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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Jan 15. 2020

‘딱 요만큼만 도려내면 좋겠다’

태재와 에세이드라이브 2기에서 쓰다 / 키워드: 가위

                 

 / 고운     

친절은 공짜처럼, 미소는 헤프게 쓰는 걸 좋아합니다.

덩실덩실 춤추듯 걷되 정면을 응시하며 살고 싶어합니다.     






솔직히 다들 해본 적 있잖아

   몸선에 꼭 맞춘 교복 치마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의 양 바깥쪽을 손날로 누르면서 익살에 약간의 자조를 섞어 그렇게 말하며 키득거리곤 했다. 그 시절 친구들끼리는 제 몸이든 남의 몸이든 일단 까고 봐야 웃겼다.


“이거 거의 병규 키 수준.”

“복희는 별명 이제부터 처가(처진 가슴).”

서로의 고귀한 신체를 비하하는 표현들은 농담처럼 유행했다.      



 살들만 꺽둑꺽둑 썰어내면 세상만사가 다 내 편일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내 로망의 설화는 그래서 박씨전이었다. 백마 탄 왕자님이고 말하는 두꺼비고 나발이고 허물 벗으면 게임 끝이다! 내 몸을 두고 벌어지는 야비한 농담들을 호탕하게 웃어넘길 수 있었던 건 그런 상상 덕분이었다. ‘야야 내가 허물만 벗어봐라-’하고 혼자 되뇌고 나면 다 별 것 아닌 말들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초파리 손톱으로 누르듯이 찍.     



환골탈태를 위한 처절한 노력들

 하지만 현실에 금강산 도사 같은 은인이 있을 리 없다. 아무도 나를 환골탈태시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나섰다. 헬스를 했고, 수영도 했다. 등산도, 요가도, 필라테스도 하고 1일1식도 하고 원푸드도 하고 디톡스도 했다. 어떤 해는 환ㄱ-까지, 어떤 해는 환골타ㄹ-까지, 어떤 해는 ㅎ에서 멈추기도 했다. 그러나 제법 건강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때에도, ‘환골탈태’ 같은 깔끔한 완성이 온 거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영영 오지 않을 무릉도원 같은 경지였다.                         










 사실 주어진 선택지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내 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앉으면 당근 배가 나오지, 팔짱을 끼면 팔이 더 굵어질 수밖에, 손으로 가린다고 턱이 작아지는 게 아니잖아, 활짝 웃는 걸 좋아하니 주름은 짝꿍처럼 따라오는 게 마땅하지! 머리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나를 더 괴롭히지 않는 것이 앞에 놓인 가장 쉬운 답안인데도 외면했다. 외면이 차라리 쉬웠다는 게 더 적절하다. 몸을 깎아내리고 놀리며 자란 내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충분히 시간이 지나고 몸 외에 더 많은 것들이 소중해지면서 자연히 타협하고 양보해가며 삼십 대로 넘어왔다. 그리고 최근 들어, 머리로만 알던 그 상식들이 체화된 순간이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나가는 수영장에는 갖가지 몸이 있었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몰라서 전부 언니랑 아저씨로 통칭하자면, 학처럼 가늘고 긴 다리에 배는 출렁한 50대 언니가 있다. 물을 한껏 흡수한 듯 똥똥한 피부의 대머리 아저씨(실은 수모를 쓰고 있어서 알 수 없지만 무례하게도, 어쩐지 그럴 것 같다)도 있다. "내가 가슴은 없어도 엉덩이는 알아주지 깔-깔" 하며 웃는 파란 수경 언니의 몸은 과연 그러하다(?). 주름을 머금고도 탄력 있는 베테랑 언니의 등 근육이나, 주근깨가 돋은 흰 피부의 여성 동지를 보면서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다 말고 속으로 소리내서 말해버렸다.          

 ‘몸들 참 재밌네, 예쁘다.’         

      

 달라서 예쁜 게 뭔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훅 느껴버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도 그럴 것이었다. 사진에 내가 어떻게 나올까, 왼쪽 얼굴이 더 부드러운 인상인데, 상체가 둔해 보이니까 허리를 바짝 펴야 하는데, 배가 안 보이는 테이블 쪽으로 가서 앉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비집을 틈 없고, 해봤자 소용도 없는 홑겹들의 파티룸인 수영장에서 나는 그냥 좀 도톰한 청년이다.      


 타인의 몸에 관대해지는 건 좀더 수월했다. 옅은 갈색 눈을 좋아하지만, 짙은 회색 눈이나 어두운 바다색 눈동자와 대화하는 것도 퍽 즐거운 일이다. 호리호리하고 긴 키를 좋아하지만, 앉아야 비로소 시선이 맞는 친구와 마주하고 웃는 것도 소중한 시간이다. 남의 타고난 생김에 쓸데없이 단호해서 내 얻을 게 뭐가 있겠나 싶은 터다. 내 몸에 너그러워지는 건 쫌 더 레베루가 높은 미션이다. 시원하게 성공한 적이 없다.


 그러니 도려내야 하는 건, 몸이 아니라 내 몸에 관해 도무지 멈추지 못하는 내 생각일지 모르겠다. 새해에는 그 초라한 생각들을 썰겅썰겅 오려낸 자리에  ___________를 채워내고 싶다.

    



                 에 대한 보충 설명:  비워내면 꽤 큰 자리가 될 텐데 대신 뭘 채워넣으면 더 거룩하고 쓸모있고 사랑스러운 생각들이 될지 아직 고민 중입니다. 아마 ‘귀여운 구석 찾기’ 같은 데 열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니무라 다이스케 님 그림을 배경으로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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