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어느 날 갑자기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훌쩍 배낭을 메었다.
인생의 한 해를 고스란히 싸돌아 다녔으니 모두들 그렇게 오래 여행을 하게 된 걸 궁금해한다.
남들 오해처럼 원대한 포부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돈 많고 시간 남아서 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날 몰아간 건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도 그 시절의 무모함에 고개가 갸웃하다.
사람이 일생에 한두 번 미칠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때의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사람에게 지치고, 사회생활은 이상과 멀어져 가고, 불합리한 사회가 못마땅하고 ,
아등바등하는 생활에 지쳐 무작정 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이라는 인생의 숫자가 주는 묘한 압박감이 있어서
더 이상 나이 먹기 전에 무언가를 꼭 남겨두고 싶었다.
정말로 혼자서 해냈다는 완벽한 충족함을 갈망했다.
지치고 낡아 빠져서 자신 없어진 영혼을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시작해 보고 싶어 졌다.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완벽하게 낯선 곳에서 오직 혼자의 힘으로.
적금을 깨고, 사표를 내고, 부랴부랴 아무 계획도 없이
딸랑 론리 플래닛 하나 들고 비행기를 탔으니 지금 생각하면 눈 앞이 아찔하다.
싱가포르로 이집트에서 요르단으로 이스라엘로..
터키로 그리스로 아테네로.. 꿈의 고향 유럽으로..
18개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정말 고독하고, 몸은 힘들었다.
그러나, 일생의 한 부분 만이라도
그렇게 다시 살 수 있었다는 건 내겐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배낭 하나에 성경 한 권, 여섯 벌의 옷과 두 켤레 신발
몇 개의 테이프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여유로왔다.
가끔은 외국 배낭족들과 함께 비행기 값을 벌기 위해 유스호스텔 청소도 하고,
한국 식당의 접시도 닦고, 해변가의 쓰레기도 주웠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 몸을 움직여 그날의 양식을 채워 가고,
적은 돈이 남으면 다 같이 과자 부스러기를 먹으며
부자나 된 듯 서로에게 "free~!"라고 외치며 권했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었지만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지도 않고
스스로만 책임지면 되는 생활 속에서
지금 돌아보니 짧은 시간 마음만은 참 편했던 것 같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삶의 연속선상에 있으니까
늘 여행 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본다면 어쩜 우리의 모든 이야기들은 여행기일지도 모르겠고,
세상의 모든 여행기는 공간의 이동이라기보다 시간의 이동일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또는 용기가 없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이란 빛나는 씨앗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지상의 어느 때라도 적당한 시간과 여유로운 돈과 건강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또 여행을 떠나기 어렵게 하는 다른 이유는 떠남에 대한 현재의 기대감과 기쁨보다
돌아옴이라는 미래적인 시점에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함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언젠가 다시 한번 자기 마음의 부름을 듣게 된다면
부디 걱정하지 말기를, 망설이지 말기를 바란다.
떠나건 돌아오건
우리를 부르는 삶의 외침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