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대신 발 닿는 대로 리스본 거리 탐험하기

포르투갈-리스본(7.24)

by 이수빈

#유럽여행 22일차


눈을 떴다. 세로로 길게 뻗은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얀 이불속에 몸을 둘둘 말고 협탁으로 삐죽 손을 뻗어 폰을 집어든다. 액정 화면에 찍혀있는 네 개의 숫자, [10:30]


와, 10시 30분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고 이내 돌아누웠다. 천장을 보고 누운 입가엔 초승달 같은 미소가 걸렸고 기쁨에 겨운 발가락은 쉴 새 없이 꼼지락거렸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여유. 그래, 지금쯤 이런 쉬는 타임이 절실했지. 잘 마른 뺄래처럼 보송한 충족감이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원래 오늘은 포르투 당일치기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2주 전, 파리에 있을 때 포르투 가는 기차를 예매해놨어야 하는데 그만 깜빡해서 급하게 어제저녁 사이트에 들어가 봤더니 표값이 평소보다 3배 이상 올라있었다. 아아, 이건 명백히 교통편 담당인 나의 실수였다. 고민이 됐다. 대학교 선배가 유럽여행 중 포르투가 제일 좋았다고, 꼭 가보라고 했는데 표가 3배 비싸더라도 가야 하나. 아니면 기차표도 비싸고 가는데 편도 3시간 20분이 걸리니까, 실질적으로 도시를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5시간 밖에 안 되고 길에서 7시간을 보내는 셈인데 다음을 기약해야 하나.


고민 끝에 리스본에서 하루 더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나가니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져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제발 1시간만 더 자게 해 주세요.'를 소원으로 빌고 있었으니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마음 놓고 늦게까지 푹 자고 일어나자고 한 결과, 10시 30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 것이다. 여행을 시작하고부터 생긴 루틴이 있는데, 엄마가 6시 30분에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하면 7시에 나를 깨운다. 내가 준비하면 7시 30분에 오빠를 깨운다. 그리곤 8시에 숙소에서 출발. 이 루틴을 베니스에서 딱 한 번 빼고 계속 지켜왔다. 그동안 어떻게 새벽 1시 넘어서 자고 매일 7시에 일어나서 8시에 출발하는 일정으로 생활했는지...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강행군이었다. 그렇다. 당신이 이미 눈치챘듯 합리화는 이렇듯 손쉽게 이뤄진 것이다.



아침시간을 갓 태어난 코알라처럼 늘어지게 즐기고 점심을 먹으러 숙소 근처 노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을 재방문했다. 이틀 전, 리스본에 도착해서 저녁으로 먹었던 곳인데 떠나기 전 다시 한번 꼭 오자던 약속을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생긴 자유시간 덕에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괜찮았다. 이곳에서의 좋았던 시간은 우리가 간직하고 있으니까. 익숙하게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저번에 시켰던 메뉴로 똑같이 시키려다 약간의 새로움을 더해 보고자 생선 종류만 교체했다.


문어 다리는 말할 필요도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고, 한 마리 통으로 구워져 나온 도미구이도 살이 부스러지지 않고 꼬독꼬독했다. 어제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먹은 유명 맛집의 해물밥보다 여기 해물밥이 몇 배는 더 맛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식재료의 신선함과 시간이 빚어낸 손맛으로 승부 보는 동네 식당, 그 진가가 제대로 발휘되는 숨은 맛집이었다. 이러니 평소엔 생선보다 고기를 좋아하는 우리지만 리스본에서만큼은 해산물파가 될 수밖에.



배를 채우고 나자 발 닿는 대로 걷는 리스본 거리 탐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도를 보지 않고 걷다가 예쁜 골목이 나타나면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궁금한 브랜드의 매장이 있으면 주저 없이 들어갔다. 잊을만하면 어디선가 트램이 등장하고 물결무늬 패턴의 돌바닥은 마치 파도처럼 일렁여 예술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도시 전체에 카펫을 깔아놓은 듯 아늑한 기운이 맴돌았다. 애초에 목적지가 없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시간에 쫓겨서 갈 때와는 전혀 달랐다. 우리가 가는 곳이 길이었고 닿아야 할 곳이었다.


유일하게 목적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명품거리였는데 음... 포르투갈은 패션은 아닌 걸로! 기대했던 구찌도 매장이 작고 물건도 몇 개 없었다. 짐이 무거워 포르투갈에 와서 사려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참고로 각 브랜드 본점이 규모도 제일 크고 물건도 많아서 보기 좋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또는 각 브랜드 본점에서 사도록 하자.



명품거리 앞은, 무성하게 자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로 가득 매워져 있었다. 거대한 초록 양산이 펼쳐진 듯 아름다웠고 울창한 나뭇잎 사이사이로 비치는 볕뉘는 포근한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덕분에 숲 속을 거닐듯이 쾌적하게 산책을 즐기는데 아니, 저게 뭐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길거리에서 돈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유리벽 안에 든 종이돈이 로또 추첨공처럼 팔랑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이 방영되던 때라 거리에 홍보용으로 만들어놓은 거였다. 세로로 난 작은 틈에 손가락을 넣어 몇 번 까딱거리면 돈을 집을 수 있었는데 컨셉을 잘 살린 기발한 마케팅이었다. 줄을 서서 우리도 돈을 잡아보았는데 애석하게도(?) 넷플릭스 직인이 찍힌 가짜 돈이었다. 하하.


사람들이 줄 서서 사 먹길래 따라서 하나 사본 돼지고기 샌드위치 '비파나(Bifana)'. 비유하자면 우리나라 길거리 토스트 같은 포르투갈의 간식인데 맛은 그저 그랬다. 고기는 퍽퍽하고, 빵은 뻣뻣하고, 소스는 밋밋했다. 평범한 재료가 모여 비범한 맛을 내길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또다시 걷다가, 이번엔 리스본 시내에서 유명하다는 브랜드의 에그타르트를 먹어봤는데 파이지는 바삭했지만 내용물이 많이 달아서 별로였다. 먹으면 먹을수록 '이 맛이 아니야.'라는 실망감이 짙어졌다. 그때,


"아, 어제 먹었던 그 집 에그타르트가 최고였는데."


엄마의 아쉬움 섞인 한 마디가 트리거가 되었고, 우린 그 길로 벨렘지구를 다시 찾아갔다. 보통 여행할 땐 최대한 다양한 곳을 경험해보고 싶기 때문에 웬만해선 같은 곳을 가지 않는데, 점심으로 먹은 해산물 요리 가게도 그렇고 지금의 에그타르트도 그렇고 다시 찾아가는 곳이 하루에 두 군데나 되다니,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만난 <파스테이스 드 벨렝>. 어제 왔을 땐 엄마가 넉넉하게 사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빠가 일인당 두 개씩만 사 와서 감질맛만 남기고 끝났었는데, 이번엔 일인당 무려 다섯 개씩(!!) 먹을 수 있도록 사 왔다. 총무님의 파격적인 결정에 엄마는 만세를 불렀고, 나는 기쁨의 내적댄스를 두둠칫 췄다. 여행을 와서 맛만 보자는 전략은 그리 좋은 마음가짐이 못된다. 다시 오지 못할 곳이라는 애틋한 감정이 바탕이 되어야 후회를 남겨두지 않고 갈 수 있다. 시간도, 돈도, 마음도 통해야 동행이 되어 함께할 수 있는, 이 엄청난 운이 맞닿은 에너지 집약체인 여행이라는 행위를 하는데 여운도 아닌 한을 남기고 가서야 되겠나.


이번엔 갓 구운 에그타르트로 '시식'이 아닌 '식사'를 했고, 실컷 먹고도 남아서 포장해 가서 내일 아침으로 먹기로 했다. 포르투갈을 떠나기 전 한 번 더 먹어봐서 이제 여한이 없다는 엄마의 만족스러운 소감에, 오빠와 나는 흐뭇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다. 리스본이 입맛을 너무 높여놔 버려서 한국에 돌아가면 웬만한 에그타르트는 성에 안 찰 것 같은데... 점심 먹으러 도쿄 가듯이 에그타르트 먹으러 리스본 와야 하나.. 너무 먼데... 이거 참 난감하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갔다. 어제는 전망대에 올라가서 노을을 봤는데 오늘은 벨렝 지구에서 트램을 기다리며 노을녘을 맞이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손에 들린 에그타르트를 닮은 노랑빛 하늘이, 왼쪽에는 연푸른빛에 옅은 분홍이 수줍게 스며드는 조스바를 닮은 하늘이 펼쳐졌다. 동서양의 조화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참으로 군침 도는 광경이었다.


빛이 산란되는 사진도 은근 멋이 있는 듯도 싶고.


트램 15E에서 내리자 까만 밤하늘 아래 은은한 빛으로 둘러싸인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연두와 주황이 쏟아내는 아늑한 빛의 향연이 예뻐서 그 모습을 담으려 폰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빛이 퍼지면서 액정 속 화면이 뿌옇게 흐려졌다. '어라?' 어플을 지우고 다시 들어가 봤지만 상황은 똑같았다. 우린 렌즈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마음이 상당히 심란했다.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진이 말썽이라니. 급한 대로 검색해 보니 렌즈를 깨끗이 닦지 않으면 빛이 산란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음.. 이게 정말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뽀독뽀독 렌즈를 잘 닦고 카메라 어플을 켰다. 선명하고 깨끗한 피사체가 화면 가득 채워졌다. 아니... 겨우 이거라고?! 문제상황도, 그 해결도 너무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헛웃음이 났다. 잠깐 사이에 A/S 센터를 찾아야 하나, 비용은 어느 정도 할까, 스페인에서는 사진을 포기해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했던 나 자신이 그렇게 우스워 보일 수 없었다. 이렇게 또 하나 배웠다. 심각해 보이는 일도 때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상황이 끝맺어지기 전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샌들을 신은 맨발에 달궈진 돌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도 괜찮구나. 늘 뭐 하나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지는 여행지에서 찾은 평온한 감정이 감사하고 소중했다. 문득 내일이면 이 길도 작별이라 생각하니 새삼스레 더 예뻐 보였다. 반들반들 닦인 바닥돌도, 주황빛 가로등도 안녕. 며칠 동안 우리에게 기꺼이 길과 빛이 되어준 사물들에 고조곤히 작별인사를 건넸다.


하루의 끝, 고요가 내려앉은 돌길을 자박자박 걸어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만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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