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급작스레 바뀐 날씨 탓에 봄 아우터를 사러 백화점에 갔다. A매장에서 옷을 고르는데 먼저 와있던 50대 여자분이 상의부터 하의까지 여러 벌을 입어보고 있었다. 엄마의 안목 덕에 난 비교적 빠르게 아우터를 골랐고, 내 옷의 결제가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50대 여자분이 이어서 결제했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 백화점 B매장에서 옷 하나를 사려는데 카드가 이상했다. 엄마 카드는 10% 할인이 적용되는 카드인데 5%밖에 적용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카드를 받았는데 세상에, 카드에 엄마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영문 대문자로 대문짝만 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래, 카드를 지갑에서 꺼냈으니 바뀌었겠지? 얌전히 있던 카드가 저절로 변할 일은 없으니까. 최근에 언제 카드를 꺼냈더라? 아, 그때다! 며칠 전 A매장에 아우터 사러 갔을 때. 답은 쉽게 나왔다. 당장 A매장으로 뛰어갔다.
설명을 들은 A매장 직원의 안색은 흙빛이 됐고, 전화 한 통으로 그날 엄마 카드로 결제를 했던 30대 초반의 여자 매니저가 뛰어왔다. 전자영수증을 확인하니 봄 아우터에 더해 우리가 구매하지 않은 옷이 A매장에서 엄마 카드로 결제가 됐고, 다른 날 누군가 지하 푸드코트에서 먹은 음식도 엄마 카드로 결제가 되어있었다.
매니저는 바뀐 카드의 소유주와 전화해서 상황을 파악한 뒤 연락하겠다고 했고, 우린 B매장으로 가서 지금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B매장 직원은, 엄마 카드는 10% 할인이 되는 카드이고 바뀐 카드는 5%만 되는 카드여서 상대방도 결재할 때 분명히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텐데요...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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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뒤, A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그때 동시간에 있었던 50대 여자분과 카드가 바뀐 게 맞고, 결제할 때 카드를 잘못 준 것 같다고 했다. 매니저는 미안하다고 했고 엄마와 난 당황스럽긴 하지만 괜찮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백화점 카드라 다른 곳에선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일반 신용카드였으면 정말 일이 커질 뻔했다.
그럼 카드를 언제 돌려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월요일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오늘 내에 카드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화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와 나에겐 반갑지 못한 소식이었다. 오늘 물건을 사지 못하는 것도 불편한데 평일에 또 나와야 한다니, 흠.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월요일 몇 시에 오면 되는지 물어보니 매니저는 머뭇대며 시간 약속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응? 그럼 우리더러 하루 종일 기다리란 건가..? 다른 사람의 사용 내역이 남아있는 것도 찜찜한데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건 더더욱 별로였다. 시간 약속을 잡아서 다시 알려달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30분 뒤, 다시 전화가 오더니 화요일 1시에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엥? 왜 갑자기 하루가 늦춰진 건지 물으니 이유는 자기도 모르겠다며 우물쭈물했다. 카드가 뒤바뀐 것도 황당한데 약속 시간도 계속 바뀌고, 다음 일정을 가지 못하고 계속 대기하고 있어 슬슬 짜증이 나던 참에 불확실한 매니저의 대처는 기름을 부었다.
오늘 우리가 백화점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50대 여자분은 엄마 카드를 계속 쓰고 다녔을 것이고, 그러면 바로 잡아야 하는 내역도 얼마나 많아졌을까. 또 본인과 관련 없는 노이즈가 기록으로 남아있는 걸 싫어하는 엄마에게 이 상황은 너무나 큰 스트레스였다. 모든 게 엇박자를 타고 가는 흐름에 참다못한 엄마는 결국 폭발했다. 매니저님에게도, 카드가 바뀐 상대측에게도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최대한 맞춰주려 했는데 계속 말이 달라지는 이 상황에 화가 나고, 상대측은 본인 카드로 결제한 게 하나도 없으니 상관없을지 몰라도 나는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이에 대해 전혀 배려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다음 주 화요일, 1시에 맞춰 A매장에 가니 잠깐 사이에 50대 여자분은 엄마 카드를 주고 본인 카드를 가지고 간 후였다. 엄마는 매니저를 보자마자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땐 기분 좋게 주말에 쇼핑하러 나왔는데 명확하지 않은 매니저님의 대처가 답답했고, 상대측의 배려 없는 태도에 속상해서 그랬다고. 그러자 매니저는 아니라며 자신의 실수로 모든 걸 번거롭게 만들어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렇게 사과배틀을 이어가던 두 사람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좋아하는 브랜드인데 매니저님이랑 껄끄러운 사이가 될까 봐 걱정했다고 했고 매니저는, 자주 오시는 거 아는데 자신의 미흡한 대처 때문에 저희 브랜드 자체를 싫어하시게 될까 봐 걱정했다며 서로의 진심을 나눴다. 두 손을 꼭 잡고 말하는 두 사람을 난 못 본 척 살포시 뒤돌아있었다.
한바탕 눈물의 화해를 한 후, A매장에서 50대 여자분의 결재 내역을 취소하고 지하 1층에 가서 50대 여자분이 먹었던 음식 결재 내역을 취소했다. 그리고 B매장에 가서 원래 사려던 옷을 결재했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처럼 피할 틈 없이 벌어졌던 일주일 동안의 소란이 마침내 모두 해결됐다.
이 사건 이후, A매장 매니저님과는 더 돈독한 관계가 됐다. 만나면 먼저 밥 먹었냐고 묻는 사이가 됐고 멀리서 서로를 발견하면 웃으며 눈인사를 하는 관계가 됐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게 이런 걸까. 하지만 카드가 뒤바뀌는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이래저래 번거로워지는 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원래 내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면 덥석 받기보단 착오가 있는 건 아닌지 한 번 더 확인하자. 세상에 공짜는 없고 이유 없는 호의도 없으니까.
이날 이후로 생긴 사소한 습관이 하나 있다면, 결제 후 카드를 돌려받을 때 카드에 적힌 이름을 물끄러미 확인해 본다는 것. 소나기를 비켜갈 순 없지만 우산은 챙겨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