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와 에세이드라이브 3기에서 쓰다 / 키워드: -크림
“결혼 안 할 거면 이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어. 그만하자 우리.”
“결혼하려고 나 만난 사람처럼 말하네, 섭하게. 화 가라앉으면 연락해.”
여느 때처럼 다시 연락이 올 줄 알았건만, 코나의 전화벨은 끝내 울리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전화가 온다면 ‘자기랑 결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결혼이 엎어진 적이 있었으니까, 솔직하게는 그냥 겁났던 거지. 매정하게 들렸지 미안해. 우리 올해는 내내 지겨울 만큼 그 얘기 해보자, 결혼 얘기.’ 라고 부드럽게 말하고 히히 웃으려고 그랬지.
코나는 요리도 할 줄 모르고 빨래도 젬병이고 성격도 더러운 편이고 돈도 잘 못 버는데, 대체 무슨 연유에선지 만나던 사람마다 죽자사자 그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내가 볼 땐 빼어난 미인도 아닌데. 아니, ‘빼어난’ 같은 수식어도 필요없이 그냥 미인형 아닌데.
이런 식의 이별을 두 번 반쯤 겪고 나니 코나는 조금만 질척해질 것 같으면 떠나거나 끊어낼 수 있는 사이를 선호하게 됐다. 다정하고 매너 있게 서로를 대하고 헤어질 때 싱긋 웃을 수 있는, 산뜻한 토너 같은 관계. 처음부터 저 질척일 거예요 하고 다가오는 사람을 특히 끔찍해 했다. “마! 나 너한테 관심 있다!” 하면 거절이라도 깔끔하게 할 텐데. “저기여, 제가여, 코나랑 같은 도서관에 우연히 오게 되었네여...”라든가, “지난번에 인스타에 이거 좋아하신다고 써놨길래...” 하는 사람을 흉 안 지게 덜어내는 건 코나에겐 고역이었다.
허나 토너 같은 관계는 종종 피부가 당기기 마련이라, 그 역시 코나는 힘겨워했다. 토너만으론 조금 아쉽고, 쉽게 갈라지니까. 코나가 간헐적으로 공들이는 만큼만 상대도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그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주는 공허함을 껴안고 괴로워하곤 했다.
그러다 로션 같은 사람과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토너보다는 조금 더 촉촉하고, 찐득하지 않을 만큼만 끌어당기는 적당한 온기. 유머러스하고 정다운 가운데 좀더 묵직해져도 괜찮았던 대화. 반드시 매일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연락을 주고받을 땐 온전히 반갑기만 하고, 마치 계속 기다렸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코나는 그 생경한 접촉을 호의적으로 곱씹다가 술 몇 잔에 기대어 그와 밤을 지새웠다. 즐겁고 편안하고 설렜단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코나는 잠시 창밖을 본다. 코나는 뭔가 새로운 걸 알게 되면 늘 나를 불러낸다. 보통은 내가 원하는 술자리가 아니면 일단 거절하고 보는데, 코나가 부르면 하릴없이 당장 나갈 수밖에 없다. 왜인지 모르겠다. 아아- 그에게 청혼했던 두 명 반의 남자들 마음이 뭔지 조금 알겠기도 하다.
“그러고 내가 새벽에 일찍 먼저 나왔거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에 참 많은 사람을 봤어. 괜히 눈에 들어오더라고. 정확히는 연인들. 떡진 머리에 츄리닝에 롱패딩에 슬리퍼 찍찍 끌고 나와 나란히 쓰레기 분리배출하는 지저분한 애들, 뭐 먹을까 하더니 손 꼭 붙잡아 남자 쪽 주머니에 넣고는 신나서 호핑스텝으로 맥도날드 들어가는 뚱돼지 커플, 팔짱도 안 끼고 건조하게 걷다가 횡단보도에 멈춰서니까 갑자기 뽀뽀하던 아저씨 아줌마, 치즈가 늘어나니까 장윤정 얼굴에 날려 붙이고는 좋아죽겠다는 도경완 나오는 예능까지.
부러운 건 아닌데, 그 구질하고 꼴불견인 게 뭐랄까, 영화의 한 장면들 같았어. 평범한데, 왜 그랬을까.”
역시 내가 바라는 건 좀더 점성 있는 관계인가 봐. 로션보다는 진득한 제형 있잖아, 바디로션보다 더 꾸덕한 거 뭐지? 바디버터 그래 그거. 크림처럼 쫀득하고 기름진 거. 이렇게 혼잣말을 이어가다 코나는 벌떡 일어나 집에 가겠다고 했다. 말해놓고 저답지 않다고 민망해하는 것 같아서, 못 알아챈 척해줬다.
찐득한 관계엔 책임감이 필요해서 버겁다고 여기는 코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조금 더 묻어두기로 했다. 그 말을 당신에게만 먼저 들려주려고 한다. 굳이 그에게 말하지 않은 건, 다음에 나를 불러낼 때는 이 답을 제가 알아서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답을 스스로 찾으려고 메모에 끄적이듯 오늘 나를 불러낸 걸 테니까.
'찐득한 관계를 시작하려면 책임감보다도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해, 코나. 너를 더 보여주고 상대를 더 보아주겠다는 대단한 용기.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미안해하는 그 모든 감정을 풍족하게 누릴 단단한 마음을 가졌다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것만 있으면 토너와 로션과 크림 같은 관계가 각각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과 산뜻했다가 촉촉했다가 끈적했다가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 할 수도 있단 얘기야. 화이팅.'
* 표지에 Yehuda Devir의 일러스트를 사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