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Apr 06. 2019

엄마 몰카 찍는 아이들, 백신이 필요할 때

아웃박스 한겨레 칼럼 [초등교실 속 젠더 이야기]에 실린 글

 “불법촬영? 인권 단원에서 그걸로 수업해요?
뭐 중요한 문제긴 하지만, 좀 치우쳤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도 그런 걱정을 했다. ‘우리 주변의 인권침해’라는 큰 주제 중에서 하필 어른들의 문제를, 그것도 불법촬영 범죄를 골라 수업하는 게 적절할지 고민이 됐다. 그런데 최근 3년간 초・중・고 불법촬영 적발 건수가 무려 980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중 1/5은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다. 불법촬영은 더 이상 어른들만의 이슈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상과 완전히 격리될 수 없어서, 호기심이라는 미명 하에 위험한 것일수록 빠르게 흘러들어간다. 그러니 차라리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힘을 길러주는 편이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http://omn.kr/1aokq

 

화장실에 무수히 난 구멍들을 보여주며 수업을 시작했다. 단추, 넥타이, 안경도 불법촬영 카메라일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경악했다. 화장실, 지하철처럼 일상적인 공간에서 누군가가 나 몰래 나를 찍는 일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며, 내가 피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실감했다. 아이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긴 건 디지털성범죄 특성상 무한히 복제되어 완전 삭제가 어렵다는 점, 그렇게 복제되는 동안에도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예능에서 쉽게 접하던 ‘몰카, 야동’이라는 단어가 이 인권침해 상황에 비해 너무 가볍고 유머러스하게까지 느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자못 진지해졌다. 초반엔 호기심이 경각심을 누르지 않도록 애썼는데, 아이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부터는 나도 안심이 됐다.     


 뒤이어, 법과 제도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퀴즈 형식으로 점검해봤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헷갈려한 질문은 ‘저는 찍지 않고 다운만 받아서 시청했는데 이것도 범죄인가요?’였다. 현재까지는 범죄가 아니지만 점차 보는 것도 범죄라는 인식이 퍼지는 중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찍는 건 범죈데, 그걸 보는 건 왜 범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막 퍼지는 거죠.” 아이들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인가 보다.     


 피해자의 입장을 들려주는 영상자료를 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다 ‘학급공동실천서약서’를 쓰기로 했다. 영상자료에서 피해자는 다 여자이고, 찍는 사람은 남편, 전 남자친구, 길거리 아저씨였기에 남학생들이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 한다고 여길까봐 걱정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상식은 내 우려를 한 번 더 벗어났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에 이입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서약서에 스스럼 없이 ‘찍지도, 보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종종 우리는 ‘차단’을 선택하지만 그건 좋은 해결책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은 방법이다. 나는 불법촬영을 아이들한테 ‘소개’한 꼴이지만, 이 수업으로 아이들에겐 미약하게나마 백신이 생겼을 거라고 믿는다. 후에 불법촬영을 접하게 될 때,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제동이 걸릴 것이기에, 아이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좀더 안전하고 평화로울 거라고 기대해 본다. 


수업 끝낸 뒤 이어진 점심시간에 뉴스를 열어보니 연예인인 전 애인을 성관계 영상으로 협박했다는 기사에 '그래서 그 영상 어디서 볼 수 있냐'는 댓글이 달리고 있더라. 어른이여, 애들 반만 닮아라.     





매거진의 이전글 차별, 혐오 없이도 즐거운 초딩들의 유튜브 방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