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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Oct 22. 2021

과학과 시가 만나는 순간

빛과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이름이 붙여진다는 것은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인식 이전에 이미지의 일렁거림에 불과하다가 인식 이후엔 분명한 실체를 가진 존재가 된다는 이 시는 놀랍게도 현대 양자역학의 성취와도 깊이 닿아 있다.


자연과학에서 빛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보이는 골칫거리였다. 입자는 물질이고 파동은 에너지다. 어떤 대상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모두 지닐 수는 없는데 빛은 그런다. 입자로도, 파동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빛이 입자이자 파동으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두 가지 모습으로 번갈아 나타난다는 점이다. 빛의 광자뿐만 아니라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도 마찬가지다. 미시세계의 특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광자나 전자 같은 소립자가 우리가 관찰할 땐 입자로, 관찰하지 않을 땐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미시세계뿐만 아니라 거시세계에서도 그렇단 점이다.


빛이나 전자, 그러한 소립자뿐만 아니라 분자 수준의 물질까지 우리가 볼 때만 그렇게 물체로서 존재하고 보지 않을 때는 파동 즉, 일렁거림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김춘수의 꽃에서 말하는 바와 사실상 거의 같다.


내가 인식하지 않을 때 그는 파동처럼 이미지의 일렁임에 불과하지만 내가 제대로 인식할 때 그는 분명한 몸을 가진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관찰 유무에 따라, 인식 유무에 따라 존재의 본질이 달라진다.


시인은 그걸 일상에서 느끼고 시로 옮겨 놓았다. 자연과학자는 그걸 빛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관찰자 효과로 발견하고 논문으로 써 놓았다. 과학이 시와 한 점에서 만났다. 빛이 꽃과 만나 활짝 피어나는 순간이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단지 상상이나 비현실이 아니다. 그렇게 단정할 근거가 없다. 과학자가 말하는 것은 단지 밋밋한 사실이나 현실이 아니다. 예술가이기도 한 과학자도 많다. 시인과 과학자는 더 많이 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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