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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K Choi Aug 07. 2021

성실한 당신, 오늘은 어떻게 소진되셨나요?

동시대미술 같이 읽기(1): 유장우 개인전 《소진되는 몸짓》(2020)

존경하는 은사님께서는 미술 비평이 예술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바탕에 두고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곤 하셨습니다. 작가의 창작물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작업에는 작가에 대한 경외심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는데요. 예술가들은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능력과 의지, 혹은 시간의 이유로 허락되지 않은 창작 활동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창조의 본래적 개념을 실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예술가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선천적 조건과 환경적 제약을 넘어 인간이 절대적이고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강요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무용하다고까지 호도되는 작업을 지속하며 시대의 민감성 혹은 감수성의 경계를 확장시킵니다.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저에게 예술가들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관람자들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찰나적 순간을 곱씹게 되고, 그 안에 담긴 함의를 발견하며 개별 존재의 실존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그런 은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저는 ‘도저하다’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1) 학식이나 생각, 기술 따위가 아주 깊다. 2) 행동이나 몸가짐이 빗나가지 않고 곧아서 훌륭하다.’ 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흔히, ‘도저히~할 수 없다. / 역부족이다.’와 같이 불가능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사 ‘도저히’와 달리, 이 부사의 동사형인 ‘도저하다’가 내포하고 있는 올곧고 성실한 이미지는 위에서 설명한 예술가의 작업이 가지는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고


작년 전시에서 받은 지적 충격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유장우 작가는 2019년과 2020년에 열린 두 번의 개인전을 통해 예술가가 자신와 사회에 가지는 도저한 성실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귀국 후 열린 첫 개인전 <소진되는 몸짓>에서 그는 그가 유학했던 독일의 사회문화적 역사가 담긴 작업들을 선보였습니다. 전시를 대표했던 퍼포먼스 <믿음과 현실>은 1920년대 독일에서 일어났던 문화 투쟁인 안티크바-프락투어 논쟁(Antiqua-Fraktur dispute)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몸짓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고찰을 보여줍니다.


안티크바와 프락투어체


잠깐 1920년대 독일 상황을 살펴봅시다.1차 세계대전이 1919년에 발발할 당시 독일은 현대적 정치체제와 산업화 정도가 주변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민족의 자부심을 되찾고자 공격적인 영토확장 뿐만 아니라 문화 면에서도 국가 내부적으로 여러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래서 설명드릴 타이포그라피 논쟁입니다.


알파벳까지도 ‘독일다움’이라는 민족 정체성의 문제이자 치열한 논쟁의 대상으로 다루어졌던 20세기 초 독일. 그곳에서 타이포그라피는 단순히 글자가 아니라 이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와 이념적 지향이 반영된 정치적인 매체였습니다. 직관적인 이해가 쉽기에 나치의 선전활동에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된 안티크바가 이 논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1920년 당시 전통주의자들이 진정한 독일 글자라고 여겼던 것은 프락투어체(Fraktur)와 같은 블랙 레터(고딕체)였습니다. 반면, 진보적 성향의 개혁주의자들은 안티크바 양식의 로만체를 받아들여 독일이 국제사회에서 괴리되지 않고 유럽 및 서구 세계와 발맞출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인쇄업자와 미술가가 보기에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창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이었으며, 계급과 민족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주의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와 달리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조했던 전통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에게 불만을 품고 마찰을 빚었는데, 이는 각자의 철학과 신념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대립이라는 점에서 몬드리안과 되스부르그 사이에 있었던 사선 논쟁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건축사의 맥락에서 정말 재미있게 풀어갈 수 있는 철학과 신념의 대립이 가시화된 사건이었거든요.


직선만을 허용했던 몬드리안과 달리 되스부르그는 인간 삶에 대각선은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라고 보았다.


한편, 유장우 작가가 조사해 작업에 반영했듯이, 미술계에서는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의 저서 <측정의 교육 Unterweisung der Messung>(1525)에서 안티크바와 프락투어 양식으로 알파벳을 적는 방법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참고로, 뒤러(Albrecht Dürer, 1471- 1528)는 북유럽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로,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원근법을 적용한 여러 판화와, 아래와 같은 자화상으로 유명합니다. 뒤러에 대해서도 자화상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이야기를 나중에 풀어보도록 할게요.


《자화상》 (1500)

모쪼록, 뒤러가 <측정의 교육>에서 소개한 안티크바와 프락투어 양식의 알파벳은 각기 13개인데, 유장우 작가는 이 책에서 설명한 알파벳들을 바탕으로 서로 대응하는 철자를 바닥에 투사하고 퍼포머들에게 각기 서로 다른 타이포그래피 도식에 따라 움직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가령, 퍼포먼스 2명이 있을 경우, 한 명은 안티크바 양식으로 적힌 철자 A를 따라 움직이고, 나머지 한 명은 프락투어 양식으로 적힌 철자 A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풍부하고도 체계적인 리서치를 바탕으로 자신이 탐구하는 소재인 ‘몸짓’을 타이포그래피 논쟁에 연결시켜 몸짓의 사회적 의미를 시공간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믿음과 현실> 퍼포먼스 장면 중 일부


주목해야할 것은 퍼포먼스들의 몸이 무대 위에서 결코 닿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입니다. 퍼포머는 물구나무를 서고 앞뒤로 구르는 등 계속해서 격렬한 몸짓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중에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서로의 몸을 통과하고 비스듬히 지나가면서 새로운 몸짓을 만들어냅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덧붙이자면, 원래 작가는 작업 구상단계에서 2021년, 그렇게나 이슈가 되었던 <오징어게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네요. 서로를 선 밖으로 밀쳐내려는 몸짓들이 땅에 그려진 선 위로 제한되며 서로 대치되던 상황은 작가의 작업에서 반대로 서로의 몸을 닿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긴장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규칙을 제외하면 퍼포먼스의 진행은 전적으로 퍼포머의 자율에 맡겨집니다. 저는 이 퍼포먼스를 보면서, 특정한 ‘믿음’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 사회적 갈등이 격심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은유하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퍼포머들의 몸은 다른 믿음을 가진이들과는 닿을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는 현재의 사실, 즉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적 지향이 달랐기에 논쟁과 마찰을 빚었지만 미술과 디자인 영역에서의 생산적인 논의를 발전시켰던 과거의 사선 논쟁과는 달리, 오늘날 소셜미디어는 개인의 믿음을 더욱 확증편향시키는 구조로 이루어져 개인이 자신의 믿음으로만 구성된 사회를 유일무이한 절대적 현실로 간주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연이어 들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2020)


실제로 올해 여러 언론고시에도 시험 주제로 등장한 확증 편향은 작년 개봉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인 <소셜 딜레마(Social Dilemma)>(2020)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튜브, 페이스북 등 사용자의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 알고리즘을 제공하는 매체들을 통해 다른 의견은 틀린 것이 되고, 가짜 뉴스가 사실로 손쉽게 둔갑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글에 호감을 표시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은 비슷한 결의 글들을 우리의 피드에 물어놓아줍니다. 그렇게 내가 지지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 가까워지고 반대급부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무리들또한 크기를 늘리며 서로 대치하며 상대에 대한 분노와 몰이해를 키워가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고요.


어쩌면, 사실 우리는 이미 바람직한 소셜 미디어 사용법이 무엇인지 알고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매일의 회사와 각자의 삶도 피곤한데, SNS에서까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은 건 아닐까요. 같은 것에 기뻐하고 같은 대상에 분노하는, 나와 공감대를 형성한 사람들이 웹상에서라도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특정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언팔하고 차단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건설적으로 교류하려는 몸짓은 과연 어느 영역에서 생존할 수 있으며, 그러한 몸짓들은 어떻게 서로 닿음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을까요? 이처럼, 유장우 작가의 <믿음과 현실>은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문화적 논쟁에서 출발해 동시대 우리나라 사회가 당면한 사회적 신뢰도에 대한 문제와 소통 가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남긴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내요. 마지막으로,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를 보고 있자니, 문득 딘이 노래한 <인스타그램>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지겨워, 이놈의 정보화 시대"



참고)

여기에서 프락투어체(블랙 레터)는 선이 두껍고 글자 사이의 연결선이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서체로, 종이가 귀하고 단어가 길었던 중세에 학자들이 손으로 쓴 글씨를 본 떠 만들어진 양식입니다. 한때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이 양식은 구텐베르크 시대에 독일에서 활자로 탄생했고 루터의 성서에서 한층 완숙해졌는데,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유럽 국가가 이탈리아 인쇄소와 로만(라틴) 활자체인 안티크바(Antiqua)를 채택하면서 블랙 레터는 신문 제호와 특별 공문에 사용되는 변방의 위치로 밀려났으나, 독일은 대체로 이러한 변화에 저항했습니다. (참고: 더글러스 토머스, 정은주 역, <푸투라는 쓰지 마세요>, 서울: 마티, 2018, pp.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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