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도망치지 않기

두 번째 기회 [불운의 융단 폭격]

by 비단구름

간밤에 자다가 에엥, 하고 모기가 근처에서 맴도는 소리를 들었다. 모기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번쩍 떴는데 벌써 모기의 공격을 받았는지 발가락이 간지럽다. 다른 신체부위에 비해 짧고, 도톰하고, 탄탄한 살집이 붙어있는 발가락은 긁어도 시원해지지도 않는 부위인데, 하필 거기를!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모르면 모를까, 모기를 감지한 이상 그냥 잘 수는 없다. 형광등을 환하게 켰는데도 하군은 으으으, 하고 해괴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계속 잔다. 아기였던 하리가 울 때도 사로가 울 때도 그러더니.


그러거나 말거나,

모기를 찾아야 할 텐데. 이런 경우 대게 모기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벽 어딘가에 붙어 납작 엎드려서 내가 다시 눕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나, 모기라면, 보는 즉시 살생한다. 도구가 없으면 손바닥으로 단 번에 끝낸다.


어딨지? 피에 집착하느라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음흉한 모기 녀석, 분명 숨죽이고 나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을 거다. 벽에는 아무리 봐도 모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근처에 있을 텐데. 형광등의 환한 빛이 눈동자에 마구 닿아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져 실눈으로 모기를 찾는 것이 지쳐 포기하려는 순간, 보였다. 까만 그놈이! 침대에서 수직 상승해 천장에 딱 붙어 있다. 하군을 깨우지 않기 위해 침대에 조심조심 올라갔지만 무릎을 한 짝씩 침대에 올릴 때마다 침대가 꿀렁거렸다. 하군은 음, 하더니 옆으로 돌아누워 잔다. 그래, 넌 계속 자. 일어나지 말고. 저 사악한 놈은 내가 처리할게.


음흉한 모기 놈 바로 아래 자리를 잡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뒤 댄스 하듯 팔을 뻗었다 굽혔다 으쌰 으쌰, 하며 시물레이션을 해 보았다. 기회는 한 번뿐. 실패하면 모기는 사라진다. 최악의 경우, 하리 방으로, 사로 방으로 튈지 모른다.

탁!

“으악!!!”

몇 차례 천장을 치는 시뮬레이션을 마친 뒤 미처 모기가 눈치챌 새도 없이, 피할 새도 없이 무자비하고 가차 없이 천장을 쳤다 손바닥을 떼었을 때 천장에 흥건하게 낭자한 피를 보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비명 소리에 놀란 하군이 깨는가 싶더니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시 잠들었다. 하얀 천장엔 틀림없이 나의 것이 분명한 손톱만 한 새빨간 피가 질펀하고 내 베이지색 도톰한 손바닥엔 날개와 다리와 몸통이 엉킨 채로 찌부된 모기가 달라붙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휴지와 물티슈를 꺼내 천장의 피를 닦았으나, 피가 말끔하게 닦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지, 뭐. 이 정도면 됐어. 모기를 처치한 개운함으로 뿌듯해하며 다시 누워 한 시간쯤 잠들었다.


깊은 밤,

“내 다리~ 내 다리~ 흑, 흑.”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하리가 열어둔 안방 문으로 들어와 침대 발치에 서서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 내 다리~ 내 다리~”

“으악! 깜짝이야! 왜 그래?”

벌레라면 기겁하는 하리가 말캉말캉한 돌고래인형을 껴안고 공부하다 죽은 청소년 귀신처럼 침대 앞에 서서 내 다리, 어쩌고 하고 있었다.


“방에 모기 있나 봐. 모기 소리 들었어. 모기가 내 다리 물었어.”

이 집에 모기 킬러는 나뿐이지, 다시 벌떡 일어났다. 하군은 저승사자가 데리러 와도 모를 정도로 죽은 듯이 자고 있다. 혹시 매일 죽었다 살아나고 있는 중은 아니겠지?

방금 전의 시뻘건 유혈 상태에 짐짓 놀란 나는 이번엔 에프킬라를 들고 하리 방으로 가 놈을 찾았지만 십여 분간 꼼꼼하게 살폈음에도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하리와 얘기하는 사이 다른 곳으로 튀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

“없는 것 같은데? 보통 벽에 있거든. 우선 불 끄고 누워. 미끼 전략을 써보자. 모기 소리 들리면 바로 알려줘.”

하리와 말캉말캉한 돌고래 인형을 침대에 뉘이고 안방으로 돌아와 눕자마자 에엥, 소리가 났다. 놈이다! 이놈이 그놈이란 걸 직감한 나는 민첩하게 일어나 불을 켰다.


“으으윽.”

불을 켜면 살아나는 하군이 또 신음소리를 냈다. 천장부터 살폈지만 놈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방에 있어. 꼼꼼하게 벽과 침대 헤드 부분도 살폈다. 안방의 불빛을 본 하리도 왔다.

“있어. 내가 들었어. 분명 아까 그놈이야.”

나는 말하면서도 주의를 놓지 않았다. 육감이여, 발휘해라.


나는 두 부류를 몹시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남의 것을 탐하는 부류, 다른 하나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제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부류다. 모기는 둘 다에 해당하니 나와는 가까워질 수 없다.


모기는 피를 뽑아내기 위해 온갖 병균을 옮기는 위생적이지 않은 빨대를 꽂은 뒤 히루딘(Hirudin)을 분비하는데 이것은 내 혈액의 응고를 방해하여 모기 입장에서는 혈소판을 뚫고 피를 더 잘 뽑아먹을 수 있게 돕는다. 지 먹고살자고 내 혈액의 응고를 막다니, 운이 없으면 피가 응고되지 않아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극한의 이기심으로 제 살 궁리만 하는 아주 파렴치한 생명에게 백번쯤 양보하여 그래, 너도 먹고살아야지, 알을 키우기 위해 암컷 모기만 흡혈한다는데, 같은 엄마 입장에서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고, 해서 내 팔뚝이나 긁기 편한 넓적한 허벅지 정도는 대여섯 방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데 이것들이 신체의 말단 부위, 손가락, 발가락, 긁어지지도 않는 발바닥에서 흡혈을 해 고급 카페에 모여 미팅을 하다가도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발바닥에 손을 대고 꼼지락꼼지락, 하루 종일 온 신경을 거기다 쓰게 만든다. 게다가 사악한 모기는 심지어 얼굴에! 그것도 무려 눈두덩이에! 흡혈을 하는 천하의 뻔뻔하고 상도덕 없는 행위를 하고야 만다. 양심은커녕, 개념은 쥐뿔, 배려라고는 절대 없는, 제 한 몸, 제 새끼만 키우면 그만이라는 극한의 이기심뿐인 것이다. 어둡고 습한 곳을 서식지로 삼아 번식하는 모기는 바퀴벌레, 쥐떼와 거의 동급의 생존력을 가지고 있는데 남에게 피해를 끼치건 말건 제 이익만 위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생존력이 가히 울트라 메가톤급이다.

“아잇, 깜짝이야. 왜 저렇게 커? 저승사자 같다야.”

뭘 먹은 건지 아까 터져 죽은 모기보다 세 배쯤은 큰 덩치의 모기가 짙은 갈색 블라인드에 붙어있다. 덩치가 크다 보니 하얀 천장이나 벽에 붙어있다간 시커먼 것이 당장 눈에 띌 것이 뻔해 이구아나 마냥 비슷한 색깔에 들어가 숨은 것을 보니 생각보다 악랄한 녀석이다.

덜렁거리는 블라인드에 앉아 약 올리고 있는 모기를 타깃으로 하는 맨손 폭격은 내가 불리하다. 블라인드를 치자마자 블라인드의 강한 요동침은 타격 파급력을 떨어뜨릴 것이고 그 틈을 타 녀석이 순식간에 튀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나에게는 화학 무기와 같은 신무기가 필요하다.


에프킬라를 다시 손에 쥘 때까지 녀석은 블라인드에 꼼짝 않고 그대로 있다. 모기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죽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녀석들은 엔간해선 자리를 이동하지 않는다. 제 딴에는 확실히 잘 숨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에프킬라의 구멍을 영점 조준하며 녀석을 정조준했다. 한 방으로 끝나야 하는데, 요즘 모기들은 독해서 에프킬라를 맞고도 날아다니다. 더구나 에프킬라를 맞고 미친 것처럼 더 펄럭거리며 발광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징그럽기까지 하다.


생명 존중으로 인한 망설임 끝에 우유부단하게 분사했다간 액이 모기의 날개에 닿기도 전에 이상을 감지한 모기가 냅다 튀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자비로운 마음은 집어치우고 한 번에 집중적으로 강하게 분사한다, 는 것이 모기 살생 계획이다.


치익, 강하게 분사된 에프킬라 액이 모기의 등 한가운데 정확하게 맞은 것이 아니고 모기 오른쪽 뒷다리를 스치자마자 모기가 메뚜기 날아오르듯 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잡았어? 죽었어? 어떻게 됐어?”

인형을 아기 다루듯 꼭 끌어안고 하리가 물었다.

“맞은 거 같은데 도망갔어.”

에프킬라를 블라인드와 주변에 추가 분사하며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을 모기를 찾았지만 모기 사체는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하군은 곤히 자고 있다. 자리에 다시 누웠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한 모기 사체 생각에 찝찝함으로 뒤척였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창문을 열었다 곧 닫았다. 창문에 바람이 요란하게 부딪치는 것을 보며 오래된 창틀이 뜯어질까 걱정보다 이렇게 비가 몰아치니 한 장도 빨지 못할 작은 언덕만큼 쌓여있는 이불에 시선이 갔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엔 익숙해 괜찮다.


하리와 사로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머리가 어지러운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리에게 감기가 옮은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내가 감기 전파자였는지, 검사로 잡아내지 못한 코로나인지 요 며칠 나 역시 콧물이 나오고 코가 막혀 머리가 무거운데 간밤에 모기 두 마리와 혈전을 벌이느라 잠이 들었다 깼다 하는 바람에 생체 리듬이 완전히 엉망이다.

“나 어젯밤에 모기 두 마리나 잡았어. 알고 있었어?”

외출 준비를 하는 하군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모기가 어디서 온 거야?”

와! 알고 있었대. 이 빙구 남편이.

하군은 실직 상태임에도 이상하리만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평소처럼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7시쯤 나간다. 무척 성실한 백수다. 하루 종일 어디서 뭐 하고 있다 들어오는 걸까? 일 그만둔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아침마다 가방 들고 옷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가서 헤매고 들어올 이유가 있나? 어째서지?


혹시, 나랑 있는 게 불편한가? 내가 나가줘야 하나?

하군이 일을 할 때보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올 때보다 하군의 하루가 무척 궁금하지만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고. 나도 나름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 하군이 몹시 수상하지만, 오늘 같은 컨디션이라면 하군이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가 있는 편이 낫다. 잠이 든 것은 확실히 아니나 내 육신을 빠져나온 영혼과 모닝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잠이 든 것인지 깬 것인지 헷갈리는 몽롱한 상태로 누워있는데 재수 학원 선생과 통화를 마친 하리가 다가왔다.

“선생님이 증상 있으면 집에 있어도 된다는데.”

하리가 털썩, 옆에 누웠다.

“그래? 그럼 엄마 좀 자도 돼지?”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잠이 들지는 못하고 하염없이 어지러운 상태로 누워있었다. 지난밤 내 손에 터져 비참하게 죽은 모기가 남긴 천장의 혈흔 자국이 빙글빙글 시계방향으로 돌았다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사로가 나가는 것을 본 뒤, 세탁기에 수건과 베개커버를 주섬주섬 넣었다. 평소처럼 불림을 하려고 버튼을 눌렀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여 자주 사용하는 ‘불림’ 버튼이 먹지 않았다. 설마, 세탁기가 고장 난 건가? 심지어 ‘불림’ 버튼이? 나는 다른 부수적인 기능 다 필요 없고 ‘불림’ 이거 하나면 되는데? 하군이 실직 상태인 이 와중에 세탁기 너마저? 하필, 지금. 가전제품 교체 시기와 하군의 직장 교체 시기가 겹치는 것은 꽤 곤란한데 말이다.

하리가 집 근처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코로나 음성 판정을 받았으나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의사의 소견이 있으면 등원이 가능하다. 콧물이 계속 나오고 기침을 하는 하리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처방전을 받아 오는 길에 김밥을 사다 주었다. 컨디션이 엉망이니 점심은 간단하게 김밥으로 때우면 되겠다, 했는데 하리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도착한 지 십 분쯤이나 될까 말까 하는데, 일찌감치 하리가 사다준 김밥을 점심으로 먹고 낮잠을 조금 자려고 했는데, 띡띡띡, 하고 현관문이 열리고 그가 나타났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벌건 대낮에 하군이!


“점심 뭐 먹지?”

점심시간에 맞춰 들어온 모양인지, 들어오자마자 점심 타령이다.

“(난 간단하게 김밥으로 때우려고 했는데) 뭐 먹고 싶어? 오징어 데쳐줄까?”

“그건 저녁에 먹어야지.(맥주랑) 간단하게 먹을 거 없나?”

“(간단하게 네가 알아서 먹으면 안 되겠니?) 국수 삶아줄까?”

“오, 그래. 그게 좋겠다. 만두도 있나?”


흔들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 얼굴 가까이로 다가오는 바닥을 피해 한발 한발 주방으로 가 냄비 두 개를 꺼내 한 개에는 국수 삶을 물을 끓이고 다른 한 개의 냄비에는 찜기를 올려 냉동만두를 꺼내 가지런히 올렸다. 물이 끓고 만두가 쪄지는 동안 세탁기에서 수건과 베개커버를 꺼내 앞 베란다에 가져가 널고 주방으로 돌아와 그사이 다 쪄진 만두를 꺼내 접시에 담고 국수를 삶아 우동 그릇에 옮겨 담았다. 김치는 정작 한 두 쪽 먹을 뿐이지만 김치 없으면 밥을 제대로 차린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하군을 위해 볶음 김치도 꺼내 주었는데, 차린 거 없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땀이 나지?


일을 그만두었음에도 하군은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전쟁터 같은 밖으로 나갔다 오후 네 시쯤이 되면 녹초가 되어 들어온다. ‘아는 사람’과 한 잔 하여 붉게 닳아 오른 얼굴 표정이 예전처럼 밝지 않은 것이 염려스럽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슨 일에 건 소년처럼 들떠하고 기뻐하던 하군은 이제는 서서히 신나는 것이 줄어든다. 머리부터 먹힐지 꼬리부터 먹힐지의 긴장 앞에 웃음을 잃은 무표정한 붕어빵 얼굴의 어른이 되는 중이다.


우린 결국 내려가고 있는 중인 걸까. 계속 내려가다 바닥을 기게 될까. 이 업종에 몸담은 지 이십 년. 이십 년을 일해도 기회는 없었다. 이십 년을 간신히 버티고 난 뒤 결국엔 내려가고 있다. 이십 년을 몸담아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다. 하군에게 그만 나오라고, 지금이라도 다른 것을 알아보자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무엇을? 이십 년이 지난 우리에게 이십 년 전보다 나은 기회가 있을까.


무섭다. 하군, 하리, 사로 그리고 나, 네 명의 몫만큼 무서움이 네 배로 가중된다. 중간 정도는 살겠지,라고 짐작했던 사 년제 대학을 나온 순진한 젊은 부부는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거라며 이십 년 동안 욕심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판단 미스를 계속했다. 중간만 되어도 만족한다 했는데 중간조차 보장할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에 켜놓은 흔들리는 촛불에 비친 시커먼 괴수 모양의 그림자처럼 공포와 좌절감이 요동친다. 왜 이렇게 꾸준히 힘든 걸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지친다. 이런 삶.

신비롭고 아름답지만 해질 무렵의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쓸쓸한 감정이 찾아든다. 때로는 불쑥, 두렵기도 하고, 외로운 마음도 든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면 저물어 가는 삶 끝에 닿아있는 생애 마지막, 죽음에 관하여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는데, 오늘 당장 죽어도 아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이런 마음가짐이다 보니 눈에 뵈는 게 없고 세상 무서운 것이 없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은숙 씨가 말했다.

“이제 네 몸은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자식들 생각해서 살아야지. 힘들어도.”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나쁜 짓거리는 하지 말자, 고 쥐뿔도 없긴 하지만, 이따구 세상에서 거칠 것 없는 깡다구로, 내가 돈이 없지, 도덕이 없냐, 내가 별 볼일이 없지, 시민의식이 없냐, 아무것들에게도 주눅 들지 말고 올바르게 살다 가자, 심장 부근에 발생되는 것이 틀림없는 미세하고 예리한 통증이 느껴지는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다짐한다. 몹시 멜랑꼴리 하지만 용기 있는 애잔한 다짐이다.

하군이 누구랑 통화를 하며 미팅이 어쩌고, 한다.

“일 그만뒀는데 미팅이 있네.”

하군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하군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일 그만둔 거랑 미팅이랑 무슨 상관이야?”


이건 또 무슨! 내가 빙구야? 하군이 빙구야? 어째서 우리 대화는 이 모양이지?


“내 말은 그게 아니고, 회사를 그만두었는데도 계속 일을 하네, 이 말이지.”

실직 상태인 하군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표현에 쓸데없이 예민하게 반응할까 봐 더욱 다정하게 말을 붙여본다.

“회사 그만두면 일 안 해?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이 빙구를 그냥, 확!


“아니, 그니까 내 말은, 대게는 회사를 그만두면 일을 안 하지 않나?(이쯤에서 나도 헷갈린다. 요즘은 회사를 그만두어도 계속 일을 하나?) 하는 말이지”

“그럼 계속 일하지. 안 해? 내가 은퇴를 한 것도 아니고.”

오, 하늘이시여, 세탁기에 이어 혹시 남편도 교체해야 하는 시기인가요? 식탁 옆 커다란 창문으로 보이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뿌연 하늘에다 대놓고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전쟁이 나서 당장 피난 가야 되면 뭐 갖고 가야 되지?”

“음~~~~, 너?”

“진지하게. 짐 챙겨놓을 거거든.”

“갈 데가 어딨어? 그냥 있어야지. 요즘 전쟁은 그냥 끝나. 피난? 글쎄?”


안 하련다. 빙구랑 더빙구는 대화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다. 방역당국의 지침대로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다니더니 언어 발달과 이상 행동을 동반한 사회적 기술성 저하 증상이 심해졌다. 대화를 좀 해볼라치면 이 평화롭고 잔잔하던 집구석이 순식간에 말꼬리 유도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전쟁터가 된다. 도망갈 데도 없다. 그냥 각자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로.


때린 데 또 때리고 아픈데 꼬집는 것처럼 안 좋은 일은 꼭 연달아 온다. 이래도 안 죽어? 이래도 안 뒤질래? 나를 완전하게 아작 내기로 작정한 것처럼 불운은 한 번에 온다. 비록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지적이고 성숙한 대화는 실패했지만 맛있는 저녁은 성공하고 싶었다. 저녁을 하기 위해 쌀 두 컵에 찹쌀 한 컵을 섞어 밥솥에 쌀을 넣고 뚜껑을 닫은 뒤 취사 버튼을 눌렀다.


‘띠릭, 띠릭.’


밥솥에서 나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밥 할 때마다 나사 하나 빠진 고철 로봇이 내는 것 같은 저런 소리 낸 지 꽤 되었다. 곧 닥칠 불행의 징조를 무시하고 꿋꿋하게 십 년도 훨씬 더 된 오래된 밥솥에 밥을 해 먹고 있었을 뿐이다.


“취사가 취소되었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나사 빠진 고철덩어리처럼 심상치 않은 ‘띠릭, 띠릭’ 소리를 반복하던 밥솥이 ‘취사가 취소’라고 멋들어진 라임을 뱉어냈다. 밥솥 너까지 왜 이럼? 우린 지금 가장이 실직 상태인 대 위기 상황이란 말이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하늘이시여,라고 할 일은 아니다. 대게, 가전제품은 비슷한 시기에 구입하는 경우가 많으니 교체도 비슷한 시기에 하게 되는 것뿐.


하군은 회사에서 잘리고, 하군이랑 쉬운 대화 하나 못하고, 삼수생 하리는 사수를 할 것이 확실하고, 재수만은 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재수를 하고야 말 것 같은 사로, 세탁기에 이어 밥솥까지 저 모양이니, 나도 밥 못하겠다! 고 하군에게 선전 포고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그랬다. 먹는 거로 치사하게 구는 거 아니라고. 실직한 하군에게 밥을 안 해주는 것은 하군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치사스러울 거라는, 엄마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침착하게 싱크대 하부장에 넣어둔 스테인리스 솥을 꺼냈다.

후훗, 냄비밥 실력을 보여주겠어.


전기밥솥 뚜껑은 꽤 뜨거웠다. 압력을 풀고 뚜껑을 열어보니 쌀이 한 번 끓었던 흔적이 보였다. 끓은 쌀 몇 알을 먹어보았더니 뜨거운 생쌀이었다. 장갑을 끼고 밥솥에 있던 끓은 쌀을 스테인리스 솥에 옮겨 담았다.

그런데,

내가 생쌀로는 냄비 밥을 곧잘 하는데,

끓은 쌀로 밥 하는 건 처음이어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밥 할 때처럼 긴장되었는데,

맘마미아,

밥이 평소보다 많이 질어 이게 밥인가, 죽인가, 떡인가, 싶지만

다행히,


하리가 너무 맛있다며, 더 먹고,

원래 진밥을 좋아하는 하군도,

고슬고슬한 밥을 선호하는 사로도,

오늘따라 밥이 왜 이렇게 맛있냐며 평소보다 많이 먹었는데,

그건 아마도 따끈한 흰쌀밥에 스팸 한 조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하얀 쌀에 섞어 넣은 찹쌀 때문이었을까?

저녁을 먹은 하군이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다음 주 애들 학교 안 가더라.”

“그래서?”

“어디 놀러 갈까? 요즘 날씨 엄청 좋은데. 공기도 깨끗하고. 하늘 봤어? 하늘도 엄청 예쁘잖아.”

“너 지금 백수야.”(취업이 안 될 수도 있지 않나?)

”그니까. 백수일 때 놀아야지. 일하면 놀러 못 다녀!”

하군이 백수가 되어서 가장 걱정 많은 사람은 뜻밖에 나인가 보았다. 가장 위기인 이 시기에,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인지도 모르는 이 시기에 차라리 저런 여유를 아는 마음가짐의 하군이 좋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하루가 참 무시무시하게도 잘 간다.”

뒷정리를 하며 말하는 걸 하리가 들었다.

“왜 한 게 없어? 마추 산책도 시키고, 글도 쓰고, 집안일도 하고 밥솥이 고장 났지만 냄비로 이렇게 맛있는 저녁도 만들었는데.”


하리가 드라마 대사에서나 나올 법한 감격스러운 말을 해주었다. 맞아.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지만 뭘 하긴 했어. 식구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비 맞으며 마추랑 거리를 거닐기도 하고, 집안 정리도 하고, 화장실 변기도 닦고, 고장 난 밥솥 대신 냄비로 밥을 했지. 불운이 폭격하는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았어. 쓰러졌지만 죽지 않았어. 운이 따라주지 않는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현실에 적응하려 답을 찾기도 했지. 내일도 틀림없이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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