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가치에 대하여 책 <니체의 삶>과 <행복의 조건> 그리고 존경하는 고영성 작가, 신영준 박사의 통찰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
가장 먼저 고통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가도록 하자.
"인생은 고통이다"
신박사tv에서 그는 고통의 공식을 말하는데,
생각(기대치) – 현실(능력치) = 고통(간극)
꿈/목표 = 인생 = 고통 (높은 곳으로 가는 통로)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기대치가 있는데 현실에서 나의 능력치와 간극이 발생하면 고통이 온다. 이를테면 나는 연봉 1억을 원하지만 내 능력은 아직 5천이라면 부족한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은 삶의 자양분이 되어주기도 하는데, 내가 꿈이 있고 목표가 있으면 그 인생은 기대치와 능력치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의 고통이 오히려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을 주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프리드리히 니체-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특히 경쟁자라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쾌감을 느낀다. 강 건너 불구경이 재미있듯.
하지만 니체는 그 고통이 나에게 왔을 때 제대로(인식의 전환) 맞이한다면 타인이나 수동적 고통보다 더 많은 쾌감을 선사한다고 말한다.
그의 아포리즘(aphorism 명언)에 경청할 가치가 있는지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열흘 전 10월 15일은 니체 탄생일 176주기 (1844년생)였다. 그날이 의미 있던 이유는 그의 삶을 통해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재정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
누군가 삶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고통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고통은 다르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기에. 하지만 니체의 고통은 종합 선물세트다. 그는 평생 육체적 고통 속에 살아갔다. 너무 아파서 삶 자체가 요양이었고 현대를 살아갔다면 일반 진통제는 먹히지도 않아서 매번 모르핀이나 처방된 진통제에 중독되어 살지 않았을까. 그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 고통은 종국에는 그를 미쳐 버리게 만들었다. 고통에 저항하면서 위대함을 쫓으려다 보니 40대 중반에 정신병이 그의 삶을 지배해 버린다. 또한 니체는 인싸가 되고 싶었다. 그의 음악과 철학이 인정받기를 원했고, 책을 출간할 때마다 지인들과 비평가들에게 보내어 그들에게서 오는 답변에 가슴 조리며 인정을 구걸하는 그의 모습. 어쩌면 그는 자신의 철학 근본 개념인 “우버맨쉬 (Übermensch:어원으로 볼 때 넘어선(über) + 사람(mensch)을 뜻함. 한국어로는 초인이나 극복인으로 번역)” 자체가 되려고 한 것이지 않을까?
그의 삶을 바라보며 연민(sympathy)이 가장 먼저 느껴졌지만 공감(empathy)이 가기도 했다. 나는 어린 시절 매일 몸에 통증을 가지고 살았다. 호주에 오기 전까진 만성적 육체의 고통은 내 정신에게 여유나 평안을 허락하지 않았었고 나는 늘 까칠하고 상대하기 싫은 인간이었다. 감사하게도 건강해져 육체적 고통이 사라진 지금은 큰 꿈을 좇느라 매일 행복한 고통 속에 살아간다. 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비교할 수 없겠지만, 책을 통해 만난 그의 고통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고통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란다"
–고영성 작가 어머님-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행복한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고영성 작가는 고통이 나의 몫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극복을 해야 되는 거고, 그 사고의 전환은 고통이 아프거나 도망쳐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선물이 되어 준다고 말한다.
고통은 그 경중이 아나리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달라진다(성숙한 방어기제)
–조지 베일런트<행복의 조건>-
하버드 대학교에서 70년이 넘는 전향적 추적 조사로 입증한 ‘삶의 황혼기에 뽑은 행복의 7가지 조건(1.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 2.교육, 3.안정된 결혼생활, 4.금연, 5.금주, 6.운동, 7.알맞은 체중)은 나와의 관계와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건강을 말하는데 그중에도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인생 선배의 지혜로부터 배울 수 있다.
네 자신이 되어라
–니체-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너 자신을 알라(메타인지)’는 대충 감이 오는데, ‘너 자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아직도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니체의 아포리즘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삶에 이유를 가진 사람은 거의 어떤 방법도 견딜 수 있다."
"어떤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그것을 반론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해야 할 이유다."
"늘 그래 왔듯이 모든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뉜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다."
삶의 존재 이유가 있는 자유인 혹은 우버맨쉬: 즉 끊임없는 긍정을 통하여 삶을 긍정하고 즐기는 인물. 이는 기존의 사상이나 견해들, 성聖과 속俗을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를 잃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산출해내는 천재를 뜻한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이른바 도덕군자가 아닌 윤리도덕에도 얽매이지 않는 결단력과 과격한 행동을 갖춘 존재로 볼 수 있다.
우버맨쉬가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안티프래질한 나
올해 연초에 어떻게 한해를 살아갈지 고심하며 결정한 2020 표어! 내가 정했다기보다 신박사님의 통찰과 영상을 통해 산출된 문장이긴 하지만, 니체를 만나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야 온전히 이해되어간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는게 고통스럽고,
매일 키로당 5분 이하의 속도로 뛰고 근력운동을 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매일 저녁을 안 먹고 간헐적 단식을 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매일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매일 책상에 앉아 부동산 공부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매일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까 고민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존경하는 하는 멘토, 우리 대표님께 뼈 때리는 조언을 듣는 것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꿈과 목표가 가까이 갈수록 더 커져서 그 간극에서 오는 고통은 이로 말할 수 없다.
힘들어 죽겠는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감사한 고통들.
그 고통이 인생이고 행복이라서,
나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 안티프래질 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