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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Dec 10. 2021

삶의 구겨진 종이

something important but not for everyone

어른의 구겨진 종이


선생님의 방 조교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지도학생들이 돌아가며 소박한 연구실의 자그마한 자리에 앉아 전화도 받고 작은 심부름도 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문을 급히 열고 들어오신 후 다짜고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셨다.


어, 여기 있던 거 어디 갔지?

선생님, 어떤 거 말씀이시죠?

종이를 이렇게 구겨서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거 말이야.

청소할 때 선생님 책상에는 일절 손대지 않았는데요.

그러면 어디에 갔을까?...

어, 여기 있다!


그러시면서 보여 주시는 게 정말 조그맣게 말린 종이 뭉치였다. 작은 포스트잇 같았고 그것을 돌돌 말아 콩알 같이 된 것을 지도교수님께서 보여주고 계셨다. 그 안에 무언가를 적어 놓으신 것 같은데, 과연 그 작은 것에 어떤 진기한 것을 적어 놓으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얼른 찾으셨기에 다행이었다. 


아이의 구겨진 종이


아이는 그거 어디 있냐며 엄마와 아빠에게 보채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막 와서 손과 얼굴을 씻고 발도 닦고 간식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아까 청소하며 그럴듯한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얼 찾는 것인지. 아이는 얼굴색과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거. 접은 거.

뭘 접어. 종이? 종이 접은 거?

응. 그거. 빨간색으로 된 거.

어떤 장난감이야?

응, 나는 거.

비행기?


널브러져 있는 장난감 상자들 속을 이리저리 뒤졌으나 없었다. 혹시나 하고 이단짜리 작은 책장의 책들 사이에 끼어 있나 살폈다. 다행히 있었다. 그렇게 혹시나 하는 곳에. 비행기라 간주하기는 힘든 것이었다. 그냥 구겨진 빨간 종이였다. 그렇게 책들 사이로 빨간 것이 있어 용케 찾았다.


삶의 구겨진 종이


아이가 애타게 찾던 구겨진 종이비행기를 발견하였을 때, 갑자기 지도교수님께서 아주 오래전 애타게 찾으셨던 그 작은 구겨진 종이가 떠올랐다. 그토록 긴급하고 간절하게 찾던 그 구겨진 종이들이 아이에게, 지도교수님께 어떤 의미였는지 다는 알 수 없다. 다만, 소중한 무엇이라는 것, 소중한 무엇을 담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남에게는 그저 구겨진 종이일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더없이 진기한 그 무엇.


나에게도 그처럼 구겨진 종이들이 있다. 남들에게는 구겨진 종이로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일부러 구긴 생각, 어떤 것을 형상화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그 안에 담아 두기 위해 똘똘 말아두기까지 한 글이 있다. 그걸 어디다 두었는지 애타게 찾을 적에, 다행히 원래 놓인 그 자리에, 떨어진 그 자리에 고이 놓여 있으면 좋겠다. 그걸 찾아 여깄어 하고 웃으며 건네줄 벗이 있다면 더욱 반갑겠다. 내 삶의 구겨진 종이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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