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단골 아닙니다

사람의 본모습은 진짜 어려움이 닥쳤을 때부터

by 이수빈

엄마 옷을 사러 갔을 때의 일이다. 중요한 자리에 가야 하는 일이 생겨서 정장 스타일의 옷이 필요해진 엄마와 적당한 옷을 찾아봤다. 하지만 옷이 마음에 들면 사이즈가 없고, 재고가 있으면 옷이 마음에 안 들었다. 쇼핑을 하러 갈 때마다 직면하게 되는 그 흔한 딜레마 상황에 빠진 것이다. 여러 매장을 둘러봤지만 결국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했다.


최후의 보루로 엄마가 한 번씩 찾던 옷가게에 갔다. 다른 동네에 있어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이곳에 올 때마다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는 60대 여사장님은 특유의 콧소리로 우리를 환대했다. 늘 그렇듯 옷은 입어봐야 안다면서 마음껏 둘러보고 마음껏 입어보라고 했다. 엄마가 요청한 옷뿐만 아니라 본인이 추천하는 룩도 곁들여서 입어보라고 재촉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장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새로 나온 옷도 소개했다.


얼마 후, 옷을 여러 번 갈아입은 엄마의 얼굴에서 고단함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옷을 찾을 수 없었다. 바지는 핏이 엄마와 맞지 않았고, 트위드 재킷은 길이가 너무 짧거나 색감이 원하는 톤이 아니었다. 거의 반나절을 할애했는데 원하는 옷을 찾지 못해 아쉬웠다. 이번엔 유독 찾기 힘들네요, 라고 하면서 사장님께 미안하지만 다음에 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사장님이 인상이 확 바뀌면서 말했다.


"아니, 이만큼 봐놓고는 하나도 안 산다고? 아까 저 바지는? 사는 거 아니었어?"


순간 이게 무슨 말이지..? 이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보통 다음에 올게요, 하면 의례적으로라도 잘 가라고 하는 게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이 아닌가. 처음 본 사이도 아니고 분기마다 얼굴도 보고 옷도 여러 벌 사갔는데.. 어느새 상냥하던 말투는 공격적으로 바뀌었고, 해요체는 반말로 변해있었다. 버퍼링 걸린 내가 눈을 깜빡이는 동안 엄마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 바지.. 예쁘긴 한데 제 체형과는 좀 안 맞아서요. 저도 너무 아쉽네요."


그러자 사장님은 하! 웃음소리를 내더니,


"아휴, 이 옷들 다 접어 넣어야 하는데. 나 참..."


뒤의 생략된 말은 입술의 달싹거림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라고.


안목이 좋다며 입이 마르도록 엄마를 칭찬하고 옷은 입어봐야 안다면서 입어보고 싶은 거 다 입어보라며 상냥하게 말하던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는데, 다음에 오겠다는 말 한마디에 친절함은 빠르게 식었고 예의는 실종됐다. 사장님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분풀이를 하듯 옷을 퍽퍽 집어던지는 몸짓에서 지금의 감정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우리가 떠날 때까지도 옷은 풀풀 날리는 먼지와 함께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있었다.




그날 밤, 아빠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아빠는 요즘 워낙 경기가 안 좋아서 그랬나 보다, 라고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생계가 걸린 문제 앞에선 누구나 우아해질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마음에 드는 옷이 있었으면 바로 샀을 것이다. 엄마는 진실로 옷이 필요했고 통장 잔고는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몇 번이나 잘못된 사이즈를 들고 왔을 때도 우린 차분히 기다렸고, 품번을 잘못 봐서 한 번이면 될 일을 두 번 세 번 일로 만들었을 때도 그러실 수 있다며 웃으며 넘겼다. 수북이 쌓인 옷은 본인의 잘못에 대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덕분에 난 두 가지를 알게 됐다. 진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의 본모습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 가게는 오늘부로 단골을 잃었다는 것. 가끔씩 우아함을 유지하는 데엔 얼마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걸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엄마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순간이 생각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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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을 나와 엄마와 팔짱을 끼고 빠르게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친절하게 맞아주던 여사장님의 얼굴과 일그러지던 얼굴이 허공에서 겹쳐 보였다.

엄마, 어떤 표정이 정말 저 사장님 거였을까?

내가 묻자 무표정한 얼굴의 엄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입술을 한 일자로 앙다문 나도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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