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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20. 2017

프라하가 눈부신 이유는 까를교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동유럽으로 2주간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경험도 제법 쌓였고 이제는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생겨서 20대 초반 시절처럼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모든 걸 구경하려고 욕심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만족하면서도, 주어진 시간에 충분히 발견하고 즐기고 느끼기 위해 우리는 바빴다.

정원 꾸미듯 구름까지 조물거려놓은 듯한 프라하 풍경


모든 게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빨간 지붕 건물들과 일렁이는 야경은 물론이고 청각장애인을 배려한 신호등 소리나 위생적으로 디자인된 휴지통, 이색적인 놀이터까지 우리를 끌어당겼다. 우리는 쉴새없이 꿈뻑이고 만지고 벌름거렸다.


물론 프라하는 분방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비엔나는 활기차고 멋스럽고 품위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이 아름다웠던 이유 대부분은 그 도시에 있지 않다. 내 여행이 그렇게도 매번, 시간이 지나고 꺼내봐도 빛을 잃지 않고 행복한 기억인 이유는 거기에 머물 시간이 단 사흘 뿐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단지 머무는 절대 시간이 짧아서가 아니라 '이 햇살, 이 풍경, 이 맥주가 평생에 단 한 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 순간을 최고로 만들어준다. 또, 어렵게 시간을 맞춘 친구와의 일상적이지 않은 하루가 언제 다시 올지 몰라 특별하다고 느낀다. 낯선 환경에서 나눈 대화와 웃음은 옅어지지 않고 귀중한 기억으로 두고두고 간직한다. 맛없었던 음식이나 길 잃고 헤맸던, 사실은 유쾌하기 힘든 경험들도 "이게 여행의 묘~미지"하며 깔깔댄 즐거운 기억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내 여행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나한테 달렸다.


마찬가지로, 불친절한 식당이나 우산 없이 비오던 날이나 찢어진 가방끈 같은 것들이 일상에선 아름답지 못한 이유는 일상에 머무는 절대 시간이 무한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나 때문이다. 살 날이 석 달 남은 상황이었으면 나는 기를 쓰고 그것들을 즐거운 경험으로 둔갑(?)시켜 차곡차곡 쌓았을 거다.

공기처럼 함께해 온 소중한 이들에게 때로 소홀하고 둔감해지는 건 그들과 이별하는 일은 영영 없으리라고 착각하는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더 잘하겠다고 다짐하며 뱉는 '다음에'는 사실 무신경함에 대한 면죄부일 때가 더 많다. 아부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오직 내년까지라면 나는 어제처럼 말하진 않았을 거다.


감정의 유통기한이나 가족의 수명이나 반려묘의 발병 시기 같은 걸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애석하게도 사람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영원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확신할 수 없다면 불안해야 정상인데, 익숙함은 나를 나태하게 만든다. 내가 이 세상을 얼마나 머물다 갈지 알 수 없다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느슨하다.


2주가 아니라 2달을 여행하면 나는 조금 더 지금의 일상에 가까워진다. 빨래나 말리는 동안 커피 마시며 책 읽는 종일을 보내기도 할 테지. 2년을 여행한다면 여행지에서의 나와 서울에 있는 나는 거의 비슷해진다. 우리의 일상도, 조금 더 호흡이 긴 여행과 같다. 그러니까 뒤집어 얘기하면, 마치 영원할 것 같아서 늘어지는 일상을 여행처럼 좀 더 생기있는 활력으로 만드는 것도 나한테 달렸다는 얘기다.


비법이 있다. 쉽게 기뻐하고 행복해지면 된다. 여행 가면 물결에 비치는 빛조각들도 더 반짝여보이고 바람도 괜히 더 상쾌한 거 같고 짠 파스타도 맛있기만 하지 않나. 그거 일상에서도 마주치는 것마다 쉽게 기뻐하고 예뻐하고 행복해하고 즐겁다 여길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쉬이 행복해지는 건 진짜 어렵다. 아이같아져야 한다. 별 걸 다 처음 겪고, 마지막인 것처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굴곡마다 행복을 기어이 찾아내고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삶이었다면, 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에 덜 후회하고 더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레바리 씀-골드 시즌 마지막 도서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이번 쓰기 테마인 '유서 쓰기'를 하려니 떠오르는 생각이다. 우리는 흔하고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조금 더 유심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의 일상을 지루하고 시시한 것으로 여기면 나한테 손해니까. 사실 익숙한 것들 투성이인 내 일상을, 그런 일상들로 채워지는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덧. 말처럼 쉽지 않은 '쉽게 행복해지기', 한 번 해보고 싶다면 

지난 8년간 아이들에게서 얻은 팁 몇 가지가 있는데 연습해보길.


1.10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인사하고, 앞으로 10년 동안 못 볼 것처럼 작별하기

2.집 근처 화단이나 운동장, 하늘 등이 좋다. 5분 동안 한 곳에 앉아서 같은 풍경만 응시해보기+시각 청각 후각 총동원해 발견한 것들 글로 적기

3.눈 가리고 동행과 함께 익숙한 공간 10분간 산책하기. 낯설어진 공간과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행과 내 건강의 소중함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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