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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Oct 22. 2023

11. 기호의 자의성과 필연성

질문하는 언어학

[교수] 방금 우리는 의성어마저도 언어의 자의성을 강력하게 지지해 주는 증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언어는 기호이고, 그래서 형식과 내용을 가지며, 언어 형식에 해당하는 음성과 언어 내용에 해당하는 의미는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는 기호의 2가지 종류 중 어디에 속하는 걸까요? 다음 문제는 이런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4조에서 문제 풀어 주기 바랍니다. 


[학생18] 4조 ‘언어는 소중하죠’입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기호는 자의성을 띠는가, 아니면 필연성을 띠는가?’입니다. 저희 조에서는 자연적인 기호는 필연성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교수] 예, 잘 들었습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죠. 


[학생18] 예, 전에 배운 것처럼, 자연적인 기호의 예로는 연기가 있습니다. 연기는 거무스름한 기체로 눈에 보이기도 하고 코로 냄새도 맡아집니다. 그런 두 가지 형식에, 어딘가 불이 났다는 내용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호입니다. 그리고 연기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니 자연적 기호입니다. 그런 연기가 가진 형식과 내용은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교수] 차분하게 설명을 잘해 주었는데, 학생의 설명은 주로 왜 연기가 자연적인 기호인가에 집중되어 있고, 정작 왜 연기가 필연성을 띠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았네요. 다시 더 설명해 주겠어요?


[학생18] 아, 예. 연기에 대해 좀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다가 정작 필연성 부분이 소홀해졌네요. 그게 아닌데... 음... 그러니까, 연기는, 연기의 형식과 내용은 필연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교재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연기의 형식과 내용의 결합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한국을 예로 들면, 예전 고대 삼국시대에도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나고 현재 한국에서도 연기가 보이면 불이 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연기는 연기이고 다른 나라, 그니까 영국에서도 연기는 연기입니다. 연기는 어디나, 어느 때나 똑같습니다. 그 형식에 그 내용이 그대로입니다. 


[교수] 정말 설명 잘했습니다. 좋은 설명이에요. 연기를 이루는 형식과 내용의 결합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늘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거죠. 그게 바로 연기라는 자연적 기호가 보여주는 필연성입니다.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추가적으로 하나 더 질문하겠습니다. 연기는 그러한데, 전에 살펴본 신호등은 어떤가요? 


[학생18] 예, 음... 신호등은... 음... 그것도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파란색일 때는 건너고 빨간색일 때는 서고 하니까 음... 같은 것 같은데요. 


[교수] 정말인가요? 정말 그런가요? 혹시 영국 가 보셨나요? 정말 신호등이 파란색, 빨간색이던가요? 


[학생18]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은데요. 안 그런가? 음...


[교수] 학생의 기억에 우리나라에서도 신호등 색깔이 늘 같았나요? 파란색, 빨간색으로?


[학생18] 음... 그런 것 같은데요. 다른 색깔이 있나요? 색깔이 바뀌었나요? 


[교수] 내 기억으로는, ‘가세요’를 뜻하는 색깔과 ‘서세요’를 뜻하는 색깔은 일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세요’를 의미하는 색깔로는 파란색도 있지만 초록색도 있습니다. 녹색, 연두색, 청색, 남색, 하늘색 등 다양한 색깔이 쓰여 왔죠. 물론 푸른색 계통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색깔들이 모두 한 종류의 색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서세요’를 뜻하는 색깔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붉은색 계통인 건 맞지만 세부적으로는 꽤 다양한 색깔이 쓰여 왔죠. 한국 내에서도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나라마다도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신호등은 연기와 비교하여 어떻습니까? 같은가요, 다른가요?


[학생18] 다른 것 같습니다. 


[교수] 그렇죠! 다르죠. 신호등에서는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이라도 달라지죠? 그러나 연기의 화학적 발생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가 없겠죠? 그건 화학에서 다루는 자연법칙에 근거하니까요. 신호등은 인류가 출현하고 난 뒤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의 산물입니다. 연기는 자연 현상이고요.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자연 발화로 인해 붙이 붙으면 연기가 피어올랐겠죠. 연기의 형식과 내용의 결합은 예전이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같을 겁니다. 그러나 신호등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 신호등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 기호이고, 연기는 자연 현상인 자연적 기호입니다. 인위적 기호인 신호등은 형식과 내용이 자의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자연적 기호인 연기는 형식과 내용이 필연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이 둘 중 어느 쪽에 해당할까요? 인위적 기호? 자연적 기호? 


[학생18] 예, 언어는 신호등 쪽인 것 같습니다. 언어도 자의성을 가지니까요. 신호등이나 언어나 모두 자의성을 가진 것입니다. 


[교수] 예, 그렇죠. 신호등이나 언어나 모두 자의성을 가진 기호이죠. 둘 다 사람이 만든 것이고요. 따라서 언어 역시 자의성을 가진 인위적인 기호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 달라지죠.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고대 삼국시대의 언어와 현대 한국의 언어가 다릅니다. 시대에 따라 음성과 의미의 결합이 다르죠. 현재를 기준으로, 한국에서 쓰는 말과 영국에서 쓰는 말이 다릅니다. 같은 의미에 다른 음성이 연결되죠. 이렇듯, 시간과 장소에 따라 형식과 내용이 달라지는 언어는 분명히 신호등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기호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언어는 연기가 아니라 신호등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 거죠. 정리하면, 언어는 신호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형식과 내용 간의 관계가 자의성을 띠는 인위적 기호이고, 연기와 같은 것은 인간이 만들지 않은, 형식과 내용의 관계가 필연성을 띤 자연적 기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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