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분노, 그 닮은 듯 다른 힘에 대하여
괜찮은 책이었다. 2016년 5월 17일 이후의 페미니즘에 대해 학자의 눈을 따라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해 현상을 적확하게 언어화하는 작업에 꽤 충실했다. 내내 그 정도의 호감이었다.
나를 관통한 문장은 마지막 장에서 등장했다.
'혐오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흔히 쓰는 '극혐!'에서 오는 '벌레 보듯 끔찍히 싫어하고 미워하는'의 혐오와 조금 다르다. 교육심리학에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정서'라 표현한다. 이때의 혐오는 사실 일베나 고약한 정신이상자가 하는 일탈의 행동이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오히려 상식, 예절, 도덕과 같은 규범적 언어를 통해서 전수되며 위계질서나 잘못된 권력에 도전하지 않는다. 위에서 부과한 것에 군말없이 순응하며 약자와 소수자를 분류하고 낙인찍고 고립시키고 배제한다. 말하자면, 우리사회의 '정상성' 자체가 기울어 있음을 직시하고 그에 저항해야 한다는 이 학자의 요구가 진심으로 전해졌달까.
혐오와 분노는 그 표현이 비슷해보일지라도 목적과 방향이 정반대다. 혐오는 아래로 향하고 분노는 위를 향한다. 약자를 멸시하거나 차별하고 때론 보호하는 척, 감싸주는 척하며 발화자가 선 위치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알량하게 지켜내는 게 혐오의 목적이라면, 분노는 공감을 넘어 통감하며 연대하고 때론 약자로서의 당사자성을 드러내어 '감히' 대항하여 하한선을 높이는 게 목적이다. 이 공식에 비추어 보니 많은 것들이 분명해졌다. 다양한 사회문제를 갖다 댔을 때, "분노해야 할 진짜 대상은 어디인가?", 혹은 "사실은 분노 대상에게 대항할 깡이 없거나 너무 거대해 쨉이 안 된다고 -무의식적으로-느껴 애먼 상대에게 화를 내는(혐오하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질문을 던져봄으로써 좀더 깔끔하게 정리됐다. 이를 테면 여성커뮤니티에서 트랜스젠더나 크로스드레서를 까는 것에 대해 내 입장을 정리해야 할 때, '자살을 하는 사람이 너무 이해 안 되고 진짜 싫다'고 말하는 주변인에게 내 입장을 전해야 할 때.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는 해결이 요원해 보인다. 그에 대해 당장 해결책이 없거나 해결할 능력이 안 되더라도 분노하는 것과, 체념하고 혐오하며 그 문제에 대해 묵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대응 방법이다. 나는 미움도 화도 많은 최근 몇 년 새의 한국을 걱정했다. 나는 그걸 두고 "분노사회야(한숨)."하곤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몸집을 불려가는 혐오가 염려스러웠던 거다. 우리는 문제해결에 당장 손을 보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더라도 문제를 바라보고 서야지, 등지고 서서는 영영 그를 넘을 수 없다.
혐오를 몰아내는 방법은 잘 분노하는 것이다. '잘 분노하는 것'은 문제에 대해 통감하고, 언어화하고, 연대하고, 기어이 변화시켜나가는 거다.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를 끌어내리는 쩨쩨한 상식은 배수의 진을 친 절박함과 진정성을 이길 수 없다. 그 진정성은 헬페미니스트의 '변이체' 속성에서 나온다. 신영복 선생님은 <변방을 찾아서>에서 변방은 슬픔, 아픔, 상실과 같은 특성을 가졌으나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 결국 딛고 일어서게 하는 희망과 창조까지도 함께 품고 있다고 하셨다. 헬페미니스트들이 이 책에서 '변이체'로 읽힌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본다. '그래 내가 창녀다, 쌍년이다, 메갈이다, 여기가 지옥이다'를 피하지 않으며 보잘것 없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맹렬히 달려드는 동안에도 꾸준히 분노해야 할 대상을 혼돈하지 않는다. 물론 크고작은 잡음과 좌절은 계속될 테지만, 그런 흉터를 안고 좀 더 건강하게, 오랫동안 잘-분노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란다.
-트레바리 GD에서 <헬페미니스트 선언>을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