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마리 Oct 03. 2021

헛소리 킹

일상의 영감

어느 날 티브이를 보다가 갑자기 그냥 계속 도로를 달리는 장면만 보고 싶어졌다. 뭔가 지친 심신의 보상을 바랐는데 그냥 그게 그렇게 보고 싶었다. 밑도 끝도 없이, 옆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그것에 관해 죽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한마디 들었다.


헛소리 킹!


꽤 시간이 흐르고 그런 방송이 유럽에서 슬로 티브이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아쉬웠다. 내 아이디어를 누군가에게 꼭 뺏긴 것만 같았다.


아내에게 그런 핀잔을 들으면서도 내 얘기는 계속되었다. 고맙게도, 아내는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잘 들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내는 그런 생각이 영감이란 내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매우 사소하거나 엉뚱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하 하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래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어느 때부터인가 아내도 그런 영감을 즐기게 되었고 상상의 날개를 함께 펴 보기도 했다. 침대에서 천장 보고 누워 그런 얘기를 밤마다 두세 시간씩 한 달을 넘게 했는데 그로 인해 우리 인생 계획이 정말 바뀌었다.


그냥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고 말한 것들이 구체적인 계획이 되어 현실로 이어졌다. 서울 한복판을 떠나 경기도로 이사 온 것은 전적으로 그런 헛소리들 때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거기에 갔느냐며 신기해했다. 십오 년 전쯤 개발이 일단락되어 지금은 베드타운으로 완전히 자리 잡아 경기도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란 얘기까지 들었던, 그러나 최근 등장한 신도시들로 빛바랜 소박하고 아름다운 동네.


브레인스토밍.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다. 제한을 두지 않고 편집하지 않고 마음껏 끝까지 생각해 보면 기대하지도 않은 놀라운 결말이 기다리곤 한다. 끝을 보려는 심산으로 오래도록 길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나의 현실은 그런 생각들로 인해 변모해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일군다.


헛소리 킹! 마음에 드는 별명이다.

작가의 이전글 세 가지 조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