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오솔길을 걸었다. 맞은편에 중년 부부가 걸어왔다. 산책길에 종종 마주치는 부부다. 말을 섞어본 적은 없지만 부부의 비슷한 인상은 금실 좋은 점잖은 사람들일 거라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부부 중 여자가 활짝 웃으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여자가 말을 건 것은 처음이다.
“어제 봉사하던 분 아니세요?”
“네, 맞아요.”
부부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가던 길을 갔다.
하얀 와이셔츠에 짙은 남색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왼손에 재킷을 들고 있다. 오른손으론 담배를 들고 있다. 남자는 네 걸음에 한 번 담배를 물었다. 남자가 곁을 지나가자 담배냄새가 남자를 졸졸 뒤따라 갔다.
나는 멀끔하게 잘생긴 남자가 담배꽁초를 어떻게 처리할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원을 벗어나 길을 건너기 전 남자의 담배꽁초는 아침 이슬이 촉촉한 연둣빛 잔디밭으로 날아갔다. 담배를 참기란 어려운 일이고 담배꽁초 버릴 데도 마땅찮고, 어쩔 수 없이 추접스러운 행동을 하고 마는 흡연자들의 애로사항이다.
흡연자에게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자는 비흡연자를 선호했다. 지인이 물었다.
“그럼 첫 만남에 흡연 여부를 물어봤어?”
“응.”
소개팅 자리에서 나는 남자의 재력이나 연봉이나 집이 자가인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를 묻기보단 ‘혹시 담배 피우시나요?’라고 물었다.
내가 결혼할 당시 성인 남자의 흡연율은 50퍼센트 언저리였으니(20-30대 남자의 흡연율은 30%대) 나는 절반가량의 남자를 차근히 알아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은 셈이다. 누구에게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있는 법이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성인 남자 흡연율이 90퍼센트였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적당히 현실과 타협했을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술하다. 편하고 안정적인 상황에서의 호불호는 신념이라기보다는 기호식품 고르는 정도의 취향이다. 차라리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고 말하는 편이 솔직하다.
지붕 있는 정자 앞에 담배꽁초 열몇 개가 떨어져 있다. 담배는 누군가의 근심이고 누군가의 스트레스 해소법이고, 누군가의 고독이고, 누군가의 불만이고, 누군가의 분노이고, 누군가의 고민이고 누군가의 외로움이다. 누군가에게는 위로이고 누군가에겐 맛과 멋이다. 뭔가 잘 안 풀리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버려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다. 단연 최고의 저주는 배속의 아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닮는다는 말일 것이다.
유치원 때 사교육을 시작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면 복도에 서 있어야 하는 영어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교 고학년쯤 토플 어휘를 암기하고, 중학교 들어가기 전 중학교 수학을 끝내고 고등학교 입학 전 고등 과정을 모두 끝내버린 후 고등학교에 들어가선 반복적으로 문제풀이 연습을 해야 의대 또는 스카이 정도 들어간다는 우리나라는 공부에 진심인 나라 같지만 사실은 공부에 미친 나라가 아니다. 돈과 권력에 미친 사회다. 어쩌면 잠재적 목적은 기회만 된다면 지독하게 무자비한 탐관오리인지도 모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원래 책임감에 대한 것이었으나 요새는 자리에 앉아 완장이라도 차고 칼자루라도 쥐어주면 ‘거 봐. 너도 똑같은 인간이잖아. 고상한 척하고 욕심 없는 척하고 도덕적인 척하더니.’ 악독하고 잔인한 탐욕인이 되는 것을 비꼬는 것 같다. 과도한 사교육비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노후 준비를 못한다고 욕하는 입시 경쟁은 따지고 보면 돈과 권력을 위한 과정이다. 돈이 곧 힘이고 권력은 또 다른 부를 만들어주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발달 단계를 무시한 선행학습, 지나친 입시경쟁, 대입 서열화를 얼굴에 핏대를 세우며 욕하면서 입시경쟁은 내가 대학 들어갈 때보다,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보다도 심해졌는지 태어나자마자부터 지독하게 열심히 살았건만 허무해 죽을 지경인 번아웃 체념 상태가 되었다. 취직도 싫고, 연애도 싫고, 결혼도 싫고, 출산도 싫고, 육아도 싫단다. 다 싫단다. 그 아이들을 낳고 키운 사람들이 요즘 젊은 애들은 이기적이라고 욕한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은 승부욕 강한 사람을, 질투 많은 사람은 샘 많은 사람을,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 많은 사람을, 남에게 인색한 깍쟁이는 짠돌이를, 완장 욕심 있는 사람은 라이벌을 견제하고 미워하는 경우는 흔하다. ‘욕하면서 닮는 것’이 라기 보단 애초에 비슷한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기요, 아가씨!”
환경미화원이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저, 저 말이에요?”
지나가는 행인은 나뿐이다.
“쓰레기 여기다 버려요.”
환경미화원이 50리터 짙은 바다색 비닐봉지를 열어 보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중하게 손사래를 쳤다. 플로깅 활동을 마친 후 봉투에 가득 담긴 쓰레기 사진을 찍어 톡방에 올려야 한다. 일종의 인증 겸 동네 쓰레기 자랑이다. 하지만 선의를 베푸는 환경미화원에게 친절하고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무거우니까 여기 버려요.”
50대쯤 되어 보이는 맑은 눈빛의 환경미화원이 거듭 재촉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서... 거기다 버리면, 음, 쓰레기 담을 데가 없어서요...,”
강약약강에 비하면 강강약약은 얼마나 쉬운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세상 사악한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단호하게 정색을 할 수 있을 텐데, 깨끗한 새 봉투를 펼치더니 어서 그 더러운 쓰레기를 기꺼이 나에게 버려다오, 하고 팔을 내밀고 있는 고운 여사님의 세상 다정한 눈빛을 거절하는 것은 어렵다.
“봉투만 비우면 되잖아요.”
아 참, 이 아가씨 별 것도 아니고만, 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환경미화원이 말했다.
“아하, 그러면 되겠네요. 하하하하!(그러면 안 되는데, 쓰레기 사진 톡방에 올려야 되는데.)”
환경미화원이 내가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네받아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바다 빛깔 파란 봉투 안에 쓰레기를 쏟아부었다.
“감사합니다.”
쓰레기봉투를 되돌려 받고 나는 환경미화원에게 인사했다. 자전거 뒷자리에는 대형 아이스박스만큼 커다란 수납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전거에 올랐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 뒤로 수납함 위에 얼굴을 빼꼼히 내민 빨간 쓰레받기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좌우 양쪽에 호위무사처럼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연두색 플라스틱 싸리비와 나무 싸리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깅 #줍깅 #쓰담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