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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Feb 16. 2018

180212, 스위치 성교육2

남학생들은 재미와 공감 , 여학생들은 충격과 공포

1. 관리자의 허가

"남혐으로 흐르지만 않게 조심해주면 돼."

 교장선생님 말씀이다. 한국 공교육 현장에서 보건교사 아닌 교사가 성교육 한다고 하면 흔히 돌아오는 반응이 이렇다. 수업 취지와 목표, 수업계획, 근거 자료(2015 국가수준 교육과정, 성교육표준안)를 문서화해 갔더니 납득하셨고, 수업 허가가 났다. 낯선 무언가를 시도할 때는 '할 것'을 명시하는 것 만큼이나 '안 할 것'을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 '위험한(?) 내용들은 지도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2. 필요성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수업을 하고 싶었다. 

 첫째, 기존 성교육은 아이들과 심리적, 내용적 거리가 멀다. 보건 성교육은 1년에 17차시 구성돼 있다. 체육과 창체 시간을 활용한다. 보건수업(보건교사가 진행한다)이 끝나면 아이들에게 무엇을 배웠냐고 꼭 물어봤었는데, 늘 아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학생들은 기성 지도내용 범위를 벗어나는 성적 호기심을 갖고 있다. 조금 더 실질적인 정보를 주고 싶었다.

 둘째, 학생 성별에 따라 필요한 정보가 다르고, 교사 성별에 따라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얘기가 다르다. 생리 수업 할 때 '부끄럽거나 숨겨야 할 일이 아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생리하는 학생들이 당당하게 얘기할 시간은 마련하지 못했다. 수업과 생활은 다르기 때문이다. "쟤 생리한대."가 전교에, 특히 남자애들 사이에 회자될 걸 상상하면 아이들은 생리한다는 사실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얘기하기 어렵다. 말 좀 안 하면 어떠냐고? 이어지는 수업 후기로 답하겠다.


3. 수업

 1) 여자반

 주제는 월경 대응법, 성폭력 대응법이었다.

초상권도 있으니 뒤에서 찍을게요. 뒤돌고 싶은 사람만 돌자!

 면생리대, 생리팬티, 월경컵을 소개했다. 제일 반응이 좋았던 건 생리팬티였다. 잘 때 새지 않는다는 데에 솔깃해했다. 꽤 조심스럽게 주변 반응을 살피길래, "여자들끼리 있으니까, 생리하는 사람 손 들어볼 수 있을까? " 하니까 1/3 정도가 손을 들었다. 손 안 든 친구들도 있을 테니 더 높은 비율이라고 봐도 되겠다. 

 월경컵 사용방법 영상을 보여주고 장점을 나열한 뒤 말했다. "거부감 들면 안 써도 된다, 선택은 여러분 몫. 다만 화학물질 생리대 대신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걸 청소년기에 알았다면 선생님은 더 좋았을 것 같아서 알려주고 싶었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는 아이들에게 생각보다 생소했다. 강간 이외에 아이들이 떠올릴 수 있는 성폭력이 아무것도 없었다. 놀랍고 걱정스러웠다. 6학년 학생들은 이미 34시간의 보건 수업을 한 뒤다.  성폭력이 뭔지도 모르는데, 대응법에 대한 학습이 제대로 됐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중학교 시절, 버스에서 내 엉덩이에 자신의 몸을 바짝 붙였던 아저씨가 한 짓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위험해서 숨기거나 나중으로 미루는 교육방식은 성폭력 교육에서만큼은 지양해야 한다. 적절한 대응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싶었다. 이는 여학생들에게 언어를 만들어주는 일과도 같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의 범주로 나누어 세세한 사례를 열거했다. 학생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해 그룹이 주로 누구인지 통계로 제시했다. 통계는 범주별로 다양했지만 통상 77퍼센트 정도가 아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경악했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동의'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에 반하는 행동이 성폭력이기에 누군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여길 경우에 대응하자고 했다. '착하고 예의바를' 때 칭찬 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잘 아는 어른이 친절함, 친근함, 어른의 권위를 이용해 접근할 때 거절하기 힘들다. 나는 "사람과 행동은 구분 가능하다. 좋은 어른과 나쁜 행동을 한 어른은 병립 가능하다. 나쁜 행동에 대해 신고하는 것이지 좋은 어른을 고발하는 거라고 생각해 참거나 괴로워할 필요 없다."고 하며 거절하기에 대해 지도했다.

 아이들이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건 가벼운 성추행이므로 거기에 초점을 맞춰 대응법을 나눴다. 아이들은 '믿는 어른에게 얘기하기, 경찰과 해바라기 센터에 신고하기, 증거가 될 수 있게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기' 등의 방법을 발표했다. 덧붙여 나는 '모든 과정에서 너희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것'을 부탁했다.


  조금 남는 시간엔 꿈에 대해 얘기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30년 후에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냐고 물어봤다.

 "가족들과 소소한 행복으로 채우는 하루하루 보낼 것 같다."

 "직장도 다니고, 가족과 맛있는 걸 해먹으며 강아지랑 살 것 같다."

 공교롭게도 일에서의 목표와 성취에 대해 얘기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셰릴 샌드버그, 류칭, 수잔 보이키치 소개하면서 다음의 말로 마무리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높은 것을 상상했으면 좋겠다. 상상은 앉아서 머리로 하면 한계에 부딪힌다. 관심분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여성 리더를 찾아보았으면 한다. 돈도 많-이 벌고 엄-청 유명해지고 싶다면 그렇게 말해도 된다. 큰 꿈을 품으면 지금 여러분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거다. 언니가 응원한다."


2) 남자반 (H선생님의 후기)

  주제는 성폭력과 음란물이었다. 성폭력은 '동의' 여부를 강조했다. 가해자는 거의 남성이며 주로 지인임을 밝히자 일부는 탄식했다. 택시기사, 경찰관, 학원선생님 등 도처에 있는 성폭력 가해에 관한 기사를 보여주었다. 성폭력의 수법과 대처방안을 나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상황에 놓였을 때 어쩔 수 없다면 폭력을 쓰라고도 했지만 남학생들은 이를 장난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통계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안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전동의 안 받아서 모자이크! (동의에 관한 영상 시청 중)

 음란물은 허구이며 중독적임을 말했다. 관계와 과정이 생략되어 허구이고, 자극은 둔감해지며 새 자극을 원하니 중독이라 했다. 듣고 있던 한 학생은 "야동은 그럼 몸만 있는 거네요?"라며 한 마디로 정리하기도 했다.

 도덕 수업처럼 당위적인 잔소리로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 중간중간 유머와 퀴즈도 사용했다.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못한 학생도 있겠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또다른 내용은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는 건 내게 남은 몫이다.


4. 학생 후기

(남) '예쁘다'는 칭찬이 경우에 따라 무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상대의 동의를 얻는 건 중요하다. 반대로 나도 성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여) 남자애들이랑 같이 성교육 들을 땐 공감돼도 말할 수 없어 답답했다. 나만 생리하는 게 아니라서 안심되고 기뻤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 우리끼리 더 얘기하기로 해서 들뜨고 신난다.

(여) 아직 생리 안 하는데, 하게 되면 안 무서울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나를 만지거나 희롱할 때 싫다고 얘기해야겠다.

(남) 남자 선생님이랑 얘기하니까 더 자유롭게 질문했다. 선생님이 성폭력 당하면 꼬추를 차라고 해서 재밌었다. 음란물에 중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조심해야겠다.


5. 반성

 40분으론 역부족이었다. 아이들이 좀더 편하게 얘기하려면 나와 래포형성할 시간도 필요했고, 학생들이 좀더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좋았겠다. H선생님과 2018년엔 동학년이 된다. 올해엔 최소 2회 4차시 이상 분량으로 구성해 다양한 주제를 풍부한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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