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Mar 01. 2020

'고작 이런' 빚 갚기

태재와 에세이 드라이브 3기에서 쓰다 / 키워드: 소문

 “교장이랑? 헉! 평교사랑? 헉! 임신을? 헉! 그래서 결혼을? 대애애박!”

 학교는 굉장히 좁은 사회라, 교사 커뮤니티 내에 사건 하나 생겼다 하면 경기도 전역으로 순식간에 유명해지는 영광(?)을 누린다. 이번엔 심지어 부산에 있는 친구한테 전해들었다면서 한 동료가 꺼낸 이야기였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여교장이 신규 남교사와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래서 결혼을 했다는 놀라운 스토오리.      


 떡밥이 워낙 강렬해서, 저마다 왜?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같은 의문사를 품고 추측을 해대기에 충분했다. 여럿이 ‘나도 그 얘기 들어봤어’하며 거들었고, 서로 하는 이야기의 결이 조금씩 달랐기에, 들은 이야기 중 어디까지가 양념이었을지 모르겠다. 또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나눈 허무맹랑한 상상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 다시 진실처럼 덧붙여져 퍼날라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처음의 호기심을 덮을 만큼 이 대화가 조금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 생각을 전하면 이해해 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얘기를 할까말까 고민하던 중, 이내 한 동료가 “아~ 불륜이 아니라고? 에이 그럼 좋은 일이네! 축하해 주고 끝냅시다!”하고 마무리지어 주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누군가는 내게 씹선비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겐 화려한 과거가 있다. 찌라시란 찌라시는 다 파고들어 누군지 추측하고, 아는 모든 카톡방마다 퍼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소문 트롤. 오죽하면 “뭘~ 먹어야~ 맛있는 걸 먹었다고 소문이 나나~? 오늘 어딜 가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나나~?”하는 게 말버릇일 정도였다고나 할까. 남 얘기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사피엔스>에서 ‘뒷담화는 인류가 협력하는 공동체로 진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악의적 능력이다’고 했던 것은 내 행동을 정당화하기 참 좋은 재료였다.    

좋은 핑계 요기 있-찌!

 

 “아이돌 ◯◯랑 △△랑 사귀었다가 배우 □□가 끼어들어서 엄청 안 좋게 헤어졌대.”

 헐, 진짜? 대박. 이런 대답을 기대하며 나는 한바탕 수다를 떨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S는 단호하고 친절하게 나에게 되물었다.

 “확실한 사실이야? 어디에 기사가 났는데? 본인 입으로 말했어?”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나는 반쯤 무안하고 반쯤 분한 마음으로 몇 마디 더 항변해봤다. 여의도 발 찌라시는 그래도 대부분 사실이라구, 같은 얘길 여러 채널을 통해 들었다구. 예전에도 □□는 여우라고 소문이 나서…. 하지만 대화를 이어갈수록 하찮아지는 건 내 미천한 의식수준이었다.   

   

 S는 이런 것도 혼냈다.

 “아하. 왜 그렇게 생각했어?”

 “여배우들이 좀 예민하고 그러니까.”

 “그건 여배우들이 엄청 끔찍해하는 고정관념 아닐까? 너 교사들은 보통 ---하잖아, 그런 말 듣기 싫지 않아? 배우들은 그런 거 들어도 된다고 생각해? 유명하니까 유명세를 치러야 되는 건가?”


 하 이 씹선비샛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매번 할 말이 없어졌다. '대체로 사실’, ‘대충 학계의 정설’, ‘이건 팩트야 반박 불가지.’하고 의심한 적 없었던 소문은 따지고 보면 근거 없는 썰에 불과했다. 100% 진실이 아니라면-설사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내 가벼운 입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고 있었다는 걸 천천히, 오랫동안 깨닫게 됐다. 돌아돌아 이 장난 같은 말이 어떤 무게로 상대를 할퀼지 눈앞에 안 보이니까, 그저 뱉고 나면 흩어지는 말뿐이라(고 믿어)서 할 수 있었던 잔인한 놀이였다.     


 뭐라도 대단한 거 깨달은 척 말하고 있지만, 당시엔 누구의 성형 전 사진, 찌라시를 뒷받침하는 사진이나 카톡 내용, 괴소문을 받아 적은 기사나 게시판 글 그 무엇도 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아도 그 포악한 호기심이 무척 힘이 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머리와 마음이 싸우며 절제하는 동안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뒷말


 그동안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던 인물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그것은 더 잘 믿어버린다는 점이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보다). 그걸 깨달은 날, 나에 대한 소문을 전해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행사에서 내가 보인 같은 행동을 두고 누구는 싹싹하다고 하고 누구는 싸가지 없다고 했다. 어떻게 상반된 평가가 동시에 도는지 이해가 안 갔고, 악의적으로 뒷말한 사람의 태도가 억울하고 불쾌했다. 하지만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아끼고 따르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불쾌하기에 앞서 해명하고, 오해를 풀고, 당신과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을 터다.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혹은 상대가 이미 나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퍼뜨리는 거라고, 비로소 생각하게 됐다.     


 이 깨달음이 ‘그러니 모두에게 잘 보여야겠다’, 혹은 ‘내가 잘못했으니 험담이 퍼지는 것, 인과응보다!’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쑥덕공론에 힘겨워하는 누군가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내가 똥을 싸도 나를 이뻐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은 일정 비율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자신을 너무 조이지 말았으면 한다. 누구에게 예쁨받고, 누구에게 미움받을지만 결정하고, 미움받아도 되는 이들로부터의 질타는 스무스하게 스쳐보내면 좋겠다. 열 사람의 칭찬보다 한 사람의 독설이 깊게 꽂히는 걸 알지만 그걸 품에 안아 곪게 둘지, 내다버리고 아물게 할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그 독설들은 대체로 (내가 그간 던졌던 말들과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잔인하면서 놀라우리만치 의미도 근거도 없을 것이다. 괜찮으니 부디, 뒷말에 서글퍼질 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좀더 기대어, 따뜻하고 넉넉한 말들 품에 둘러싸여 지내보기를 바란다.      

 작년에 외롭게 힘겨워하던 연예인 둘을 떠나보내고 내내 괴로웠던 이유는, 감히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서가 아니었다. 5-6년 전의 내가 의미없이 던졌을 잔혹한 말들이 돌고 돌아 그들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그게 그렇게 여전히 얼얼하게 쓰라리다. 괴롭다고 말하는 것조차 면죄부를 쉽게 얻으려는 행동 같아서 당시엔 어디에 말도 못했다.            


그런 얘긴 좀 불편한데ㅋㅋ
에이~ 팩트 맞아?
누난 찌라시 단톡방에 퍼오는 거 안 좋아해.
당사자가 들어도 됨?

 이제와, 늦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런 것들이다. 이 글도 ‘고작 이런 것들’에 속하겠다. 작지만 말로 지은 죄에 대한 빚 갚기다. 읽는 당신이 이 빚 갚기에 공감하고 함께 마음먹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 표지 그림으로 Dribbble의 일러스트를 썼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