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계획주의자는 읽지 마시오. 해롭기도 하고, 읽을 필요도 없소.
지난 달에 핸드폰을 잃어버릴 뻔했다. 알고보니 병원 대기실 테이블에 떡하니 올려놓고 나왔더라. 다행히 찾기는 했지만 그전까지 등줄기가 서늘하고 황망했던 그 기분은 아직도 몸에 남아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경험이 또 생소했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게 문제다. 이럴 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아차 또!"이다. 당시 같이 있던 친구가 찾아보자고 해서 택시회사, 기사님, 병원에 다 전화해보고 오던 길 돌아서 가보고 하며 되찾았는데 혼자였다면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잃고 후회하는 게 익숙한 경험이라, 체념하기 더 쉬워진다. 역시 체념은 무섭다. 그런 식으로 잃어버린 핸드폰, 지갑, 우산, 목도리, 모자, 가방의 역사가 어마어마하다. 내게는 직장 스트레스를 쇼핑에 푼다는 '시발비용'보다 치명적이라, '아차비용'이라 명명해본다.
한편 이 아차비용은 비단 건망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를 테면 동선 최적화에 정말 소질없다. 과학실-연구실-교실이면 될 것을 뭐 놓고 가서/ 할 일을 까먹어서/ 상대랑 타이밍 안 맞아서 등의 이유로 과학실-교실-연구실-교실로 이동하는 식이다. 덮어놓고 아는 길이나 직감 따라 가느라 가장 빠른 길을 놓치기도 한다. 그만큼의 시간도 함께 놓친다.
맘에 들어 길거리에서 샀다가 처박아놓게 되는 옷도 많고, 교직 2-3년차엔 감정적으로 학생에게 화내듯 혼내고 사과하기도 했다. 당장 이번주에 가고 싶은 공연을 모조리 가느라 다음 한 달간 카드빚에 곤란해질 적도 있었다. 당장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약속에 눈이 멀어 한 달 내내 모임에 참석하느라 체력이 바닥나기도 했고, 일단 질러놓은 일 때문에 책임지다 지쳐버리기도 했다. 계획하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면 시간이 부족하니 허겁지겁 하느라 정신적으로도 손해를 본다.
그동안 '좀 덜렁댄다, 하고 싶은 게 많다, 이것도 다 경험이지, 타고난 성격인데 어떡해' 정도로 퉁쳐왔던 내 고질적인 문제는 시간적 경제적 비용을 많이 낭비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니 덜렁댄다는 말로는 날 표현하기 충분치 않았다. 나는 충동주의자였던 것이다!
충동주의자: 순간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의 자극을 참지 못하고 저질러버리는 부류의 인간
충동주의자로서의 장점은 열심히 누려왔다. 이젠 득보다 실이 많다. 좌판 늘어놓듯 하는 일상의 경험들을 잘 다듬고 정돈해 도톰해져야 할 타이밍이다. 나는 대충 뭉뚱그려서 '잘하자'! 하면 보나마나 잘 못하는 사람이니까 우선 세 가지 규칙을 정해놓고 실천해 보려고 한다.
1.사고 싶은 게 있으면 일주일 정도 고민해보고 다시 결정한다
-당장 사지 않으면 영영 구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물건 같은 건 요즘 세상에 거의 없다고 누가 그랬다.
-'사고 싶으니까' 말고 다른 이유를 최소한 세 가지 이상 들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
2.매월 말일, 다음 달의 목표와 할 일을 미리 정해두고 그에 포함되지 않는 항목들은 행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생각을 한다
-그때그때 달력에 추가하는 것들이 모두 내 일정이 아니다.
-오늘을 살다 보니 한 달이 채워지는 귀납적 생활 대신, 한 달 한 주의 계획을 세워놓고 그 목표에 맞게 움직이는 연역적 생활을 배워 보자.
3.메모를 한다
-예전엔 다이어리를 쓰면서 메모하곤 했는데 에버노트 쓰면서 다른 기록을 일절 하지 않게 됐다.
-일단 장보러 가지 말고 필요한 것들을 적어놓고 그것만 산다. 일단 나가지 말고 뭘 할 건지 적어놓고 순서대로 한다.
-뭉뚱그려 생각하던 습관 대신 분명하게 목록화하는 습관을 가져보자.
'끌리는 대로 하라!'는 문구가 매력적인 이유는 욕구와 본능에 충실하는 게 자극적이고 자연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쉽기 때문이다. 의지, 계획, 노력과 실천은 말만 들어도 귀찮고 번거롭잖아. 그런데 이 '끌림'을 어디에 포커싱하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웬만한 것에 죄다 충동질하던 에너지를 모아 가장 강하게 끌리는 것에 집중할수록, 삶이 좀더 선명해지고 뽀대도 나고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다.
언제나 ISTJ형 인간을 동경하던 ENFP는 자기 한계라고 생각했던 벽을 한 번 뛰어넘어보고 싶다. 마침 목요일이 11월 말일이다. 충동주의자들이여, 나랑 같이 12월에 꼭 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달력에 적어보지 않을 텐가!
ps: 충동을 거두는 일이 재미없을 것만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늘 가던 길로 우선 출발하는 대신 멈춰서서 지도를 검색해보고 새로운 길을 알아내는 재미도 있다. 방금 전에 사고팠던 목도리를 사지 않고 돌아서니 1분 뒤엔 충동구매를 안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재미도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