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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제영 May 15. 2018

요리와 언어

내면 발달

다음은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이름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 놓고 보면 앞 구절(道可道非常道)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뒷 구절(名可名非常名)은 이해가 바로 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먼저 요리 이야기로 시작한다.


요리음식을 만드는 행위 혹은 만든 음식을 말한다. 

그렇지만 요리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요리는 만든 음식이 그릇과 함께 할 때 완결된다고 할 수 있다.

 

만든 음식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지며 또한 식욕도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릇의 모양과 색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릇의 재질은 음식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준다.


그렇기에 음식은 음식을 담는 그릇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물론 집에서 라면을 끓여 냄비채로 먹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서 요리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요리 이야기를 한 이유는 뒤에서 설명된다.) 



지금부터는 언어 이야기이다.


언어는 외형내용으로 이루어진다. 

 

말은 소리로, 글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소리와 형태는 언어를 이루는 외형이다. 

나이가 들면서 청력이 약해지면 타인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노안이 오면 책이나 신문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노화로 인해 귀와 눈의 감각 인지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보청기와 안경이다. 

보청기나 안경의 도움으로 떨어진 감각 인지 능력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도구로 보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언어의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고 한다. 

약 1% 로, 이게 다 쉬운 한글 덕분인 듯하다. 


사전에 나온 문맹률의 정의를 한번 살펴보자. 

문맹률 : 한 나라안에서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


사전의 나온 정의만으로는 문맹률이 단어의 이해 능력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문맹률의 기준은 글을 읽고 쓰는 능력뿐만 아니라 일상의 쉬운 단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한국의 문맹률은 매우 낮지만, 문해율 역시 OECD 회원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고 한다. 

문맹률은 낮을수록 좋지만, 문해율은 낮으면 문제가 된다. 

문해율은 말 그대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의 비율이기 때문이다.

즉 문해력은 언어의 외형과 언어의 내용까지 인지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에 이런 표현이 있다.

말귀가 어둡다


이는 타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말귀에 관한 사전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말이 뜻하는 내용.
2. 남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는 총기


말귀 역시 언어의 외형과 언어의 내용까지 인지하는 능력을 뜻한다.



지금부터는 앞에서 언급한 요리와 언어를 함께 설명한다.


우리말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


앞에서 이미 말귀에 관한 의미는 살펴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먹는다는 표현이다.


먹는다듣는다 대신에 사용되었는데, 그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상대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감정을 어느 정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여 먹는다 대신에 처먹는다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훨씬 더 강하게 감정이 드러난다.


앞에서 언어는 외형과 내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요리는 그릇과 음식이 함께할 때 완결된다고 했다.


따라서 언어의 외형은 요리의 그릇이고,

언어의 내용은 요리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요리를 하는 이유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이지 그릇을 먹으려는 것은 아니다.

요리의 본질은 음식이다.


언어의 외형인 소리와 모양은 요리의 그릇이라면, 언어의 내용은 음식이다.

독서를 마음의 양식이라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작가가 만든 언어의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으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겨난다. 

언어의 그릇에 담긴 언어의 음식을 먹으려면 그 음식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쉬운 한글 덕분에 언어의 그릇은 잘 보이지만, 언어의 음식은 그렇지 못하다. 

생활에 사용되는 쉬운 단어는 어느 정도 보이지만 추상적인 단어, 문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문해력, 말귀를 소개한 이유이다.)


언어의 음식을 볼 수 없으면 먹을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양식인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마음이 고플 수밖에 없다.

이 상태로 책만 계속 읽으면 어떻게 될까?

마음은 고픈데, 기억은 수많은 언어의 빈 그릇들로 가득 찬다.

이때부터 문제는 심각해진다.

기억 속에 아는 단어들(언어의 빈 그릇)이 많기 때문에 자신은 많이 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언어를 관찰 대상으로 삼아 매우 깊이 관찰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면 관찰의 하나이다.



다시 맨 처음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정리해 보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이름이 아니다.


첫 번째 도는 음식이고, 두 번째 도는 그릇이며, 세 번째 도는 음식이다.

즉 실제인 도(음식)를 언어인 도(그릇)라고 표현하면, 실제의 도(음식)가 아닌 언어에 불과한 도이다.


첫 번째 이름은 그릇이고, 두 번째 이름은 그릇이며, 세 번째 이름은 그릇이다.

즉 이름의 본질인 그릇을 그릇이라고 정확히 알면,

이름은 자신의 본질인 그릇의 역할을 하므로, 이름은 더 이상 빈 그릇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즉 이름의 기능(본질)을 제대로 알 때 실제와 표상을 구분할 수 있다.


마음언어 강의 동영상 : 내면성장을 위한 마음언어 배우기 기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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