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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광진 Mar 28. 2019

군자는 화(和)하고, 소인은 동(同)한다

화(和)는 변화의 시작

"군자는 이익을 위해서 주관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끌려가지 않지만, 서로의 생각을 조절하여 화합을 이루고, 소인은 이익을 위하여 주관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끌려가지만 서로의 생각을 조절하여 화합을 이루지는 못한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논어 <자로>


화동 담론에서 화(和)는 군자의 것입니다. 군자는 화(和) 함으로써 줏대를 꺾지는 않지만, 상대방과 조절하여 화합을 이룰 줄 압니다. 그러나 소인의 동(同)은 시시때때로 줏대를 꺾지만, 정작 상대방과 화합하지 못합니다. 화(和)와 동(同)의 대비, 화(和)는 질서를 만드는 것이고, 동(同)은 하나로 밀어붙입니다. 동(同)은 패권적일 수밖에 없고, 결국 폭력을 수반하게 됩니다. 동(同)의 개념을 실천한 것은 진나라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천하를 통일했지만, 화(和) 하지 못하고, 동(同) 했기 때문에 천하통일 후 14년 만에 망했습니다. 중국은 이때부터 과연 동(同)의 모델이 지속한 가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화(和)의 원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중국의 사상들은 대비되는 것들이 등장하여 상호 조화를 이룹니다. 시에서는 사실과 진실, 주역에서는 음과 양, 공자의 화동 담론은 화(和)와 동(同), 맹자의 이양역지以羊易之에서는 소와 양, 노자는 무(無)와 유(有), 장자는 생명과 기계, 묵자는 겸(兼)과 별(別), 한비자는 탁과 발의 개념이 서로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룹니다. 사상에서 이론과 실천, 청과 탁, 추상과 상상, 좌와 우, 이상과 현실, 도와 수, 천과 인 등이  서로 대비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사상 안의 대비되는 개념들 외에, 각기 다른 사상들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시, 서, 예, 악, 역, 춘추에서 시작된 중국의 유가 사상은 공자에 이르러서 집대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치 중심성에 대해서, 배제와 갈등의 씨앗을 경계한 노자의 무위 사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게 영향을 받던 공자는 후대에 맹자와 순자에게 넘어가서, 의와 예를 강조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맹자의 의의 강조는  수신으로 집중하여 더 깊어진 반면, 순자가 강조한 예는 법가의 탄생을 불러왔습니다. 제자백가의 사상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다가, 다시 그 모든 것이 유가로 수렴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동양  사상은 '치국평천하'라는 공동의 목표로 화(和)의 질서를 수립했습니다.


유가 사상의 집대성의 끝(논리적으로 완벽한)을 보여준 날카로운 법가가 선진 사상의 마지막에 등장했습니다. 그런 법가로 무장한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2대를 못 넘기고 망했습니다. 변화의 속도를 조절하지 못한 탓일까요. 많은 백성들과 전국시대 몰락 귀족들의 반발 속에 진나라는 무너졌습니다.


그 후 등장한 한나라는 노장사상을 앞세워, 법가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무제에 이르러서는 노장사상을 배척하고, 유가를 세워 나라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그 유가는 송, 명대에 이르러 다시 불가와 도가의 영향을 받습니다. 불가와 도가가 우주원리의 문제에 답을 찾아가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유가는 실천적이고, 경험적이라서 윤리규범이 될 순 있어도 신앙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가와 도가의 영향으로 우주원리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리(理)와 기(氣)에서 찾습니다. 리(理)와 기(氣)의 이론을 정립한 것이 성리학, 양명학입니다. 이렇듯 사상이라는 것이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화(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동(同)에 익숙합니다. 유행에 따르지 못하면 뒤처지는 느낌을 받고, 남들이 사는 삶을 따라가지 못하면 제대로 못 사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입시경쟁으로, 하나의 기준에 모두가 줄 세워지는데 익숙하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의 경제성장의 영광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뒤처지면 손해였던 경험 때문에 하나의 경향에 물드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시류에 따르는 그러한 삶 속에 개인의 개성은 묻혀가는 것이 '철든 삶'으로 이해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극심한 청년실업과, 저성장 기조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제까지 믿어왔던 가치체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집니다. 동(同)으로 익숙했던 우리 삶에 많은 사람들이 화(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문학 바람은 그렇게 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라고 밝혔습니다. 서로 다른 두 개체의 만남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서로가 변화하는 계기가 됩니다. 두 개체의 차이만큼, 즉 대비가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름은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동이 지속될 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발전을 못하면 변하는 시류에 적응할 수 없고, 언젠가는 뒤처질 뿐입니다. 다름이기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내면으로 잘 받아들이면, 배움의 자세로 임한다면 나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나의 영향을 받는 상대방도 변화할  것입니다.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변해가면서 발전해 가는 것이 풍요로운 인생일 것입니다.


어떤 한 개체의 개조는 개별 단위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개체의 존재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 조직하는 과정에서 형성됩니다. 관계가 변화할 때 개인이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서 동(同) 하려고 하지 말고, 화(和) 함으로써 스스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상도, 사람도, 국가의 미래도 화(和)를 어떻게 잘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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