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아침 일찍 나는 장비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놀이터는 경로가 아니지만 지나가는 김에 들른다.
이른 아침 인적 없는 놀이터엔 쓰레기가 눈에 잘 띈다. 지난밤엔 어른들의 파티가 벌어졌는지 벤치며 정자 위에 파티 흔적이 남아있다. 페트병, 커피 캔, 맥주 캔, 진저에일, 뭘 닦아낸 휴지. 다양하다. 그네와 시소와 미끄럼틀이 있어도 놀이터는 어린이들만 노는 곳이 아니었구나. 아이들, 청소년들, 어르신들 모두가 재밌고 편하게 놀 수 있도록 다음 달엔 놀이터 위주로 경로를 지정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베이지색 머리끈과 가느다란 랫테일 빗을 두 개나 주웠다. 머리로 뭐 한 거지? 머리를 빗으며 놀았나? 귀신 놀이라도 한 것인가? 정자 앞에서 같은 무늬의 담배꽁초를 스무 개쯤 주웠다. 그 자리에서 한 갑을 다 피워낸 모양이다. ‘이 담배꽁초들의 주인은 아마도 남자일 거야. 연령대는 중년 이상이겠군.’ 스무 개의 담배꽁초에는 립스틱이나 립밤의 흔적이 없이 깨끗하다. 잘못짚었을 수도 있다. 혼자 코난 놀이 중이다.
데이터를 입력하다 핸드폰을 또 떨어뜨렸다. 한 손은 집게 전용이다. 다른 한 손을 쓰레기봉투와 핸드폰을 잡는데 나눠 쓰고 있다. 손이 한 개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베이지색 벙거지를 쓴 노인이 조금 전 내가 치운 벤치에 앉는다. 노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놀이터며 공원에 나온다. 노인이 오기 전 깨끗이 치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두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집에서 나오기 전 확인한 예보보다 한 시간 이르게 비가 떨어진다. 소형 강아지와 산책을 하던 중년 여자가 강아지를 부른다. “비 오니까 빨리 들어가자!”
강아지도 감기에 걸린다. 강아지는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 대부분을 걸린다고 알고 있다. 여자가 재촉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나는 비를 피해 정사각형 정자에 앉았다. 오전에 한두 시간 내린다던 예보는 그새 태세를 전환하여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고 시치미를 뚝 뗀다. 기온은 18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비 오는 거리를 우산 쓰고 걷고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던 외국의 어느 거리를 떠올린다. 그곳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공기가 깨끗해서일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늘을 보았다. ‘산성비 맞으면 탈모 온대.’라는 말을 들어왔던 나는 마셔도 될 것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는 환경에서도 우산을 쓰고 다녔다. 습관이라는 게 이렇다.
‘더 갈까, 돌아갈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정자 그늘 아래 앉아 생각한다. 오늘 하루 종일 내린다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공원엔 사람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지런히 이동 중이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우산 없이 걷는 사람도 있다. 나도 슬슬 결정을 해야 한다.
다행히 두두둑, 하며 정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비를 좀 맞기로 결정한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다. 언제까지 비가 멈추길 소극적으로 앉아 기다릴 수 없다. 비를 맞더라도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감기에 걸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일주일이면 회복할 테니까. 두 번이나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 핸드폰이 심지어 방수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 듯하다. 마스크를 벌써 열 개나 주웠다. 골목에서 주운 복숭아 빛 마스크는 쓰레기지만 곱다. 실크스카프도 주웠다. 보물을 찾은 기분이지만 엄연히 쓰레기다. 초등학생의 보조가방도 주웠다. 엄마한테 혼나지 말아야 할 텐데. 별의별 쓰레기를 다 줍는다. 남성용 검정 고무 깔창은 신호를 기다리던 중 횡단보도 옆에서 주웠다. 벗겨진 인조 손톱만큼이나 한 짝만 버려진 검정 깔창은 괴기스러운 기운을 풍긴다. 벤치 아래엔 껍데기가 벗겨져 갈비뼈처럼 쇠붙이만 남은 자전거 안장이 있었다. 바디 워시 빈 통은 화단 울타리 위에 다소곳하게 놓여 있다. 왜 이런 곳에 이런 자세로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담배꽁초는 뭐, 말하기도 지겹다.
음식점 홍보 전단지를 공원 경계석 위에 스카치테이프로 고정해 놓았다. 오늘 아침엔 유독 피트니스센터 홍보 전단지가 많이 보인다. 먹고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걸까. 생계를 위협받는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 있고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도 할 수 없다. 몇 천 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부처나 예수 정도 아니고는 배고픈 성인군자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편을 택할 것이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버티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대안도 없이 마냥 비난할 수 없다. 대안 없는 비난은 오지랖이고 잘난 체이며 똑똑한 척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버리듯 던져놓은 수십 장의 전단지들은 생계를 위협받는 사람이 많다는 답안지일 텐데 분노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는 무관심한 듯하다. 거리의 쓰레기를 보며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적극적으로 쓰레기의 원인을 개선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그래서 매일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관대하게도 모두가 불편함을 감수한다.
사부작사부작 몸을 움직이며 공간을 정리하듯 쓰레기로 어질러진 어수선한 거리의 쓰레기를 줍는다. 거리를 걸으며 어두운 마음을 쓰레기봉투에 같이 담아 버린다. 거리의 쓰레기와 함께 감정의 쓰레기도 하나씩 치우며 마음을 정리 정돈한다.
마음에 너무 집착할 필요 없다. 마음은 실체가 없다. 내가 왜 이렇게 사나,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 싶은 생각이 들면 즉시 걷어내 버리는 정리 습관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늪에 빠져 마음 안에 갇혀버리기엔 흐르는 시간이 아깝다.
낮에는 파란 하늘을 보고 저녁 무렵에는 찬란하게 펼쳐진 노을을 보고 밤에는 달과 별을 보며 걷는다. 오솔길을 걸으며 나무 사이로 비취는 햇살이 닿는 기분 좋은 감촉을 느낀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자연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새 힘을 얻는다.
20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가득 찼다. 한 손으로 들고 걸으려니 무겁다. 그만 줍고 들어가자,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늘은 그만 주워야지.’ 하지만 얼마못가 또 줍는다.
손가락에서 꼬물거리는 참깨보다 작은 붉은 개미인지 거미인지가 집까지 따라 들어올까 봐 신경 쓰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름 끼치는 빨간 작은 벌레를 검색한 결과 녀석의 이름은 ‘다카라다니’, 별명은 시멘트 벌레이며 생긴 것과 달리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생은 고통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다. 인생은 싸리비를 들고 내 앞을 쓸면서 나가는 청소다. 매일 쓰레기가 버려지는 거리처럼 매일 쓰레기 같은 감정이 먼지 날리는 마음에서 매일 쓰레기를 치우고 방을 정리하듯 어두운 감정도 그때그때 부지런히 정리하고 치운다. 긍정적인 기억들과 추억은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하고 아픈 경험들과 슬픔의 기억은 안 보이는데 둔다. 어느 날 문득 대청소하는 날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낀다면 버린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고 오는 사악한 에너지가 걷혔다. 부처님 오신 날, 비를 맞으며 어른스럽게 생각한다. 버릴 건 버리고 비울 건 비우고 덜어낼 건 덜어내야지. 가볍게, 상쾌하게 살아야지. 남은 힘을 세상에 내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