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연작 2 : 존경은 일방적이 아닌 상호적인 것
<어른 존경에 대한 기록>
우리는 학교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어른을 존경해야 한다, 라고 배운다. 특히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우 이러한 예의범절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렇다면 왜? 그 이유를 해부해 보면 두 가지로 나눠진다.
시간, 그리고 방향
우선, ‘시간에 대한 존경’ 이다. 학생보다 어른이 더 오래 살았다는 것, 다시 말해 살아온 시간이 더 길다는 이유에서다. 우리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시간의 축적은 지혜가 있음을 방증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에 대해 ‘시간에 대한 존경’ 그 자체는 일단 유효하다. 두 번째는 ‘방향에 대한 존경’ 이다. 사실상 존경에 대한 논의는 이 부분이 핵심이다. 사람은 타인을 판단할 때 보통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판단하게 된다. 만약 그 사람이 한 말이나 행동이 본인이 생각하는 존경의 판단기준에 부합한다면 존경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존경의 사전적 의미도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이다. 즉 그 사람이 행하는 '방향성'이 존경을 할지 말지의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과 ‘방향’ 모두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방향에 대한 존경’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시간에 대한 존경’을 생각하며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고등학생 때 일기장 기록.
고등학교 1학년 때, 사회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다. 기능론과 갈등론에 대해 설명하던 L교사가 잠깐 딴 길로 새더니 갑자기 우리 반의 한 여학생을 지칭하며 이렇게 말했다. "니들도 00이처럼 이렇게 고급스럽게 생겨야지." 순간 내 귀가 잘못됐나 싶었다. 혹은 저 교사의 입이 잘못되었거나. 외모 평가라니. 그것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 많은 학생들을 앞에 두고?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L교사는 그렇게 몇 분 정도를 더 떠들었고, 교실 안의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L교사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다음 수업부터는 학생들의 수업참여도가 저조해졌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라앉은 교실 분위기에 기가 죽었던지 L교사는 난데없이 앞에 앉은 순서대로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보라고 했다. 학생들이 '라면', '아이스크림', '김치' 등을 말했을 때 그런 수준 낮은 거 말고 좀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음식을 말해보라고 했고, 그럴수록 학생들은 반발심에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식품을 줄줄이 말했다. 결국 누군가 '젤라또'를 말했을 때, 비로소 이 의미 없는 기차놀이는 멈췄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 김치와 아이스크림을 게걸스럽게 먹는 L교사를 급식실에서 보았고, 그 순간 느낀 내 감정은 역겨움이었다.
이날 밤, 내 일기장에는 '어른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를 주제로 한 일기가 적혔다.
시간이 흘러 어른 존경 문제는 내 머릿속에서 까마득히 잊혔다. 그렇게 잘 살고 있었는데 이 화두가 다시 내 잠재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건이 생겼다. 대학교 1학년 때, 현대시 전공수업에서 한국의 대표 시인들을 한 명씩 맡아 발표하게 됐다. 내가 발표한 시인은 훌륭한 작품을 쓴 걸로 평가받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활동을 한 어두운 과거도 있는 인물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이 시인의 작품을 무수히 많이 접하고 공부했지만 한 번도 친일 활동을 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발표 마지막 즈음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며 중, 고등학교 문학수업을 할 때 친일행적이 있는 시인이라면 그때 썼던 일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시를 짚으면서 시인의 생애와 작품활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네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목숨 걸고 독립운동할 수 있었겠냐? 어? 말해봐. 제일 먼저 도망가지 않았겠어? 그 시대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라며 친일행적에 대해 합리화하기 바빴고 본인의 스승이었던 이 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공격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기보단, 일제강점기 당시 그런 선택을 했던 시인이 느꼈을 공포심을 설명하고 인간이 가진 양면성에 대해 말해줬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나니 답이 나왔다. 존경받을 태도를 갖추지 못한 어른은 존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 간단한 결말을 얻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등학생의 나는 어떻게든 어른을 이해해보려 했고 존경하려 했다. 그래서 어른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를 '해부'까지 해가며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존경받을 자격이 없는 어른들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너무도 오랜 시간 찾아 헤맸다. 나를 계속해서 구석으로 몰아붙였고 한없이 작아진 나의 인성을 탓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결코 찾아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높은 확률로 이런 어른들이 학생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며 투덜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어른을 이유 없이 무시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전날밤에 수업 컨셉에 맞춰 학교에 입고 갈 옷을 고른다는 과학과목의 S교사를 존경했고, 이른 아침 학교 오는 길에 발견한 작은 민들레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 준 국어과목의 C교사를 존경했으며,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들을 위해 매년 홈커밍데이를 기획하고 개최하는 영어과목의 K교사를 존경했다. 월요일 아침수업을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 학기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활짝 웃는 미소와 함께 "여러분, 해피 월요일!"을 외쳐준 H교수를 존경했고, 20대의 고민을 오랜 시간을 들여 진지하게 들어주는 60대의 Y교수를 존경했다. 학생도 어른을 존경한다. 존경하고 싶은 어른을 간절하게 찾아 헤맨다.
반면에 존경받을 태도를 갖춘 어른은 투덜대지 않는다. 늘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한다. 존경받고자 한다면 전제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줄 필요도 없다. 그저,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학생들이 나도 커서 저런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도록. 학생들은 특별하고 놀라운, 어마어마한 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존경은 일방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아름다운 문화가 아니다. 애초에 일방적인 건 아름답지 않다.
과거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지혜가 많다는 인식이 있었고 한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존경받는 시대는 끝났다. 존경을 받는데도 자격이 필요하다. 학생들은 존경할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마음을 다해 존경한다. 존경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뿐이다.
아, 오해는 마시길. 어른이 그러하듯 학생들 중에도 존중받을 태도를 갖추지 못한, 그럴 자격조차 없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학생들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 또한 이런 학생들은 만나고 싶지 않고 함께하고 싶지 않고 제발 내 인생에서 나가줬으면 싶다. 서로 존중받고 존경할 태도를 갖춘 사람들끼리만 만나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우린 알지 않는가. 세상은 그렇게 화사하게 생겨먹지 않았다는 걸.
그저 열일곱의 내가, 스물의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화두에 대해 똑같이 고민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당신 주변의 진짜 어른을 찾길 바란다는 응원과 함께. 누군가에게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