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충전기를 두고 나왔다

오늘은 그럴 차례였나 보다. 이번엔 충전기였을 뿐

by 구름


여전하다. 오늘도 그 중요한 걸 까먹고, 그 중요한 걸 잊는다.

어떻게 보면 어이가 없지만 늘 여전한 adhd 성인의 하루이자 일상.

누군가는 '뭐~ 가끔 깜빡할 수도 있지' 할 수 있는 일들의 반복.




토요일이지만 여김 없이 출근하는 날이라 노트북을 챙겨 매장으로 향했다.

차도 없어서 가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일하는 틈틈이 글을 쓰고 싶었다.

요즘 내 머릿속이 워낙 복잡해서인지, 쏟아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노트북만 있으면 하루 종일 쓰고 먹고 자고, 다시 쓰며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지금의 나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런데 노트북을 켜는 순간 깨달았다. 충전기가 없었다.


순간, 어제의 내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배터리가 없던 걸 봤으면서도, 왜 충전을 안 하고 잤을까.

아니, 어제는 대체 뭐 하다가 잤지? 기억이 안 난다.

이럴 때면 진짜 내가 기억상실증인가 싶기도 하다. 어제 한 일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뒤늦게 충전하면서도 찝찝했다.

‘지금 꺼내면 또 까먹는 거 아니야?’ 하는 불안한 마음에, 스스로 다짐했다.

“에이, 설마. 까먹지 말자. 이번엔 꼭 챙기자.”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는데, 결과는 역시나였다.

충전기는 집에 그대로, 나는 또다시 허공을 바라봤다.


이젠 화도 잘 안 난다.

“또 이래?” 하는 자책도, “진짜 왜 이러냐”는 분노도 어느 순간 무의미해졌다.

그냥 뇌가 기억을 못 하는 거다. 그러니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그래, 노트북을 닫을 때 바로 충전기를 챙겼어야지. 그게 잘못 된 거다.

그래도 이제는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그냥 그럴 차례였나 보다. 이번엔 충전기였을 뿐이다.


충전기.png



어제도 친구와 계단을 내려오다가 물웅덩이를 못 보고 밟아버렸다.

결과는 친구 바지에 더러운 물이 튀는 참사였다. 내 옷이 아니라서 더 미안하고 당황스러웠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미안한 표현을 찾고 싶었다. 대체 왜 그 물 웅덩이를 못 본거지...? 해도 해도 주의력이 너무 없잖아.

왜 나는 늘 이런 식일까. ADHD는, 사실 스스로가 제일 이해가 안 된다.



ADHD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듣는다.

“왜 이렇게 산만해?”, “조금만 집중하지?”, “이거 또 깜빡했어?”

이런 말들이 계속 쌓이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그 반대로 가고 싶어진다. ‘완벽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 ‘실수하지 않아야 인정받을 수 있다’. 그게 바로 ADHD 완벽주의의 근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누군가의 눈초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한 번의 실수를 몇 날 며칠 곱씹으며 괴로워한다.

완벽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정작 그걸 뒷받침할 집중력이나 기억력, 조직력은 뇌의 구조상 쉽게 지치고 흔들린다. 그러다 보면 또다시 자존감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나를 다시 자책으로 몰고 간다. 실수 → 자책 → 위축 → 더 실수 → 더 자책. 끝도 없는 루프다.


일반 사람들은 실수하면 “아, 실수했네.” 하고 넘기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또 이래. 왜 이렇게 못하냐.”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린다. 그러면서 점점 위축되고,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는 걸 느낀다.

하지만 이제부턴 조금씩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노력 중이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남들보다 빨리 피로해지는 사람이다.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계획을 세우는 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환경 구조화’가 필요하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

환경을 ADHD 뇌에 맞게 세팅해 줘야, 비로소 나답게 움직일 수 있다.


아, 그렇다고 “난 ADHD니까 당신들이 이해해줘야 해” 이런 식의 당연한 태도는 금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어려움을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 면죄부로 삼을 순 없다.

날 사랑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배려해 주는 것이지, 그 배려가 의무가 되어선 안 된다.


assets%2Ftask_01k78vzwn6ex99trbr2vjb1gmc%2F1760160715_img_0.webp?se=2025-10-11T09%3A36%3A49Z&sp=r&sv=2024-08-04&sr=b&skoid=8ffff87a-01f1-47c9-9090-32999d4d6380&sktid=a48cca56-e6da-484e-a814-9c849652bcb3&skt=2025-10-11T05%3A08%3A30Z&ske=2025-10-11T06%3A18%3A30Z&sks=b&skv=2024-08-04&sig=srMg8YWvF%2BFmrO1LtLFZyZ9ddaK%2BxTUZ3MOed4iGGaI%3D&az=oaivgprodscus


사실 나도 안다. 가끔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으니까.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왜 알면서도 이해 못 해줘? 나 ADHD라니까!’

그렇게 부모님에게, 형제에게, 친구에게 서운함이 슬쩍 고개를 든다. 그러면서도 사실 마음이 복잡해진다.

ADHD는 나의 일부지만, 그게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민폐를 입혀도 되는 이유는 아닌 건데...


그러니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조금 덜 미워하면서, 조금씩이라도 성장해 보는 것뿐이다.

조금의 노력을 더해가는 것이다.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그래서 여러 가지를 실험하듯 살아보고 있다.

중요한 일은 눈앞에 붙여두고, 알람은 두세 개씩 겹쳐두기.

뭐든지 한 번에 하지 말고, 나눠서 조금씩 해두기. 까먹으면 그냥 받아들이고 웃는다.

계획을 이곳저곳에 디테일하게 세워놓자. 생각나는 것들은 모조리 적어두자.

실수는 나의 일부다. 다만, 그걸 조금 덜 괴롭게 만드는 법을 배우는 중일뿐이다.


오늘도 충전기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50 퍼 남은 걸로 이 글을 썼잖나. (지금은 40 퍼)



keyword
작가의 이전글탈락의 연속, 그것조차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