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바리 클럽 '힌트북' 에서 <걷는 듯 천천히> 를 읽고서 쓰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본 영화는 <어느 가족> 뿐이라 사실 그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들이 궁금하기 때문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아껴보고 있다-고 말할란다.
보통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면 전에 놓친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인데, <어느 가족>은 첫 관람 때 강렬했던 장면들을 진하게 재확인하고 싶어하며 봤다. 등장인물을 각별히 아끼게 되는 작품이 있는데 이 영화가 그랬나 보다. 그렇게 두 번 보고 난 뒤 수다를 떨면서 그제야, 이 영화의 시선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나는 유괴범, 절도범, 살인자, 시신유기범, 성판매 여성, 고아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이들이 뉴스에 나왔다면, 이들의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다면.
영화 덕분에 함부로 연민을 갖지 않고, 또 쉬이 업신여기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다르게 볼 줄 아는 감각을 선사하는 이 영화를 음미하다 보면 절로 감독을 상상하게 된다. 왜 저 장면을 저렇게 길게 뺐을까, 왜 클로즈업을 오래 했을까, 저 대사는 배우의 것일까 감독의 주문일까, 왜 저 인물이 그런 선택을 하는 전개를 골랐을까.
그에 대한 답이 됐다, 이 책은.
그는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서 문화를 왜소화하는 일을 특별히 경계하는 태도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건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그건 인간 군상이 만들어내는 실패와 반성, 그 반복 뒤에 비로소 느리게 성숙되는 문화를 걷는 듯 천천히 기다리는 일이다. <어느 가족> 역시 그랬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아마 그의 다른 영화에서도 이 고요한 기다림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기다린다'는 말은 '바란다'는 말과 닮아 있다.
인간적이다-라는 표현은 어딘가 좀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의미로 통용되곤 하지만, 세상에 없던 아름다움을 일으키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너무나 다른 모양으로 생겨난 사람들이 모여 놀랍게도 조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품에 담는,
혹은 그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라면, 어렵겠지만 서로를 흠뻑 이해하게 된다면 꼭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을 작품에 담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재 작가님과 닮은 구석도 있다고 느꼈는데, 그래서 [힌트북] 첫 시즌에 선정된 책인 걸까.
이를테면 무라키 씨에 대해 쓴 구절.
‘자신의 나약함이나 어쩔 수 없는 현실, 소중한 친구의 죽음 등을 마주했을 때...그럼에도 자신은 노래를 부르는 것밖에 할 수 없기에 고개를 들고 “그래서 부릅니다” 라고. 저는 이 말이 “그럼에도 부릅니다”가 아닌 것이 그녀의 강인함이자 대단함이라고 느낍니다.’
'그럼에도'와 '그래서'의 차이를 알아주는 사이가 곁에 있는 건 대단한 위로와 지지이다. 그런 섬세함으로 인간의 결을 살피는 이들이 문화의 한 모퉁이를 쌓아올리고, 우리가 향유하면서 함께 느리게 성숙해가고 있다. 읽는 동안 아주 작고 약한 인간1 이라는 사실이 떳떳해졌다. 우린 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걷는 듯 천천히 세상을 함께 일구어가고 있으니까(에헴) 하며 뻔뻔해지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