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내
아내는 나와의 첫 만남에서 본인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세 가지 조건을 들었다. 교사, 장남, 한국 사람. 놀랍게도 나는 그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학 강사였다. 유학 직후 열정은 가득했지만 현실감각은 좀 떨어졌다.
나는 장남이었다. 능력은 없었지만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는 처지였다.
나는 애초부터 한국 사람이었다.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당시 왜 교사는 아닌지 물었더니 본인과는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장남을 꺼렸던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세 번째 조건도 기억이 난다. 당시 나보다 먼저 만났던 한국 사람들이 모두 소위 잘 나가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는데 돈이나 직장 자랑이 너무 심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아내는 나를 선택했을까?
아내는 나와 이야기할 때면 무심결에 자기는 자기에게 시간을 원하는 만큼 주는 사람을 원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대학 강사이자 그 밖에도 몇 개의 바쁜 직함을 가진 가장이었기 때문에 정말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얘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간을 목숨과 바꾸어 살고 있었는데 아내와 만나 그 시간마저 내어 주고 있었다. 그저 좋았다. 거의 매일 밤 통화로 두 시간도 못 자고 일하러 나갔다.
아내는 지혜롭고 독립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내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나를 시험한 것 같다. 일생을 함께 할 사람이라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어디까지 들어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난 그 시험을 잘 통과했다.
나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내가 결혼한 후 내게 말했다.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처음 본다고. 아내도 나의 모든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 나는 부정적인 조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원하는 시간을 모두 주는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자는 시간도 아깝지 않게 기꺼이 내어 주었다. 아내와 나는 결혼 전 통화하면서 둘이 모두 기절하듯 잠들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그토록 서로의 말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만난 지 불과 삼 주도 안 되어서 결혼을 약속했다.
아내는 영국 사람이다. 정확히 말해 영국 교포다. 얼굴은 한국 사람인데 어릴 때 이민 가서 뼛속까지 영국인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 나를 남편으로 받아들였다. 둘이 맞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교사이다. 이젠 십사 년 차 대학 교수다. 아내는 교육전문가로서 내게 누구보다도 훌륭한 조언자이다.
나는 장남이다. 금전적인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적극적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아내는 한국을 점점 더 좋아하고 있다. 이젠 미래의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한다.
나는 나보다 아내의 사랑이 더 깊고 넓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행복하다.
누군가 내게 조언을 구한다면 꼭 말해 주고 싶다. 내건 조건이 모두 맞지 않아도 정말 맞는 것이 하나 있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그게 인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