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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뽀 먹으러 다시 가고 싶은 리스본

이탈리아-로마 -> 포르투갈-리스본(7.22)

by 이수빈

#유럽여행 20일차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공용 주방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고춧가루의 알싸한 향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 달콤 짭조름한 간장 냄새까지. 와, 이거 완전 한국이잖아! 점심시간에 종 치자마자 급식실로 질주했던 학생 때의 마음이 되어 복도 끝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주방에 들어서자 맛깔난 음식들이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고, 이미 여러 사람들이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왔지만 까르보나라를 먹지 않겠다던 한국인 가족은 처음 본 그날처럼 오늘도 여전히 투닥이고 있었고, 새로 온 뉴페이스 손님들은 시차적응 중인지 먹는 내내 연신 하품을 했다. 남부투어를 예약해 놓은 팀은 벌써 다 먹고 서둘러 나가고 있었고, 머리에 새집을 지은 꼬마 아이는 눈을 감은 채 아빠가 떠먹여 주는 밥을 우물거렸다. 누군가는 화급하게, 또 누군가는 느긋하게 각자만의 방식으로 여행자들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날밤에 내일 조식으로 짜장밥과 떡볶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텔레파시를 보냈는데, 안타깝게도 전달되진 못했다. 그래도 준비된 음식은 충분히 기대이상이었는데, 감자보다 고구마를 좋아하는 나지만 먼 타국에서 먹는 감자조림은 그 포슬포슬함이 사랑스러웠고, 앙증맞은 계란말이와 작은 귤은 상큼함을 더했다. 메인인 돼지고기는 제육볶음을 표방했지만 묘하게 떡볶이와 닭볶음탕의 맛도 느껴졌는데, 한 가지 음식에서 세 가지 맛을 구현하다니, 이건 정해진 반찬 가짓수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주방장님의 고도의 전략이 아니었을까. 마음속으로 감사인사를 보내며 당분간은 맛보지 못할 한식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로마 숙소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


공항 가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오전에 로마 3대 젤라또집 중 마지막인 '파씨(Gelateria Fassi)'에 잠깐 다녀오려 했는데 정오부터 문을 연다고 해서 불발됐다. 아쉽긴 했지만 시간 확인을 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도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로마에는 세 개의 공항이 있는데,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그중 규모가 가장 작은 참피노 공항이었다. 그래도 국제선이니 혹시 몰라 출발 3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다음엔 1시간 전에 와도 될 정도로 한산했다. 라이언에어 전용 공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전광판엔 라이언에어 비행기로 가득 차 있었다.


라이언에어 전용 같았던 로마 참피노 공항


긴 기다림 끝에 탑승구가 열렸다. 짐 정리 후, 자리에 착석하는데 그때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이륙 전에도 방송으로 계속 프로모션을 안내하더니,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는 안정권에 들어서자 뭐가 얼마고 많이 사세요~ 이런 류의 방송이 20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윽고 승무원들이 양주, 주얼리 세트 등의 상품을 손에 들고 미스코리아처럼 복도를 걸으며 홍보하는데 내가 지금 비행기를 타고 있는 건지 쇼장에 와 있는 건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몇 만 미터 상공의 흔들리는 비행기에서 복숭아를 베어문 듯 저 화사한 표정과 사뿐한 걸음걸이라니. 내가 심사위원이었으면 바로 최고점을 줬을 테다. 처음엔 시끄러운 방송과 부산스러운 분위기, 승무원보다 방문판매원에 가까운 항공사 정책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중엔 상상을 초월하는 승무원분들의 노동강도에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박수를 쳐드리고 싶어졌다.


처음 보는 생경한 광경에 한참 동안 집중했더니 약간의 환기가 필요했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는 구름 사이로 기다리고 있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얼마만큼의 로마를 본 걸까. 그동안 거쳐왔던 베니스, 밀라노, 피렌체도 차례로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 강연회를 하러 온 이원복 작가님께 <먼 나라 이웃나라: 이탈리아> 편을 챙겨가서 표지에 사인을 받을 정도로 이탈리아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의 나라였다. 이유불문 그냥 끌렸다. 국가 모양이 장화모양이라는 것부터 뭔가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런 이탈리아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쿠션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돌좌석에 앉아, 승무원들의 열띤 홍보성 멘트를 들으며, 멀어져 가는 이탈리아 땅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나는 미소를 띤 채 언젠가 이탈리아에 다시 올 그날을 이미 상상하고 있었다.


리스본 포르텔라 공항 내 스타벅스. 식별을 위한 닉네임과 귀여운 스마일 표시


라이언에어에 대한 무성한 소문을 뒤로한 채 리스본 포르텔라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안 좋은 후기가 많아서 걱정을 했었는데 캐리어도 누락된 것 없이 잘 도착했고, 도착시간도 지연 없이 딱 맞췄다.


숙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서 공항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탈리아에는 스타벅스가 밀라노 빼곤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포르투갈은 도착하자마자 있어서 반가웠다.(현재는 피렌체, 로마, 베로나 등에도 생겼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스벅의 맛. 음, 첫맛부터 끝맛까지 한국에서 마시던 맛과 정확히 일치했다. 순간 한국의 어느 스벅 매장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새삼 글로벌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주문할 때 이름을 물어보길래 Lee라고 알려줬는데, 알고 보니 컵에 쓰는 용도였다. 아메리카노가 담겨있을 때는 몰랐는데 다 마시고 나니 보호색으로 가려져있던 이름과 귀여운 스마일 표시가 드러났다. 전혀 생각지 못해서 더 기쁘게 느껴지는 깜짝 선물이었다. 에그타르트의 나라답게 베이커리 쇼케이스에 나타(nata)라는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시켜봤는데 음, 맛은 정직한 글로벌 프랜차이즈의 맛이었다.




숙소까지 이동할 우버를 부르자 날쌘 흑표범 같은 세단을 몰고 여자기사님이 오셨다. 하얀색 캣아이 선글라스를 끼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10초 단위로 바뀌는 좁은 골목길을 달리는데 온몸에서 멋스러움이 흘러넘쳤다. 스피커에서는 포르투갈어 노래가 흘러나오고 양옆엔 노랗고 파란 벽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새 챕터가 열렸다는 표지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로마와는 180도 다른 한적한 분위기, 수도인데도 수도 같지 않은 고요함과 평온함이 공존하는 길거리, 뒷모습에서마저 여유가 느껴지는 사람들의 움직임. 음,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었다.


기사님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숙소 대문 앞에 우리를 내려주고 "Bye."를 외치며 쿨하게 떠났다. 잠시 기다리자 푸른 셔츠를 걸친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나타나 2층 숙소까지 캐리어 옮기는 걸 도와줬다. 집은 전체적으로 화이트 앤 블루로 깔끔하고 시원한 호스트의 이미지와 닮아있었다. 거실 탁자 위에 숙소를 중심으로 주위에 어떤 편의시설이 있는지 표시해 놓은 지도가 있었는데, 특히 맛집에 대해 메뉴와 가격뿐 아니라 분위기와 계단 표시, 가게마다의 독창적인 특징에 대해 세세하게 큐레이션 해놓은 게 감동포인트였다. 호스트의 친절함과 개성이 여러 형태로 집 곳곳에 녹아져 있어서 하나씩 발견해 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약간의 휴식 후, 호스트가 준비해 놓은 지도에서 숙소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만큼 너무 피곤해서 맛집을 찾을 에너지도 없고 멀리 갈 시간도 없어서 호스트를 믿어보기로 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얕은 계단을 올라가니 붉은 차양막이 쳐져있는 작은 식당이 나왔다. 지도에 '외국인들은 잘 모르는 현지인 맛집'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는데 정말 그래 보였다. 정.말.로. 현지인이 아니면 도저히 찾아오지 못할 골목 안에 위치해 있었다. 식당은 70대 노부부가 운영했는데 할머니께서 요리를 하고 할아버지께서 서빙을 하셨다. 가게 앞에 선 우릴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할아버지께 영어로 물으니 포르투갈어만 하실 줄 아셔서 손짓으로 밥을 먹으러 왔다는 걸 알렸다. 그러자 야외 테라스 자리로 안내해 주셨는데 다행히 메뉴판은 영어버전이 있어서 수월하게 주문할 수 있었다.


좁은 골목길 안에 숨겨져있는 포르투갈 현지인 맛집


대략적인 포르투갈 여행 일정에 대해 조율하고 남은 여행경비를 계산하다 보니 금세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아닛, 문어 다리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다니! 초장에 찍어 먹는 문어숙회는 질겨서 좋아하지 않는데, 여기 문어는 어떻게 조리를 했는지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솜사탕처럼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릇에 올리브유가 흥건해서 느끼하려나 싶었는데 오히려 문어의 풍미를 올려주면서 고소함을 극대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해물밥과 대구구이도 식재료의 신선함이 그대로 느껴져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포르투갈의 펄펄 뛰는 해산물이 혈관을 돌며 우릴 현지인으로 변모시키기에 충분한 식사였다. 이 식사의 끝에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 아, 역시 현지인 추천은 따라갈 수가 없다.


너무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값을 치르고 가려는데 갑자기 엄마가 토끼처럼 폴짝 뛰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싶어 급히 따라 들어가니 엄마가 주방장 할머니께 맛있게 잘 먹었다고 감사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껜 맛 표현을 적극적으로 했는데 정작 음식을 만든 할머니께는 하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나 보다. 엄마가 한국어로 "너무 맛있었어요.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자, 두건을 머리에 두른 할머니께서 눈을 껌뻑이며 낯선 이방인의 얼굴을 빤히 보시더니 포르투갈어로 뭐라 말씀하셨다. 그렇게 두 여인은 끝까지 각자의 언어를 고수했다. 하지만 언어가 달라도 묘하게 대화가 통하는 느낌이랄까? 헤어질 때 손톱달처럼 휘어진 눈꼬리로 서로에게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의 뺨이 발그레했다.


비록 며칠밖에 머물지 않지만 우리 동네에 이런 맛집과 따스한 사장님들이 있다는 게 감사했다. 가게를 나서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떠나기 전에 잊지 말고 꼭 한 번 더 오자고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연히 마주한 리스본의 해질녘 하늘


볼록해진 배를 통통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리스본의 해질녘 풍경이 펼쳐졌다. 빼곡히 들어선 붉은 지붕이 노을과 멋스럽게 어우러졌다. 분명히 이국적인 풍경인데 이상하게 여기서 20년은 산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다른 수도들은 대체로 평지에 넓은 대로가 펼쳐져있는데, 여긴 좁은 골목길에 앙증맞은 노란색 트램이 지나다녀서 그런지 수도라기 보단 한적한 시골 휴양지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노란빛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저녁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저녁거리를 걸었다. 오늘은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맛보기 스푼으로 한 스쿱 떠서 맛본 느낌이랄까. 내일은 또 어떤 맛으로 다가올지 기대되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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