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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Feb 24. 2020

진득하게, 좀더 찐득하게

태재와 에세이드라이브 3기에서 쓰다 / 키워드: -크림

 “결혼 안 할 거면 이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어. 그만하자 우리.”

 “결혼하려고 나 만난 사람처럼 말하네, 섭하게. 화 가라앉으면 연락해.”   

  

 여느 때처럼 다시 연락이 올 줄 알았건만, 코나의 전화벨은 끝내 울리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전화가 온다면 ‘자기랑 결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결혼이 엎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솔직하게는 그냥 겁났던 거지. 매정하게 들렸지 미안해. 우리 올해는 내내 지겨울 만큼 그 얘기 해보자, 결혼 얘기.’ 라고 부드럽게 말하고 히히 웃으려고 그랬지.     


 코나는 요리도 할 줄 모르고 빨래도 젬병이고 성격도 더러운 편이고 돈도 잘 못 버는데, 대체 무슨 연유에선지 만나던 사람마다 죽자사자 그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내가 볼 땐 빼어난 미인도 아닌데. 아니, ‘빼어난’ 같은 수식어도 필요없이 그냥 미인형 아닌데.

 이런 식의 이별을 두 번 반쯤 겪고 나니 코나는 조금만 질척해질 것 같으면 떠나거나 끊어낼 수 있는 사이를 선호하게 됐다. 다정하고 매너 있게 서로를 대하고 헤어질 때 싱긋 웃을 수 있는, 산뜻한 토너 같은 관계. 처음부터 저 질척일 거예요 하고 다가오는 사람을 특히 끔찍해 했다. “마! 나 너한테 관심 있다!” 하면 거절이라도 깔끔하게 할 텐데. “저기여, 제가여, 코나랑 같은 도서관에 우연히 오게 되었네여...”라든가, “지난번에 인스타에 이거 좋아하신다고 써놨길래...” 하는 사람을 흉 안 지게 덜어내는 건 코나에겐 고역이었다.

    

 허나 토너 같은 관계는 종종 피부가 당기기 마련이라, 그 역시 코나는 힘겨워했다. 토너만으론 조금 아쉽고, 쉽게 갈라지니까. 코나가 간헐적으로 공들이는 만큼만 상대도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그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주는 공허함을 껴안고 괴로워하곤 했다.     


 그러다 로션 같은 사람과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토너보다는 조금 더 촉촉하고, 찐득하지 않을 만큼만 끌어당기는 적당한 온기. 유머러스하고 정다운 가운데 좀더 묵직해져도 괜찮았던 대화. 반드시 매일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연락을 주고받을 땐 온전히 반갑기만 하고, 마치 계속 기다렸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코나는 그 생경한 접촉을 호의적으로 곱씹다가 술 몇 잔에 기대어 그와 밤을 지새웠다. 즐겁고 편안하고 설렜단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코나는 잠시 창밖을 본다. 코나는 뭔가 새로운 걸 알게 되면 늘 나를 불러낸다. 보통은 내가 원하는 술자리가 아니면 일단 거절하고 보는데, 코나가 부르면 하릴없이 당장 나갈 수밖에 없다. 왜인지 모르겠다. 아아- 그에게 청혼했던 두 명 반의 남자들 마음이 뭔지 조금 알겠기도 하다.    

 

이건가보다

 “그러고 내가 새벽에 일찍 먼저 나왔거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 참 많은 사람을 봤어. 괜히 눈에 들어오더라고. 정확히는 연인들. 떡진 머리에 츄리닝에 롱패딩에 슬리퍼 찍찍 끌고 나와 나란히 쓰레기 분리배출하는 지저분한 애들, 뭐 먹을까 하더니 손 꼭 붙잡아 남자 쪽 주머니에 넣고는 신나서 호핑스텝으로 맥도날드 들어가는 뚱돼지 커플, 팔짱도 안 끼고 건조하게 걷다가 횡단보도에 멈춰서니까 갑자기 뽀뽀하던 아저씨 아줌마, 치즈가 늘어나니까 장윤정 얼굴에 날려 붙이고는 좋아죽겠다는 도경완 나오는 예능까지.

 부러운 건 아닌데, 그 구질하고 꼴불견인 게 뭐랄까, 영화의 한 장면들 같았어. 평범한데, 왜 그랬을까.”  

   

역시 내가 바라는 건 좀더 점성 있는 관계인가 봐. 로션보다는 진득한 제형 있잖아, 바디로션보다 더 꾸덕한 거 뭐지? 바디버터 그래 그거. 크림처럼 쫀득하고 기름진 거. 이렇게 혼잣말을 이어가다 코나는 벌떡 일어나 집에 가겠다고 했다. 말해놓고 저답지 않다고 민망해하는 것 같아서, 못 알아챈 척해줬다.    

  

 찐득한 관계엔 책임감이 필요해서 버겁다고 여기는 코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조금 더 묻어두기로 했다. 그 말을 당신에게만 먼저 들려주려고 한다. 굳이 그에게 말하지 않은 건, 다음에 나를 불러낼 때는 이 답을 제가 알아서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답을 스스로 찾으려고 메모에 끄적이듯 오늘 나를 불러낸 걸 테니까.  

 

  '찐득한 관계를 시작하려면 책임감보다도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해, 코나. 너를  보여주고 상대를  보아주겠다는 대단한 용기.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미안해하는  모든 감정을 풍족하게 누릴 단단한 마음을 가졌다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것만 있으면 토너와 로션과 크림 같은 관계가 각각 따로 있는  아니라,  사람과 산뜻했다가 촉촉했다가 끈적했다가  이런  저런    수도 있단 얘기야. 화이팅.'      





* 표지에 Yehuda Devir의 일러스트를 사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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