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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Feb 17. 2020

동갑내기 수호신

태재와 에세이 드라이브 3기에서 쓰다 / 키워드: 옷장

“150만 원이라고? 흠... 70만 원으로 하시지요?”


 나의 동갑내기 오동나무 친구는 34년 전 청주 가경동의 한 가구단지에서 엄마와 만났다. 맘에 드냐는 외할아버지 질문에 엄마는 아래쪽에 서랍이 따로 있는 게 좋다고 대답했단다, 서랍 열려고 매번 장롱문을 안 열어도 되니까. 하나뿐인 막내딸 시집간다고, 짠돌이 친정아버지는 큰 맘먹고 거뭇한 장롱을 85에 장만하셨더랬다.    

 

    장롱이는 우리와 함께 꼭 열두 번 이사를 다녔다. 신천에서 화양동으로, 다시 능곡에서 일산으로. 반지하에서 단칸방으로, 다시 주택에서 아파트로. 옹알이도 돌잡이도 재롱잔치도 모두 장롱이 앞에서 했다.

얘가 그 장롱이

 우리 남매는 장롱 속 이불을 다 꺼내고 윗몸일으키기 매트를 장롱 상단에 비스듬히 걸어 미끄럼틀 타는 걸 좋아했다. 부모님이 귀가하시면 뒤지게 맞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빅재미였다. 조금 지나고 꾀가 생긴 우리는 엉성하게나마 이불을 개서 다시 얹어놨는데, 본래 아버지가 이불을 개던 방식과 달랐기에 모두가 알 것이었지만, 아무튼 장롱이는 모른 척해줬다.

     

 중학교 땐가, 학교 갈 때 신을 살색 스타킹이 다 떨어져서 엄마 거 빌리러 장롱 서랍을 뒤지다가 속옷 짐들에 가려져 있던 구석에서 두툼한 공책 몇 권을 발견했었다. 결혼하고 십여 년 동안 혼자 꼬박꼬박 써 온 일기장이었다. 엄마한테 들키지 않게 집에 아무도 없을 때만 골라서, 나는 몇 주에 걸쳐 그 일기장을 훔쳐 읽었다. 별 것 아닌 일로 상할 대로 감정이 상해 날선 말을 주고받은 신혼시절, 장손이 필요한데 딸을 낳았다고 타박하는 시아버지에 속상해도 대꾸하지 못했던 마음, 육아 때문에 선생을 포기하고 재택 알바를 하고 있는 처지에 대한 아쉬움, 고생고생하다 중풍이 온 친정엄마에 대한 절절한 미안함. 아직도 그때 읽었던 시간에 대해 나는 말하지 못했고, 장롱이는 엄마가 토해내듯 쓴 글들을 숨기는 것도, 내가 그걸 몰래 꺼내보는 것도 다 모른 척해줬다.


 좀더 커서는 아버지께 선물로 드릴 넥타이를 장롱이 안쪽 어깨에 몰래 걸어놓곤 했다. 그래봐야 매대에 나온 이만 원짜리 촌스런 무늬였지만, 아빠의 단벌 양복에 그중 제일 어울리는 색감으로 고르느라고 한참을 서성였다. 세상 꼼꼼한 아버지가 집에 와 옷을 벗다가 바로 발견하고 “어어~? 이게 뭐야아?”하시기 전까지 조마조마하게 그 순간을 기다리는 동안 장롱이는 잠자코 있어줬다. 아빠의 양복엔 어울리지 않는 재질이어서 몇 번이고 장롱 안쪽 거울에 대 보고서, 절레절레하면서도 결국 매고 나가는 아빠의 그 마음도, 장롱이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터다.


 4평 단칸방에 비해 너무도 커서 네 식구 잠들기 비좁을 때도, 여름이면 빗물 들어차는 반지하에서 나무 삭은내가 날 때도 감히 버릴 생각을 못했었다. 방 분위기 어두워지니 밝은 페인트로 칠해준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만류했다. 서랍이 통째로 망가졌을 때도 기어이 문고리를 고쳐 다시 사용했다. 그렇게 오래 함께한 시간만큼 소소한 비밀들을 품고 여기저기 다치고 고생한 장롱이는, 남매가 모두 독립한 뒤 작은 집으로 옮기신 부모님의 작은 안방과 34년 만에 작별했다. 엄마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니 “당연히 아쉽지~! 오래 잘 썼는데.” 한다. 그런 것치곤 꽤 홀가분하고 경쾌한 목소리다. 장롱이를 보낸(그것도 버리지 않고 중고에 팔았다) 작년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엄마는 이제야 장롱이를 편히 보낼 만큼, 아버지의 부재가 아프지 않은가보다. 장롱은 비밀만 지켜주는 게 아니라 엄마도 지켜주고 있었던 게다.   



이런 거창한 거!ㅋㅋ

 엄마 아버지 없이도, 우리 엄마처럼 씩씩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아마 엄마보다 더 오래 부모님의 흔적을 곁에 두고 지내게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너무 당연하게 결혼할 줄 알았던 20대 초반에는, 목공에 빠져있던 아버지께 신혼집 거실에 소파와 TV 대신 둘 넓적 테이블을 제작해 달라고 떼를 부렸었다.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아버지의 결혼 독촉에 묵언수행하듯 나의 떼부림은 쏙 들어갔드랬지.


    

 아무래도, 좀 뻔뻔하게 그 고집 더 부려봐야겠다. 먼 나중에 부모님과 작별하고도 오래오래 다듬고 아껴가며 앉고 글쓰고 밥 먹는 일상의 추억을 함께할 제2의 장롱이가 필요하겠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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