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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제영 Jan 17. 2018

앎과 인지

내면 발달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주 사용해서 소크라테스의 격언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 이전부터 사용됐다. 

그런데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서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어떻게 알아야 할까? 

이에 관해 살펴보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이 격언을 왜 자주 사용했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일화를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에의 친구인 카레이폰 역시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곧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했다.

어느 날 카레이폰은 델포이 신전의 무녀에게 그리스의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보았다.
무녀의 대답은 “소크라테스”였다.

이를 들은 카레이폰은 소크라테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를 들은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스의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지식과 기술 그리고 명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소크라테스는 알게 되었다.
그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그 신탁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 사용된 ‘알다’는 지식이 아닌 지혜와 연결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말의 ’앎’ 혹은 ‘알다’라는 낱말은 크게 두 가지의 뜻을 지닌다. 


하나는 무엇에 관한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가령 누군가가 무엇을 말할 경우, 이를 듣고 자신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이 경우에 해당하며, 이때 머릿속의 저장된 지식은 앎에 해당한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 자신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아는 경우이다. 이 앎은 외부 세계의 대상을 감각을 통해 아는 것이다. 또한, 자기 마음속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혹은 움직이고 있는 그 무엇을 아는 것이다. 


이 앎은 앞의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앎과 달리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혜 배움 명상에서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아는 것을 전자의 앎과 구분하기 위해 인지라고 부른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본다. 

우리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아는 만큼’은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앎을 의미하며, '보인다’라는 낱말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안다는 뜻이다. 즉 전자는 지식과 경험의 ‘’을 의미하며, 후자는 ‘인지’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앎이 인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된 필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앎이 인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아마 그때가 필자의 초등학교 입학 전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어머니는 늘 라디오를 켜 놓은 채 집안일을 하셨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던 필자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사실 그 노래를 그전에 몇 번 들었기에 일부 가사를 외울 정도가 되어 있었다.)


“엄마, 왜 노래 가사에서 ‘충청도 사람을 다 마셔버렸네’ 라고 해?“


그런데 실제 가사는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였다. 그 노래를 들었던 당시 필자의 의식 속에는 ‘청춘’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의 어머니는 충청도가 고향이었기에 , ‘충청도 사람’이라는 표현이 필자의 의식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결과 필자는 ‘청춘도’라는 소리를 ‘충청도’로 그리고 이어 나오는 ‘사랑’이라는 소리 역시 ‘사람’으로 인지했다. 즉 어린 필자는 언어 인지의 오류를 범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류가 발생하는 것일까? 이는 언어 인지 과정에서 의식이 말소리에 담긴 의미를 인지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앎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언어 인지의 오류는 가끔 성인에게도 발생한다.


이번에는 일상에서 우리가 실제 겪는 ‘화’를 통해 ‘앎’과 ‘인지’를 살펴보자. 


아이나 어른이나 ‘화’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런데 ‘화’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자신이 정작 화가 났을 때, 화가 났다는 사실을 (재빨리)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왜 화가 났다는 사실을 재빨리 아는 것이 어려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두 가지 ‘앎’의 의미부터 먼저 자세히 살펴보자. 


‘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자신이 화가 났을 때 이를 (재빨리) 아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전자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며, 후자는 ‘화’에 관한 기억 정보만이 아닌 현재의 시간 속에서 ‘화’의 실제적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전자는 현재의 마음에 불편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후자는 현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불편함의 에너지를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 속에 저장된 화의 정보를 아는 앎과
화의 실제적 존재를 느끼는 앎은
분명히 다른 앎이다.

그런데 전자와 후자는 전혀 관계가 없는 앎인가? 그렇지 않다. 전자는 후자의 앎이 가능하기 위한 바탕이 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만약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과거에 화를 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화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보가 뇌에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는 화에 관한 경험 정보이다. 과거에 자신이 화를 내었던 기억이나 혹은 다른 이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들은 경험 정보가 뇌에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이러한 경험을 ‘화’라고 칭하는 언어 정보 역시 뇌에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정보를 함께 인지할 때 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가 났을 때 화가 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먼저 자신의 마음에 존재하는 불편함을 재빨리 느끼고 아는 것이다. 만약, 상대적으로 무딘 사람이라면 마음의 불편함을 알기 힘들 것이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재빨리 이 불편함을 알 것이다. 그다음에는 느껴지는 마음의 불편함이 과거에 겪은 화의 느낌과 같음을 알게 되면서 동시에 그 느낌이 언어로 표현하면 ‘화’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현재의 마음 상태를 재빨리 알고 과거의 마음 상태의 경험 정보와 언어 정보를 아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좀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종류의 앎을 구분하기 위해 지혜 배움 명상에서는 후자의 앎을 ‘인지’라고 부른다. 이는 의미를 구분하고 전달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사용하는 것이며, 인지라는 낱말 역시 앎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런데 화가 났을 때 재빨리 화가 난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어떤 점이 이로울까? 화의 크기가 작을 때 상대적으로 화를 조절하기 쉽고, 화가 난 이유도 알기 쉽다. 이는 마치 소방관들의 골든 타임(약 5분)에 비견될 수 있다. 소방관들은 골든 타임(약 5분) 안에 화재 장소에 도착할 때 화재를 진압할 수 있다고 한다.


화에 대한 설명만으로 앎과 인지의 다른 점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급한 마음에 대하여 살펴본다. 마음이 조급해져 말이나 실수를 하는 경우, 조급한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빨리 인지하는가? 대체로 실수하고 나서 자신의 마음이 조급했음을 안다. 이는 과거 기억을 통해 내가 조급했음을 아는 것이다. 이는 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같다. 만약 조급한 마음을 좀 더 재빨리 인지할 수 있다면 급한 성격을 침착한 성격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좀 더 복잡한 예를 들어보자. 지나친 욕심은 큰 불행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욕심이 움직이고 있을 때 이를 인지하는 것은 화나 조급함보다 더 어렵다. 욕심을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욕심의 결과로 큰 낭패를 당한 뒤에야 후회한다. 이는 욕심이라는 실제적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을 때는 이를 욕심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욕심과 생각에 집중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화가 났을 때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욕심이 움직일 때 혹은 화가 매우 났을 때 또는 조급한 마음이 움직일 때 왜 이를 인지하지 못할까? 화는 다른 감정보다 매우 강하게 작용하며 인지에 사용될 에너지를 거의 남기지 않을 정도로 흡수한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작용한다. 두려움이 커지면 인간의 인지 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우리 속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두려움이 인지 작용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욕심 역시 화와 비슷하게 작용하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의 모든 에너지를 자신의 욕심에 집중한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인지가 어려운 이유는 특정 감정이나 욕구 혹은 생각이 마음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한 나라의 독재자가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욕구 그리고 생각만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앎의 대상은 기억 정보이지만, 인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지 대상이 된다. 

앎은 좁은 의미에서의 인지이며, 앎은 지식으로 연결된다. 

인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지 대상이며 지혜와 연결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앎이 아닌 인지를 의미하며, 

자기 인지 능력은 내면 관찰을 통해서 커진다.


마음언어 강의 동영상 : 내면성장을 위한 마음언어 배우기 기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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