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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Dec 12. 2021

대명사

언어의 논리로 세상 보기

언어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닌다. 그러한 언어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언어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가 만나는 한 지점, 대명사의 경우로 떠나 본다.



                      < 기념식수 >

                                                  이문재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정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 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먹으면서 나는 일부러

어린 왕자의 이야기며 안델센의 추운바다며

모래 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 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가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이 너무 크다고 마다 했지만

나는 너희 엄마를 닮은 은수원사시나무 한 그루를

너희들이 노래부르며

파놓은 푸른 구덩이에 묻는다

교외선의 끝 철길은 햇빛 

철 철 흘러넘치는 구릉지대를 지나 노을로 이어지고

내 눈물 반대쪽으로

날개도 흔들지 않고 날아가는 것은

무한정 날아가고 있는 것은



학부 문학교육론 시간. 이문재 시인의 시 '기념식수'를 분석해 제출했다. 형수가 죽고 난 후 조카들을 데리고 교외로 나가 기념식수를 하는 것인데 그때 은수원사시나무가 나온다. 그때 의문이 들었다. 형수가 죽었는데 왜 나무를 심는 것일까? 그리고 하필 왜 은수원사시나무일까?


나와 조카들은 형수를 매개로 이어진다. 그런데 형수가 죽었다. 나와 조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그래서 시인은 형수의 자리에 나무를 대신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와 조카 사이에 놓인 공백이 그나마 메워진다. 이때 나무는 언어의 논리로 치면 대명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무언가 빈자리를 채우기는 하되, 최소한의 정보는 가지고 있되, 정작 그 자체로는 실체가 아닌 것. 그래서 항상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수밖에 없는 것.


그럼 왜 하필 은수원사시나무였을까? 식물도감에서 그리고 실제로도 본 적이 있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이 손짓하듯 너무도 아름다웠다. 시 속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형수를 그렇게 아름답게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아직도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그 나무를 보며 우리 엄마가 저토록 아름다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시 속에서 나와 조카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왜 하필 나무를 택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시집 속의 다른 시들이 필요했다. 시인은 사람이나 동물이 죽어서 다시 나무로 태어난다고 했다. 기념식수에서 형수의 자리에 나무를 심는 것도 형수가 나무로 다시 태어나 아이들을 만나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집 전체가 필요했다. 해석학적 순환이다.


교수님은 전에 계셨던 학교에서 이문재 시인을 직접 가르치셨다고 했다. 시인은 막노동을 하고 검게 그을린 얼굴로 늘 수업에 들어왔다. 시인의 현실은 팍팍했다. 어느 시에서 그는 자신의 무덤이 태양 속에 있다고 했다. 태양이 지면 무덤도 함께 소멸한다. 그래서 해가 지는 풍경은 늘 아름답다고 했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엄마 잃은 조카들을 위해 아름다운 나무를 대신 심어 주는 시인처럼, 언어도 대명사를 통해 부재중인 명사를 대신하려 든다. 언어의 논리와 삶의 논리가 닿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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