤나 원대한 다짐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소로운 결심이었다. 사로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생각엔 삶은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
“그야 당연히 죽어가고 있는 중이지.”
사로의 얼굴이 하얘진다.
“몹시 섬뜩한 생각이야.”
“알기 쉽게 설명해 주지. 삶이란 죽어가고 있는 중이지만 살아보는 거지. 정리를 하자면 삶이란, 살아있는 거지. 죽지 않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돌아온 삼수생 하리가 거창한 결심을 터놓았다.
“엄마, 나는 이별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누구랑 이별하는데?”
“지금까지 내가 착각했던 모든 거랑. 이별하고 다시 만날 거야.”
“어디로 갈 건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사는 곳, 부탄! 언젠가 기사를 봤는데 부탄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고 하더라.”
눈을 지그시 감은 하리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행복한 곳에 가면 너도 행복해지니?”
내가 물었다. 하리의 고개가 계속 왔다 갔다 했다.
“행복한 법을 배우고 싶어. 그다음엔 나의 세상을 만들 거야.”
수습해야 하는 것은 뭘까. 삶이 뭘까?
“일 학년 마치면 재수학원에 다니며 정시 준비를 하기 위해 친구들이 자퇴를 고민해. 가희도 일 년 내내 고민했지. 처음 가희가 자퇴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학교가 재미없어서, 공부가 힘들어서 하는 농담인 줄 알았지. 가희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했어. 가깝게 지내던 친구 몇이 돈을 모아 가희에게 줄 케이크와 꽃다발을 사기로 하고 학교 끝난 뒤 케이크 전문점과 꽃집에 들어 케이크와 꽃다발을 샀어.”
사로가 말했다.
“그래. 집에 와선 가희에게 줄 편지를 쓰다 잠들었지. 가희 배웅 잘해줬지?”
“가희가 학교를 떠나던 날 가희에게 케이크와 꽃다발과 편지를 건넸어.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고 당차게 이별을 결심한 가희가 떠나는 날 많이 울었어.”
“대학이 뭐길래, 학창 시절과의 과감한 이별을 하는 걸까.”
“엄만 가희가 잘 못 결정했다 생각해?” 사로가 물었다.
“미래를 위해 어둡고 춥고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이 긴 길을 홀로 오롯이 견디어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 마음 아파서 그래.”
“가희는 학교를 떠난 것이 아니야. 자기 세상으로 떠난 거야.”
하리가 말했다.
“만약 내가 자퇴하면 엄마는 반대할 거야?”
사로가 물었다.
“자퇴하고 싶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로가 말을 얼버무렸다.
“학교 재미없어.”
사로가 말했다. 사로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중학교를 종종 그리워했다. 중학교 친구들이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반에 친한 친구들이 예닐곱은 되었다. 아이들과 무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로는 중학교를 그리워했다.
“학교 재미없어. 중학교 때는 재밌었는데. 차라리 수업시간이 더 재밌을 정도야.”
“학교에서 재밌는 건 하나도 없니?”
“있긴 있지. 급식, 축제, 체육대회.”
“학교는 원래 재미없어.”
내가 말하자 사로는 말이 없다.
“앞으로는 재밌는 거 없어. 어른의 삶은 재밌는 거 더 없어. 휴가뿐인데 그나마도 일주일밖에 안 되지. 앞으로는 평생 쉬는 날도 없이 일하며 살아야 해. 끔찍하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하지.”
사로가 여러 차례 단서를 주었음에도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로가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다니고 있으니 잘 다니고 있는 거라고 멋대로 단정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학교생활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 거라고 강조했다.
“만약 내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수능을 보지 않겠다고 하면 엄마는 어떨 거 같아?”
하리가 물었다.
“수능은 인생에서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야. 네가 아주 작은 부분에서 최선의 노력을 해보면서 너의 한계치를 경험하길 바라.”
“나는 자퇴하지 않을 거지만 대학에 연연하지 않을 거야. 나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거야.”
“엄마는 무조건 네 편.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미래를 응원하고 축복해 줄 거야.”
진지하게 결심을 터 놓은 뒤 하리와 사로는 외힙 ‘무드’를 흥얼거리며 몸을 건들건들, 헐랭 거리며 집안을 배회한다. 하리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토끼춤을 추자 눈치 빠른 마추가 꼬리를 힙하게 흔들며 아이들을 따라다닌다.
어제 하군은 이직을 고려 중인 회사의 전무와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잔뜩 취해 곧바로 침대에 엎어져 기절한 하군을 보며 하군의 이직 은 코로나 변이의 확산과 더불어 코로나로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만큼 새로울 것도 없다, 고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요즘은 더 이상 평생직장의 시대가 아니라고, 우린 어떻게든 사라 갈 거라고, 되뇌었다.
회사는 여러 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중견그룹이었다.
“급여가 전보다 좀 많이 적어.”
다음날 술이 덜 깬 듯한 하군에게 시원한 꿀물을 타서 주었다. 하군이 벌컥벌컥 마시더니 시원하다, 술이 다 깨는데!라고 감탄했다.
“얼마나 적은데?”
“매달 몇 십만 원 적어지지. 대신 이 회사는 서울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골프장도 가지고 있어.”
“직원 할인되나?”
“그렇겠지. 그렇지만 안 가는 게 좋을 걸. 전무님, 사장님 다 만날 텐데.”
“그럼 우리한텐 쓸모없는 복지네.”
“여기는 꽤 내실이 있어. 규모에 비해 프로젝트도 많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군이 설레는 표정으로 밝게 말했다.
“여기는 자녀 학자금이 있어.”
학자금을 주다니 좋은 회사인가 보다.
“조건 없이?”
“입사하면 바로 적용되나 봐. 꽤 괜찮지?”
“그래? 그거면 됐지 뭐. 잘했어!”
불 꺼진 방에 하군이 말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옆에 누워 바라보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신기하게 바라봤었던 반듯한 산처럼 오뚝한 코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도 보인다. 내가 자기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턱이 없는 하군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잠이 들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하니까.
하군이 오른손가락으로 미간을 지그시 누르는 모습을 바라본다. 하군이 미간을 누르는 건 어지간해서는 어떤 티도 내지 않는 하군에게 확실히 무슨 고민이 있다는 증거다. 갑자기 하군이 일어나길래 얼른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다면 하군은 다음부턴 어둠 속에서조차 어떤 긴장도 놓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만이라도 하군의 우주가 고요하길, 잔잔한 내면이 평안하길 바란다.
이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핑계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는데, 제아무리 거지 같은 상황도 변덕스러운 자연에 고개 숙이는 농부의 아들처럼 순응하는 묵묵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었는데. 혓바닥을 잘 놀리는 인간들도 다 받아주고 영악한 인간들도 다 맞춰주고 속아주는 진짜 바보였는데.
하군이 버티지 못하고 있다. 반백의 남편이 무너지고 있다. 바보 같은 인간이 혼자 힘들고 속 썩어 가는 동안 그 덕에 나는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코로나가 창궐한 어둠침침한 바깥과 대조되는 환한 집에서 사이코들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줄 알고 세상 편하게 살았다. 이제야 깨달아 버렸다. 바보같이 무심했고 너무 이기적이었던 나를.
업무상 실수를 했던, 회사가 싫어졌던, 왕따를 당하고 있던, 과로에 시달리든 간에 하군이 이직하는 이유는 알고 싶지 않다. 그까짓 이유 따위 중요하지도 않다. 그게 뭐라든 뭐 대수라고, 궁금하지도 않다. 하군의 얼굴에서 빛이 나지 않는다. 어둠이 빛을 잠식해 버리듯 오랜 세월은 하군의 소년을 데려갔다. 하군은 지금 무너지기 직전인가, 또는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건가, 나에게는 오직 이점만이 종일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우리에게도 노후가 올까?”
“무슨 말이야?”
“요즘 이런 생각이 들어. 새로운 바이러스가 더 강력해진 버전으로 또 나오면 그땐 버틸 수 있을까. 노쇠한 몸으로. 우리가 무사히 초로의 여든, 아흔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이겨내야지!”
하군이 예능에 나오는 선수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감을 줬다.
“우리 애들 자리 잡을 때까지 버텨야지. 버틸 수 있지?”
하군이 물었다.
“버텨야지. 버틸 거야.”
“똑똑한 사람이 미치는 법이지.”
언젠가 엄마가 말했다. 똑똑해서 미치다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신박한 발상이었다. 그래서 내가 미칠 뻔했구나. 무려 대학 공부까지 하고 꿈도 많았던 나는 그래서 미칠 뻔했다가 실제로 잠깐 미쳐 있었다. 하군이 혼자 고군분투하는 줄도 모르고. 나는 마침내 나를 미치게 만드는 개떡 같은 상황에서 울기보다 웃는 편을 택했다. 인상을 쓰기보다 웃는 편을 택했다. 화를 내기보다 웃는 편을 택했다.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무너지기 직전이라면 결국 무너지겠지. 그래도 함께 살아볼 것이다. 나는 오래전 하군과 함께라면 단칸방에서 살아도 좋다, 는 확신으로 하군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은 가.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없으면 없는 대로 먹는 것은 이력서에 적지 않은 내 특기다. 하군이 살아남기 위해 바람 쌩쌩 부는 바깥에서 온종일 씨름하고 있는 거라면, 하군이 이 상황을 잘 버틸 거라고 믿고 기다려볼 작정이다. 될 대로 대라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이것은 타고난 내 특장점이다.
하군이 꽃 사진을 찍어 보냈다.
-예쁘지?
방금 막 태어난 것처럼, 생전 처음 꽃을 보는 것처럼 하군이 꽃을 보고 좋아한다.
나는 꽃이 예쁜 거 알고 있었는데. 전쟁 같은 사회생활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하군은 이제야 꽃이 예쁜 게 눈에 들어오는구나.
-너도 꽃과 같아. 꽃처럼 예뻐.
나는 소년을 사랑했다. 수줍은 듯 내비치는 포부와 진실하게 꿈꾸는 희망과 거짓 없는 미소를 사랑했다. 소년은 매일 두려운 길을 나선다. 이 회사에서 저 회사로 문을 두드리는 소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깊은 어둠에 빠져 홀로 두려워하고 있는 상처받은 소년을 안아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