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불교에서의 시절인연은 사람을 뜻하는 ‘인’을 쓴 것이 아니라, 인(因)을 사용한 단어이다. 그렇기에 시절인연이라는 말 자체가 담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인과 연이 만나면서 생겨나는 일이고, 그것이 흩어질 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에는 시절인연이라는 말 자체는, 인간관계에 국한되어서 사용되고는 한다. 모든 만남과 이별에는 때가 있다는 것? 그러한 의미로 비슷하게 쓰이는 거 같다. 이러한 말이 조금은 유명해지면서, 많은 이들에게 편함이 주어졌을까?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지가 궁금해지는 시점에, 나는 과연 어떠한가에 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현재의 시점에서만 바라본다고 했을 때, 가장 삶의 인간관계와 잘 맞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내 주위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누구든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게 된 것은 ‘시절인연’이 말하는 본질을 마음 속에 내면화시켰기 때문이었다. 결국에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에 신경을 과하게 쓰다보면, 탈이 난다는 것을 어찌보면 공공연한 사실로써 - 이러한 논의는 혼자 생각했을 때에는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적어도 부처 같은 사람이 생각했다면, 그것은 진리에 가깝겠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시절인연을 겪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라는 생각 말이다.
허나 그러한 것들을 어릴 적에는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너무 정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갈 적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갈 적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갈 적에, 그걸 넘어 1년이나 그보다 더 적은 시간 단위 속에서도 주위의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볼 때면, 내가 붙잡아야 하는 것인가?하는 고민을 많이 하곤 했었다. 마치 억지로라도 두 물체를 마찰시켜 붙이려고 하는 노력 같은 거 말이다. 혹은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오래 갈 친구로서는 좋은 사람이 아니려나? 하는 생각도 떠올린 적이 있으나, 자존감은 높았었는지 그러한 생각은 몇 분도 채 가지 못하긴 했다.
이미 내면 속에는 깨달았었는지도 모른다. 상황이 바뀌면서 주변 사람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할 정도로 나는 항상 인간관계 앞에서 태연했던 거 같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을 주고 받는 것에 관해 몰입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임을 성인이 되어서 깨달았다. 정말 애정을 주고 받는 사람과는 뜻하지 않은 이별을 부정하고 싶기도 하다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알아갔다. 그러한 과도기 와중에 만난 것이 ‘시절인연’이라는 단어였다.
몽테뉴
운명이란 단어를 믿는가? 사실 ‘시절인연‘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운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과 연의 결합과 와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기에 운명은 고달프다. 인간관계에서 큰 과도기를 겪을 수 있는 시점이 바로 운명을 버리거나 믿어버리는 순간이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강하게 믿기 시작하면, 운명의 배반 앞에서 크게 무너진다. 운명으로 만났다고 믿었지만, 운명으로 헤어지는 것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보았을 때, 친해질 것 같았다, 혹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라는 말을 뱉고는 하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와 결국에는 어디로 도달할 지에 관해서는 눈을 가리는 편이다.
혹은 운명을 믿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조리해보일 수 있다. 더불어 인생 자체에 활기가 죽어버리기도 한다. 어차피 되는 대로 되어갈텐데, 여기서 무엇을 더 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지라던가. 시간에 따라서 뭐든 되겠지, 뭐든 이루어지겠지하는 수동적인 태도가 기본값이 되어간다. 우리는 마치 코딩된 로봇처럼, 입력된 대로 출력하면서 살아가겠지하는 다소 냉소적인 인간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운명을 버려 버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운명 앞에서 좌절하게 될 것이다. 혹은 운명적 경험 앞에서 크게 무너지면서 배우게 될 것이다. 사실 운명이라는 단어 보다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한 번 정도는 다칠 것이다.
이제는 중도의 어느 지점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피천득 [인연]
이쯤 생각하다보면,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운명과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수가 있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사회생활적인 인간관계를 다루는 느낌은 아니다만, 그것보다도 소중한 것들에 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느낀다. 혹은 그러한 측면도 편입시킬 수는 있는데, 이는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를 관계의 전제로 도입하여, 당연하게도 불편하거나 안 맞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위에서 나온 말처럼 그리워하는 데도 못 만날 수도, 일생 동안 못 잊으면서도 안 만날 수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마주해야 할 수도 있다. 이때 운명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납득할 수 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이 사람과 마주해야하는 운명, 이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운명, 이 사람을 그리워해야만 하는 운명 같은 것들은 결국엔 그저 주어지는 것이다. 불가항력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해진다.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삶에 있어서 ( )을 주는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여기서 빈칸은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만약 나의 삶에 행복이 중요하다면, 마주해야하는 운명에 대한 기쁨을 크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 만약 편안함이 중요하다면, 오고 가는 관계 속에서 고요히 있을 수 있는 내 자신을 크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한 모든 형태의 관계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문제는 인생 전반을 걸쳐서 지속적으로 해야하는 고민이다. 우리는 관계에 대한 정의를 한 번 내렸다고 해서 거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빈칸을 다시금 고려해보아야 한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개념과도 비슷하다.
양귀자 [모순]
결론은 인간관계는 삶의 크나큰 일부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개념을 부정해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그저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그저 받아들이는 경험이 어떤 허무함을 가져다줄지는 한 번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덜 느꼈으면 하기에 이왕이면 탐구를 지속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전 생애를 걸고서라도 탐구해야, 덜 아픈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되게 이상적인 얘기들을 많이 해보았지만, 나 스스로도 이상적이지 못한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지난 관계들을 돌이켜보아도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많았고, 되돌릴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까하는 후회가 남는 순간들도 너무나 많았다. 이러한 발버둥도 생애를 탐구하고자 하는 인생에 관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운명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숙함을 합리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완충제로써의 작용, 더 나아가서 운명을 받아들임을 통하여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은 충분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가는 사람 막지 않고, 오는 사람 반겨주며,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사실 이것은 나의 큰 다짐이다.
이상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