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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Lee Sep 28. 2015

영화 - 집으로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께

가족에 관한 오래된 영화 세 번째 이야기  <집으로>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감독이 말하기를

'자기 일생에서 정말 만들어 보고 싶었던 영화'라고 했다.     

전형적인 도시 아이인 상우가 산골 토박이 외할머니와 겪어내는 일상은

비정함으로 대표되는 도시 아이와 무조건적인 정으로 나타내어지는 시골 외할머니의

씨실과 날줄로 엮어져 풍경을 만들어 간다.  

   

상우는 가정이 깨어진 아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떠도는 엄마..

상우의 외할머니 역시 상우 엄마가 십대에 가출한 이후

이미 오래전에 딸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셈이다.     

깨어진 가정과 단절된 세대 간에 따뜻한 악수를 청하는 손짓..

반항하는 아이 상우를 시종일관 넉넉하게 품어주는

벙어리 외할머니처럼 '깊고도 말없는 정'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정말이지 사랑이라고 그냥 표현해 버리기에는

너무 한국적인.. 그런 깊은 느낌이 있다.     

상처입고 철없는 손자를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슬픔을 안고 있는 눈빛..

그러나 한없이 따스한.

     

물론 어색함이 스크린 가득 흐르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배우의 연기력 운운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싶다.     

어차피 단절돼 있던 서로에게 내미는 손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거 아닌가.     


그지없이 짜 맞춰진 것들과 매끄러움 속에서 손익 계산 없는 완벽함을 원한다면

잘못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도 사랑도 없을 테고

그런 원리라면 당연히 구원도 없었을 테지.   

   

조금은 어긋나고, 투박스럽게 영화 전체에서 묻어나오는 어색함들이

오히려 삶의 미덕인 것 같아 정겨웠다고 하면 내가 너무 차가움에 지친 것일까.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들이 듬뿍 담긴 꾸밈없는 자연과 넉넉한 인심과 순수.     

여름 비 쏟아지던 날 상우가 할머니와 자기의 옷을 번갈아 걸어놓는 장면,

마지막에 고단한 인생길을 의미하듯 길게 구부러진 산길을

홀로 걸어가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주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영화 마지막에 올라오는 자막엔 이렇게 쓰여있다.

"이 땅에 모든 외할머니께 바칩니다"라고..


그냥 할머니가 아니고 외할머니이다.     

전통적인 한국의 관념으로 외할머니는 잃어버리는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이 낳아 고이 키운 딸을 시집 보내고

시집 간 딸이 오면 그냥 퍼주고 담아줄  수밖에 없는

또 그 딸이 낳은 손자를 자신의 핏줄이라 주장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슬프고 무조건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이 영화의 울림은 깊었다.

파괴되어진 가정과 단절된 세대, 잃어버린 사람과 얻은 사람과의 화해.

그것의 해답은 용서와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철없고 열정 어린 사랑이 세월에 오래 묵어 곰삭은 것 같은

깊고도 따스한 정이 흐르는 그런 영화다.     


가족에 관한 오래된 영화 - 로열 테넌바움, 프리퀀시, 집으로.

이 세 편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가정의 모습은 다 다르게 보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같을 것이다.


가정이란,

하나님이 천국을 이 땅위에서 잠시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오히려 가정에서 상처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더욱 안타까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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